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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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리뷰라기보다는 '책읽기'와 관련하여 한 부분을 발췌하여 저의 생각을 연장해봅니다.

 

(41-42) 「적어도 반복해서 읽는다」

 후루이 요시키치는 이어서 또 한마디 합니다. 자신으로서는 이제 두 손 들고 말 것 같은 것을 말하고 있어, 요컨대 읽어도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어쩐지 싫은 느낌이 드는 것이야 말로 독서의 묘미, 읽고 감명을 받아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 읽으면 잊어버리고, 그래서 반복해서 읽는 거라고 말이지요. 이런 것을 가볍게 말해버리는 사람이 동시대에 살고 있으며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늘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어도 전혀 모르겠다,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지루해서 왠지 싫은 기분이 든다고 하는 것, 다들 뭔가 자신의 능력이 뒤떨어져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화를 내거나 책을 내팽개치거나 하는 것입니다. 번역이 나빠라고 한다거나 좀더 쉽게 쓰란 말이야라며 다른 사람 탓을 하거나 좀 더 공부해야겠는걸, 좀 더 쉬운 책은 없을까라든가, 초급이 있어야 중급이 있고 중급이 있어야 상급이 있다는 듯한 지()의 서열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런 일종의 열등감이나 분노를 이용하여 엉터리 같은 입문서나 비즈니스 책이나 팔아치우며 독자를 착취하는 패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 첫 책 <야전과 영원>을 내고 일본에서 일약 유명해진 사사키 아타루의 두 번째 책입니다. 일본의 니체라고 불릴정도로 일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장석주 시인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아타루가 보여주는 문체에 대해 문체의 압도적인 힘에 놀랐다.라고 평하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장석주 시인이 말한 '압도적인 힘의 문체'를 느끼기보다는 거침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해버리는 작가라고 정리해보았습니다.

 오늘 인용한 부분은 책읽기에서 많은 독자들이 부딪혀본 문제일 겁니다. 어려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쉬운책을 읽어야하나하는 고민들. 저자는 거리낌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읽어가라, 그리고 적어도 반복해서 읽으라'라고 일갈하고 있습니다. 마치 '공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질문에 '꾸준하고 열심히 하라.'라고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달리 다른 방도가 있을까요? 정면승부를 하라는 말이아닐까요?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제목은 독일의 시인 파울 첼란의 시의 한 구절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제목만 봐서는 '뭐야 이거'라는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책에대해 짐작하기는 힘듭니다. 이 책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책읽기와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 즉 읽고, 쓰고 생각하는 행위를 담은 모든 활동으로서의 문학의 혁명성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문체란 어떤 것일까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보게 되었는데, 아직 압도적인 힘이 느껴진다거나 하지는 못한 걸 보니 아직 제가 이를 파악하기에는 많이 모자란 것 같습니다. 다만 기존의 인습적, 관습적 사고와 어렴풋이 받아들이는 정보와 그 관행에 관해 도적적이고 독창적인 견해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서 통독을 하고 재독을 하고 싶어지는 책입니다. 위에 발췌한 것처럼 적어도 여러번 반복해 읽어나가야겠습니다. 

  여기에 인용한 부분은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서운 것, 그만큼 진지하고 심각한 일이라는 것이죠. 읽어서 다 이해가 되는 책이면 책으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가 가미된 도전적인 책을 쓰는 것이 책 쓰는 사람, 작가로서의 의식에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한 번 읽어서 나에게 다 이해되는 책은 나를 미쳐버리게하고 나를 바꿀버릴만한 혁명적인 책은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아타루는 자신의 독서량에 만족하는 행위의 무의미성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책 읽는 행위에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다는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夜戰)과 영원(永遠)>은 자음과모음에서 10월에 출간 예정이라는데 벌써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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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데이비드 케일리 외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물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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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대로 독후감)

 

이반 일리치는 세상에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이반 일리치는 정규학교를 거의 거치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고 성장하였으며, 카톨릭교회의 신부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독립적인 한 개인이자 주체로서 이반 일리치는 평생을 통해 다양한 영역의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대한 대안과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책자’운동을 통해 사람들이 이 문제를 논의의 주제로 삼기를 원했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의 커다란 담론인 교육, 의료화와 건강, 운송 및 교통등의 수단을 도구로 규정하고 이를 두 가지 분수령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에 주는 변화를 파악하였다. 우선 초기 분수령에 이르면 도구는 우리가 기대했던 생산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분수령에 이르게되면 도구는 반()생산적이 되어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된다는 것이다. 이는 도구가 만들어진 의도와는 멀어지는 사람이 장점으로서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사람보다 더 많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도구들의 반생산성을 예로 들면, 제도화된 의무교육으로서의 학교 교육은 많은 어린이에게 가난에더해 의무교육을 마치지 못했다는 죄의식까지 심어주며, 학교는 필연적으로 탈락자를 만들어내는 제도로 되어버린 점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무언가를 배울 수 없다는 무능과 무기력에 빠지게되고 이는 사회통제라는 도식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개인을 양산하게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만연하는 수많은 자격증따기 열풍은 제도화된 의무교육의 역기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정 직업을 얻기위해 권위를 내세우는 어떤 독점 기관이 제시하는 시험을 통과하고 자격증을 따야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다. 자격증은 한 개인이 가능한 능력의 확장을 의미한다. 자격증은 마치 컴퓨터 게임의 머니 내지는 무기와도 같은 기능을 한다. 한 개인의 능력이 되는 자격증은 곧 개인 자신인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자격증따기 열풍지나친 자기 긍정이 불러온 결과가 아닐까. 여기서 과잉 긍정은 결핍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긍정은 개인화되고 분열화된 사회 구성원에게 개별적이고 무기력한 피로를 가져다주고, 나아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병리학적 상황을 초래한다고 한병철 교수는 말하고 있다.    

 한편 이반 일리치는 운송 수단 및 교통의 문제를 통해 지나친 운송 수단의 발달이 비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자동차와 교통체증은 대도시에서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절실히 느끼는 점이다. 교통 수단은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여 속도 경쟁을 하고 있지만, 공간적으로는 제한되어있다. 그 결과 대도시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에 쫓기게되는 부작용을 경험하게된다. 소설가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에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고, 회사에서 권고퇴직을 하게 된 주인공이 인지하는 시간성을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장비나 운송 수단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 일주일에 걸쳐 해내던 일을 단 하루, 혹은 몇 시간만에 끝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주일의 시간을 단축했다고 여가시간이 고차원적인 활동에 쓰이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인간의 정신적정서적 한가로움을 위해 쓰이지도 않는다. 사색적인 안식과는 무관하게 그 단축한 여가시간은 끊임없이 다음 일을 위해 쓰여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현대 산업사회가 추구한 효율성의 극대화는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에 쓰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여가시간이란 다음에 하게될 미션을 위해 필요한 육체적인 원기 회복의 시간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의료문제의 경우, 이반 일리치는 과도한 의료화에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건강을 일정 강도 이상으로 의료화할 경우, 진단과 치료 모두를 의학이 독점하게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을 의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배우게 되고 고통을 견디어내는 능력이 퇴화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의사는 생명을 책임지는 관리자가 되어버렸다.

 관리자가 된 의료의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실히 드러나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Middles East Respiratory Syndrome)이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화두이다. 첫 감염자 발생이후 한 달이 넘어가고있다. 감염된 환자는 14번 환자와 같이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린다.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병리학적 접근에서 보면 감염 환자14번 환자로 불리는 것이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 방송에서도 메르스사태는 마치 국가 비상 사태로 선포되고 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손세정제를 비치하고, 비상 소독을 자주 실시하고 있으며, 국민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을 한다. 관리의 대상으로서의 메르스는 방송을 통해 국민의 안전이 위기에 내모는 주범이 되었다. 심지어 질병관리본부에서는 메르스에 대처하는 방법과 같은 광고를 여기 저기 붙여놓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현재 대한 민국 사회에 번져있는 메르스에 대한 필요 이상의 공포는 언론과 대중 매체라는 도구가 우리에게 주는 반생산성의 산물이라 볼 수도 있겠다. <피로사회>에서 제시하듯 배타적 타자에대한 면역반응으로서 공산주의에대한 혐오와 공포가 20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한 언론과 대중 매체 그리고 권력의 합작품이었다면, 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21세기에 대한민국 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신경증적인 폭력이라고 볼수도 있다. 이반 일리치는 오늘날 중대한 위협은 건강에대한 병적인 추구 그 자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하고 있다.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독백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필요 이상’은 이반 일리치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가 반()생산성을 갖기시작하는 두 번째 분수령을 넘어선 상태에 상응할 것이다. 소설 속 한 개인의 자각을 통해 이반 일리치가 지적하고 있는 도구의 부작용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과  <피로사회>에서는 모두 머무는 삶, 사색적 삶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반면 이반 일리치는 개인의 자각을 넘어서서 연대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개인의 소박하고 절제하는 삶과 더불어 가속화되고 반생산적인 역기능을 통제할 공생을 위한 도구로서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제도와 적정 수준의 기준을 마련해야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가 책에서 언급한 방대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라는 정신이다.  

 

참고도서

- 이반 일리치데이비드 케일리,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권루시안 옮김

 

-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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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 속도에서 깊이로 이끄는 슬로 리딩의 힘
이토 우지다카 지음, 이수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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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하시모토 선생의 수업은 다면적으로 보는 눈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입시 공부는 기억력 하나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주입식 학습만으로는 꾸려갈 수 없다. 관찰력, 판단력, 추리력, 종합력이 한데 어우러져야 효과를 발휘한다. 그 토대가 되는 것이 국어 실력이다. 국어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른 교과를 이해하는 힘도 크게 달라진다. 수학이든 물리든 발을 깊이 들여놓고 주제의 핵심에 다가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힘이 바로 학력의 토대이며 국어 실력이다. 국어 실력은 살아가는 힘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면 무엇보다 국어 과목이 중요하다.

(122)

 단어 속에는 넓은 공간이 있다. 단어 하나를 철저하게 이해하면 역사, 문화, 사회, 전통 등 다방면에서 지식의 폭이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다. 속독으로는 습득할 수 없는 그 폭을 여유 있게 즐기는 것이 좋다. 에티 선생의 수업은 단어가 지닌 무한한 공간을 즐기면서 교재에 얽매이지 않고 호기심의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한다. 은수저 노트가 학생들에게 길라잡이가 되어 주었다. 학생들은 정답이 있는 교재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트에 스스로 찾아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자유롭게 써 넣고, 그것을 다 같이 발표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생각을 넓고 깊게 만들었다.

 

 

: 이 책은 일본의 한 국어 선생이 한 권의 소설책을 중학교 국어과정 3년동안 가르치고 변화한 학생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젊은 국어 선생 하시모토(에티 선생)는 대학 졸업 후 시골의 한 사립학교에 부임하게 됩니다. 얽매이지 않은 수업 방식을 보장받는 상황에서 에티 선생은 자신의 소신대로 학생들에게 진득한 국어 수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에티 선생의 국어 수업과 학교가 유명해진 것은 동경대 진학이 전무하던 시골 학교에서 선생이 가르치기 시작한 후, 다수의 학생이 동경대를 진학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대학을 보내는 것이 에티 선생의 의도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 결과는 다분히 변화를 경험한 학생들에 나타난 수많은 결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 책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모든 학생이 국어 수업을 즐기는 것에서 나아가 타인을 배려하고 경청할 줄 아는 성숙한 성인으로 사회에 진출했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제자들의 이야기들이 있었기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업 방식도 84년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국어 실력이 모든 학습의 토대이며, 살아가는 힘이라는 표현에 저는 깊이 공감을 했습니다. 올해 초에 들었던 장석주 작가의 강연에서, 작가는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좌뇌만 상당히 발달한 사람이다,고 말하시더군요. 우리의 교육은 정보와 지식을 기억하고 수리력, 추리력만 발달한 인간으로 키워낸다는 말이었습니다. 우뇌를 잘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잘 놀아라이런 말을 하셨었고요. 잘 놀 수 있게 준비된 수업이 에티 선생의 국어 수업이라고 봅니다. 소설 <은수저>에서 주인공이 막대사탕을 먹는 대목에서 에티 선생은 준비해온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막대사탕을 풀어놓고, 학생들이 소설의 저자가 경험하고 느꼈을 법한 감정들을 학생들도 스스로 체험하게 합니다. 주인공이 연을 날리는 대목에서는 미술선생과 상담하여, 직접 연을 만들어 국어 시간에 밖에 나가서 연을 날리고 놉니다.

 책에 나오는 에티 선생의 국어 시간뿐만 아니라 선생의 삶 자체도 감동적이고 존경스럽습니다. 에티 선생이 백수(百壽)를 맞은 2010, 이 책의 마지막 교열 원고를 들고 찾아간 저자가 이제 선생님은 수업의 진짜 목적을 이루셨으니 100점 만점입니다,고 하니 대꾸하는 에티 선생의 말이 걸작입니다.

 지금 나는 <은수저>의 새로운 커리큘럼 작성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요즘 학생에게 맞는 <은수저> 연구 노트입니다. 이번 노트는 이전 것보다 조사할 것써 넣을 것의 분량을 늘렸습니다. 작품과의 시간이 더 벌어진 만큼 좀더 재미있게 옆길로 새는 항목도 늘렸고요. 그러니까 이것이 완성되지 않으면 만점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 밖에도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환갑을 두 번 맞이할 때까지, 120세는 살아야겠네요.

 이 책을 읽고나면 교육분야에서 일하시는 분이나, 학부모에게 권해주고 토론을 해보고 싶네요. 법적으로 금지되어있는 선행학습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들이나 학부모들이 읽고, 어른들의 욕심에 앞서서 과연 아이들의 행복이 뭔지를 먼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토론을 통해서, 에티 선생이 자율적이고 소신있게 수업을 해나갈 수 있었던 당시와는 사뭇 다른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더불어 아이를 지도하는 데 여러 가지 방향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는 아이가 없지만 무럭무럭 크고 있는 조카네에 이 책을 한 권 사서 주고 왔습니다. 조카가 학교를 들어가서도 행복하게 커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학창 시절에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고 앞으로 다가올 지난한 인생에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하시모토 선생의 수업은 ‘다면적으로 보는 눈’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입시 공부는 기억력 하나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주입식 학습만으로는 꾸려갈 수 없다. 관찰력, 판단력, 추리력, 종합력이 한데 어우러져야 효과를 발휘한다. 그 토대가 되는 것이 국어 실력이다. 국어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른 교과를 이해하는 힘도 크게 달라진다. 수학이든 물리든 발을 깊이 들여놓고 주제의 핵심에 다가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힘이 바로 ‘학력의 토대’이며 국어 실력이다. 국어 실력은 ‘살아가는 힘’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면 무엇보다 국어 과목이 중요하다.

단어 속에는 넓은 공간이 있다. 단어 하나를 철저하게 이해하면 역사, 문화, 사회, 전통 등 다방면에서 지식의 폭이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다. 속독으로는 습득할 수 없는 그 폭을 여유 있게 즐기는 것이 좋다. 에티 선생의 수업은 단어가 지닌 무한한 공간을 즐기면서 교재에 얽매이지 않고 호기심의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한다. ‘은수저 노트’가 학생들에게 길라잡이가 되어 주었다. 학생들은 정답이 있는 교재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트에 스스로 찾아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자유롭게 써 넣고, 그것을 다 같이 발표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생각을 넓고 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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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 장석주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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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과 영화제작자 동성 커플의 첫 결혼소송에관한 뉴스를 봤다. 두 손을 맞잡고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두 사람. 얼마전에는 수많은 하객을 불러 공개적인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렸다고 한다. 동성애자들의 정치적인 힘이 동성결혼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에 충분할까에대한 나의 우려와는 반대로 이들은 공개된 장소에서 당당하였다. 굳이 외국과 비교하지 않아도 인권에대한 배려가 척박한 우리나라에서 이 결혼식 장면은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장석주 시인의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는 읽기시작하자마자 첫 페이지부터 나의 관심을 끈다. 사진학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사진에관해 여러 글을 썼던 발터 벤야민이나 롤랑 바르트에 관한 글을 보고 반가웠기 때문이다. 특히 사진이란 무엇인가에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은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였다. 1977 10월에 돌아가신 롤랑 바르트의 어머니를 계기로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 한장을 들여다보고 애도하는 과정에서 쓴 책이 <카메라 루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쓰기까지 어머니의 애도하고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하며 적은 메모가  <애도일기>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동성커플의 결혼소송 소식을 보고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롤랑 바르트를 떠올렸다. 롤랑 바르트 역시 동성연애자였기 때문이다. 호모, 호모섹슈얼, 게이, 레즈비언등으로 불리는 이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궁금증을 학창시절에 품곤했다. 플라톤의 <향연>에보면 그가 살았던 시대에 벌어진 향연에 노예와 여자는 참석할 수 없고, 젊은 미소년들만이 참석하여 시중을 들곤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울러 동성애자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화에 따르면 원래 인간은 머리 둘, 팔 넷, 다리 넷인 두 사람이 붙어있는 형태로서, 남자 둘, 여자 둘, 남녀 둘 이렇게 세 부류의 인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사이가 좋은 것을 신들이 질투를 하고 급기야는 이 둘을 번개로 갈라놓아 버렸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결국 사람은 이후 이 세 부류의 인간들로부터 분리가 되어 살아가야했고, 따라서 남자는 여자 혹은 다른 남자를, 여자는 남자 혹은 다른 여자를 그리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조금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이 살던 시대에 동성애자들이 상당히 많은 비율로 존재하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 남자 둘, 여자 둘, 혹은 남녀 둘이 붙어있는 세 형태의 인간이 신의 질투로 분리가 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자들의 비율이 애초부터 상당히 많은 비율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애도일기>를 보면 짧은 메모형식의 일기들이 근 2년간 지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의 사진 한장을 시작으로 사진을 바라보고 때론 분석하면서 현대 사진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론들을 <카메라 루시다>에서 언급하게된다. <애도일기> <카메라 루시다>에는 전혀 언급되어있지는 않으나 롤랑 바르트의 성적 정체성에관해서는 다른 문헌들을 통해서 조금은 알 수 있다. 내가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은, 아무리 차이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프랑스(특히 성해방, 인권에대한 담론이 거세게 촉발되던 68혁명 이후의)라고 하더라도 1970년대에 한 유명 지식인의 성정체성에 관해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란 점이다.

동성연애자들이 성장하면서 성정체성을 깨닫게되고 타인의 폭력적인 시선과 공격적인 언행, 경멸의 태도로부터 느꼈을 숟한 모멸감을 나는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롤랑 바르트역시 당대의 지성인이기는 하지만 시대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공적인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보다 만나게 된 책이 김찬호의 <모멸감>이란 책이다. 이 책은 굴욕과 존엄의 감정 사회학이란 부제가 명시하듯,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마음 풍경을 모멸감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보고 있다. 저자는 모멸감을 모욕경멸이 포함된 것으로 풀이한다. 모욕은 공격적인 언행을 주로 뜻하고, 경멸은 타인을 낯추어보는 태도를 지시한다. 다시말해 모멸감은 타인의 말과 행동과 그 근저를 이루를 태도로부터 우리가 받는 감정을 의미한다.

신라시대 이후 외국인의 왕래가 잦고, 수많은 외국인이 귀화한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었던 역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학창시절 단일민족으로의 자부심을 교육받아왔다. 특히 외국인 거주자수가 150만명을 훌쩍 넘고 외국인과의 결혼이 전체 결혼의 10%가 넘는다는 통계까지 나오는 이 시점에서 차이와 다름은 우리가 시시각각 만나게되는 주제가 되었다.

다문화 가정이든 동성애자들이든 기존의 주류와는 다른 이들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한국 사회에서 느꼈을 모멸감, 다시말해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지 못하고 생명이 억눌리는 경험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의 의도와는 달리 무심코 한 언행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모멸감을 주었을지를 반성해보았다. 책을 읽으며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했는데, 이는 저자의 말에 단순히 공감을해서가 아니라 학창시절 내가 받았던 모욕적인 말과, 나의 오랜 컴플렉스등을 다시 기억속에서 불러내어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인간의 감정이란 것에 대해 어느 인디언 부족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인디언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그가 느끼는 바를 말했다.

얘야, 마치 내 가슴속에서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는 것 같구나. 한 마리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고, 화가 나 있고, 폭력적인 놈이고, 다른 한 마리는 사랑과 동정의 마음을 갖고 있단다.

손자가 물었다, 어떤 늑대가 할아버지 가슴속에서 이기게 될까요?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지.”’

감정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서 독립적으로 자라나는 생명체 같은 존재로서 어느 감정에 더 많이 머무르고 먹이를 주는가에따라 그 감정에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감정은 내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우리가 느끼는 모멸감이란 감정을 극복하기위해 사회의 구조적, 문화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저자가 제시한 개인으로서의 해결책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본다. 저자는 개인의 내면적인 힘을 길러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타인의로부터 비롯되는 폭력적인 시선이나 태도, 언행은 우리가 강한 자존감으로 내면의 힘을 길러두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를 나의 경계만들기라고 언젠가부터 부르고 있다. 경계는 나 자신의 자존을 지키기위한 최소한의 ()을 말한다. 압축성장을 통해 개인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낮추고 희생해온 한국인들은 서양사람보다 이 경계선의 존재가 아주 미미하다는 것이 나의 관찰이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나의 역할과 위치에서 지켜지는 선을 누군가 침범했을 때, 나는 반응하게된다. 나를 지키기위해 때로는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나의 불편한 감정을 꺼내어 얘기하고, 때론 분노하게된다. 상대방도 나를 존중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동성 커플의 결혼 소송에 관한 뉴스나 성정체성으로 고통받았을 롤랑 바르트, 그리고 모멸감이란 키워드로 본 한국 사회와 나의 경험을통해, 나는 인간으로서의 숙명을 실감한다. 부대끼는 사회로부터 홀로 살수는 없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하는 한 인간으로서 결국 타인에대한 배려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주는 일이다. 상대방의 존재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이유를 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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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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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정을 버리고도, 회사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이 말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박민규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 하던 독백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가장들은 가정을 버리면, 회사에서 살아남는다라는 구호아래 열심히 일했다.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하나로 오랜 시간동안 공부하고 좋은 대학을 진학하여 나라의 훌륭한 일군이 되는 것이 마치 신성한 의무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들은 가정보다 회사가 더 우선이었으며 평생 회사에 충성하여 가정을 지탱하고, 아이들을 교육시켜 대학까지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의무였다. 하지만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그 이전의 사회와 질적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회사에 모든 것을 걸고 일만했던 가장들은 가정으로부터 이미 소외되어가고 있었고, 가족은 점점 더 낯선 사람들로 변해갔다.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가장들은 결국 사회에서, 가정에서 버림받은 존재로 느껴졌을 것이다. <시간의 향기>를 읽으며 생각나는 소설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었다. 소설에서 일류대를 나와 열심히 일해온 주인공은 외환위기로 회사로부터 정리해고 당하고, 곧이어 부인과 이혼하게 된다. 실직 후 온 몸으로 시간을 인식하게된 주인공이 프로로서의 삶의 본질을 독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시간의 향기>는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근대에서 후근대로 이행되는 과정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산업사회 이후 생산성과 효율의 극대화가 절대화되면서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었다. 근대의 전형적 현상인 가속화로 인해 역사는 종언을 맞았고 의미를 상실했다는 보드리야르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앞에서 언급한 소설과 현재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충분히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사람의 손으로 혹은 손에 쥐는 도구로 일주일동안 하던 일을, 이제는 한 시간 이내에 도구 혹은 장비를 이용하여 끝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여가시간이 고차원적인 활동에 쓰인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인간의 한가로움을 위해 쓰이지도 않았다. 사색적인 안식과는 무관하게 그 단축한 여가시간은 끊임없이 다음 일을 위해 쓰여지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여가시간이란 다음에 하게될 미션을 위해 필요한 육체적인 원기 회복의 시간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사색적 삶을 위한 한가로움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그 결과 조급성의 사회가 만들어버린 향기없는 삶이 우리에게는 고향이자 자연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급기야는 우리 존재에대한 망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하이데거는 전반적인 조급함의 원인을 정적, 긴 것, 느린 것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찾았다. 우리가 만성적인 시간부족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나타나는 징후는 곧 권태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깊은 권태로서의 징후. 깊은 권태는 총체적인 의미의 공허로 경험되며 이는 시간의 공허에서 비롯된다.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해 소속으로부터 이탈한 경우, 많은 이들은 새롭게 주어진 시간에 머무름의 능력을 상실하여 권태에 빠지고, 불안해하고 심지어는 우울증과 자살에도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느긋함을 즐기고 시간의 향기를 지각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과도하게 고양된 주체성이야말로 깊은 권태가 생겨난 주원인이다. 더 많은 자기 생각보다 더 많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은 행동보다 더 많은 머무름이 권태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라고 말하고있다. 아울러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활동적 삶을 비판하고 있다. 아렌트의 활동적 삶에는 혁명적 행동에 그 무게를 두는 삶으로 진정한 머무름, 사색적 삶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머무름의 모습은 앞서 언급한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결성한 주인공은 대기업 야구동호회 회원들과 야구시합을 하게된다. 이 경기에서 이 팬클럽 회원들이 보이는 행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스포츠맨쉽을 가진 이들은 아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억지로 잡지 않는다가 이들의 모토이며, 경기 중 팬클럽 회원 하나는 공을 잡으러 가다 주저앉아 무언가를 보기 시작한다. 공을 잡으러 풀밭으러 갔다가 들꽃이 예뻐서 멈추고 꽃을 보고 있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이 팬클럽의 회원들은 바로 시간의 주체로서 시간의 향기를 듬뿍 맡을 줄 아는 이들이었다.       

  저자는 극단적으로 고립되고 원자화된 시간을 사는 우리들이 조급성의 사회로부터 우리자신을 찾는 길은 사색적 삶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근대의 행진과 같이 목적지향적인 걸음걸이가 아니라 산책유랑과 같은 무목적의 걸음걸이로 머물고 사색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사색적 삶은 사실 저자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의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한 모양이다. 키케로의 말로 마무리를 하며 사색하는 삶, 머무르는 삶을 다시 생각해본다.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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