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모비딕》(44장-50장, 325-373)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오늘 읽은 부분의 주요 사건은 피쿼드호가 처음 향유고래떼를 만나 첫 추격하는 장면이다. 이 첫 번째 추격에서 에이해브 선장은 직접 고래추격용 보트의 키를 잡는데, 이 배에 독자들 뿐만 아니라 피쿼드호의 선원들까지 처음 보는 이교도들 5명이 등장한다. 오늘 읽은 범위에서는 크게 세 가지 사항에 주목해봤다. 하나는 페달라라고 하는 이교도 노인과 그 일당들이 등장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향유고래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증거,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적짜기와 인간의 삶 사이의 유비에 관한 사항이었다.
향유고래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
《모비딕》 에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 실화가 있다. 바로 낸터킷의 포경선 에식스호의 난파사건이다. 이 사건은 성난 향유고래의 공격을 받은 에식스호가 침몰한 사건이었는데, 향유고래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소설 속 이슈미얼의 독백처럼 망망대해에서 향유고래와 대면해본 적 없는 육지의 사람들은 향유고래가 포경선의 바닥에 구멍을 내거나 추격용 보트를 날려버린다는 말을 쉽게 믿지 못했을 것이다. 멜빌은 자신이 직접 겪은 사례와 들은 이야기를 수집하여 소설 속에서 향유고래의 힘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이 후대에 회자되었던 이유는 고래의 습격을 받아 침몰했다는 것보다 살아남은 승무원들이 세 대의 보트에 나눠 타고 수 개월을 바다에서 떠돌다가 발견되었을 때, 카니발리즘의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존한 승무원들은 죽은 동료를 먹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비딕》 에서 이슈미얼이 계속 언급하는 오언 체이스라는 인물은 바로 에식스호의 일등항해사였고, 그런 과정을 통해 살아남아 이를 기록으로 남겼기에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모비딕》 의 탄생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 것 뿐만 아니라 내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때 함께 생각해볼만한 사례인 것 같다.
“세상에!
체이스 씨,
무슨 일이죠?” 나는 대답했다.
“고래가 배에 구멍을 냈어요.”
- 태평양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의 공격을 받고 결국 파괴된 낸터킷의 포경선 에식스호 난파기 (1821, 뉴욕), 에식스호 일등항해사 오언 체이스 (27면, 발췌문)
“그 요점이란 이것이다. 즉 향유고래는 경우에 따라 고의로 큰 배에 구멍을 내고 완전히 파괴해서 침몰시킬 수 있을 만한 충분한 힘과 기민하고 신중한 악의를 지니고 있으며,
게다가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는 것.” (336면)
베일에 가려진 인물, 페달라
인디언 혈통의 타시테고가 돛대 위에서 처음 향유고래를 발견하고 외치자마자 ‘거무스름한 다섯 유령’이 등장한다. 이들은 배의 후미에 있던 선장의 보트를 타게 되는데, 에이해브 선장은 이 무리의 우두머리를 ‘페달라’라고 불렀다. 소설에서는 그와 동료들을 ‘마닐라 원주민 특유의 선명하고 호랑이처럼 누란 안색’을 띤 이교도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페달라는 머리에 ‘흰 터번’을 두르고 있었다. 앞서 이슈미얼이 ‘흰 색’에 대한 심리적 상징을 한참 이야기하고 난 후라서 그런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흰 색에 민감해진다. 이슈미얼은 ‘백마’와 ‘앨버트로스’의 흰 색에 대해 이야기한 대목이 있었는데, ‘백마’가 용감한 인디언들에게 ‘전율이 일게 하는 숭배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면 ‘앨버트로스’는 보다 ‘불길한 두려움’에 더 가까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향유고래가 발견되자마자 나타난 이 유령같은 이들은 ‘신성과 경외’의 느낌을 주는 ‘백마’보다는 ‘불길한 공포’를 시사하는 앨버트로스의 이미지에 보다 부합하는 것 같다.
“앨버트로스를 생각해보라. 그 흰 유령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구름 속을 항해하듯 날아다니는데,
그처럼 영적인 경이와 창백한 공포를 품은 구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313면)
피쿼드호가 처음 향유고래와 조우한 장면에서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사실은 추격용 보트를 따라오던 본선이 스타벅-퀴퀘그-이슈미얼이 타고 있던 보트를 반동강 냈으니 손해를 본 셈이다. 하지만 이 첫 번째 추격은 또 소설의 또 다른 전환점을 보여준다. 바로 페달라라는 인물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키는 구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트에 처음 승선한 이슈미얼은 자신이 하는 일이 ‘죽음’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이슈미얼은 이 사건을 계기로 유언장을 쓰기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죽고도 살아남았다”(369면)는 그의 독백은 꽤 인상적인 울림을 준다.
다시 페달라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들 다섯 명의 이교도들은 각각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페달라’라는 이름으로 한 덩어리가 된다. 베일에 가려졌던 이들의 존재는 에이해브가 피쿼드호를 맡아 출항하게된 가장 내밀한 목적을 대변한다. 이들은 바로 한 쪽 다리를 앗아가고 자신의 존재를 밟아버린 ‘모비 딕’을 쫓기 위해 고용된 용병들인 것이다. 이슈메일은 하얀 앨버트로스로부터 ‘불길함의 백색 공포’를 느끼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고래에 대한 복수의 강박으로 가득찬 에이해브 선장만을 내세우는 것보다, ‘영혼과 지능’을 지닌 모비 딕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신비에 둘러싸인 페달라 일행을 멜빌이 설정해둔 것에 주목해본다. 페달라로 대변되는 일행의 존재는 바로 흰 색의 거대한 절대악과 대적하는 인간의 무리로 균형을 주고있는 것은 아닐까.
거적짜기와 인간의 운명에 대해
고래가 나타나기 전, 이슈미얼은 부지런히 거적짜는 일을 하는 퀴퀘그의 일을 돕는다. 퀴퀘그가 참나무 막대기를 실 사이로 끼워넣고, 이슈미얼은 손으로 날실 사이로 씨실을 넣고 빼는 일을 돕는 장면이 나온다. 백인인 이슈미얼이 거적의 주재료가 되는 실을 끼워 넣는다면, ‘날실과 씨실의 형태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이 야만인의 막대기’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에서 이슈미얼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숙명과 자유의지, 우연’의 요소에 대해 멋진 비유를 거적짜기라는 반복 행위로부터 뽑아낸다. 이쯤되면 이슈메일은 피쿼드호라는 바다 위의 절에서 명상을 하는 수도승같이 느껴진다.
“그래,
우연, 자유의지, 숙명 – 이것들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가 하나로 엮인 채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항로에서 벗어날 일 없는 숙명의 곧은 날실,
그것이 다른 실과 교차할 때 일어나는 모든 진동은 사실 그 작용을 돕고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는 여전히 주어진 실 사이로 자신의 북을 자유로이 움직여대고 있다.
그리고 우연은 그 행동반경이 숙명의 직선 내로 제한되고 옆으로의 움직임은 자유의지의 명령에 따르지만, 이처럼 그 둘의 지시를 받을 지라도 우연 또한 차례로 숙명과 자유의지를 지배하며 결과에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는 역할을 한다.” (349면)
숙명에서 자유의지, 그리고 우연으로 이어지는 요소는 멜빌이 파악하고 있는 인생사의 원리인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운 것은 이슈미얼이 언급하는 ‘숙명과 자유의지’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영향 아래에서 이해가 되지만, ‘우연’은 이와 다른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세계관과는 분명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이슈미얼이 묘사하는 ‘거적짜기’에서도 이런 ‘우연’의 요소는 이교도인 퀴퀘그에 의해 개입되고 있다. 이슈미얼이 실을 반복하여 넣었다 뺐다 반복하는 동안, 퀴퀘그의 무심한 막대기는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다르게’ 씨실을 때려 거적의 완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 불가해한 이유는 신이 이미 정해 놓은 숙명이란 요소에 더하여 수많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굴절되고, 여기에 자연에 존재하는 우연이 합쳐져 혼돈의 세계를 이루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멜빌은 우리의 인생사가 거적짜기 행위에서 퀴퀘그의 개입이 보여주었듯이 기독교적 세계관(숙명과 자유의지)에 이교도적 세계관(우연)이 함께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