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모비딕》
(84장-101장, 568-684p)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이제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 있지만, 오늘 읽은
부분까지도 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멜빌은 역시나 향유고래의 다양한 면모에 천착하고 있고, 고래를 잡은
후 일련의 해체작업 이후
기름을 얻는 작업, 그리고 포경업의 역사와 관련한 부분
등을 ‘탐사보도’하듯 파헤치고 있다. 오늘은 읽은
범위가 제법 되기
때문에, 나의
흥미를 붙드는 대상을 네
가지로 추려서 생각해보았다.
[1] 소설 속에 작가가 개입하는 순간
멜빌은 고래가 내뿜는 ‘물기둥’에
대해서도 한 장(章)을
할애하고 있다. 이슈미얼이 거대한 고래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수증기와 물기둥을 흩뿌려왔으며,
고래들이 내뿜는 이
물기둥이 정말 물기둥인지 아니면 수증기인지에 주목하고 있다.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이슈미얼이 ‘이 축복의 순간’이라는 표현과 함께
구체적인 시간정보를 쓰고
있다. “1850년 12월 16일 오후1시 15분 15초”(573면) 《모비딕》이 워낙
특이한 소설이다보니, 멜빌의 시대에 이
책을 읽어본 독자들에겐 너무나 낯설고 생소한 소설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1850년 초여름부터 집필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같은 해
12월
16일
오후에 멜빌은 향유고래의 물기둥에 대해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망망대해에서 인물들이 바다
및 고래와 싸우는 상황
속에 느닷없이 자신의 존재를 소설에 개입시키는 것이다. 이 부분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마치
이슈미얼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잠시
방심한 사이 멜빌의 목소리가 나온
것처럼 말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비록
소설이 아닌 기행문이지만 연암
박지원 선생이 《열하일기》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연암
일행이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황제가 여름을 나고
있는 베이징 북쪽의 열하지역으로 다시
급히 이동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이동경로에 만리장성을 통과해야했는데,
고북구 지역의 장성에 하루
묵을 때 연암은 장성의 벽
어딘가에 마시고 남은
술에 먹을 갈아
다음과 같이 낙서를 하는
것이다.
“건륭45년(1780) 경자년 8월 7일 밤 삼경, 조선의 박지원 여기를 지나가다.”
(《열하일기》제2권, 496면, 김혈조 옮김, 돌베개 )
여행기에서는 연암이 한밤중에 고북구라는 옛
전쟁터를 지나며 느낀
감회를 낙서로 남겨두고 이를
기록해 두었다. 이
여행기는 줄곧 연암의 자의식이 잘
드러나는 기록이긴 하지만, 저자 자신이 역사의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후대의 독자에게 전달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멜빌의 시도와 연암의 행위가 비슷한 결로
내게 다가왔다. 참고로 올
새해가 연암이 고북구에서 낙서를 했던
‘경자년’과 같고, 240년이 지난
해이므로 연암 이후
경자년은 4번째
반복되는 해이기도 하다. 아무튼 멜빌의 《모비딕》이든 연암의 《열하일기》이든, 나는
이 부분을 좋아한다. 저자가 글을
쓰는 이 순간을 기록한 흔적이며, 후대의 독자인 나와
만나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2] 경계인의 시각
지금까지 여러
번 멜빌이 소설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경계인의 시각을 언급했다. 내가 생각하는 ‘경계인의 시각’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표면과 이면을 두루두루 바라보고, 세상의 기준에 따르기에 앞서
자신이 판단한 결정에 따르는 태도
내지는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연암 박지원 선생의 경우와 매우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관점에 대해
직접 서술한 듯한
부분이 보인다는 점이다.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천상의 어떤 것에 대한 직관, 이 둘을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게 되며, 그러한 사람은 양쪽 모두를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579면)
인간 허먼
멜빌이 경계인의 시각을 갖게
된 정황은 스코틀랜드계 아버지(아마도 카톨릭 집안)와 네덜란드 칼뱅파 집안이었던 어머니가 이룬
가정환경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인용한 부분은 멜빌이 비록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인물이긴 하지만 오히려 무신론자에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표현이다. 중요한 점은
멜빌이 세상사에 대해
‘공정한 시선’을 갖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앞의 독서에서 반복하여 언급했듯이 소설
전반을 통해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는 이런
부분들을 통해 이슈미얼에게 말을
걸고 있는 소설
이면의 멜빌을 느낄
수 있었다.
[3] 가련한 조난자, 핍
소설에서 피쿼드호는 여러
차례 다양한 국적의 포경선과 사교적인 만남을 갖는
장면이 나온다. 프랑스 국적의 포경선과 마주친 후
‘피쿼드 호의 선원 중 가장 대수롭지 않은 사내에게 가장 대수로운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고래사냥에 큰
역할을 하지 않는
흑인 소년 ‘핍’이라는 인물이다. 앨라배마 출신의 핍이
어린 나이에 피쿼드호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소설에서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데, 명민하지만 겁이
많은 핍은 고래사냥 과정에서 작살이 연결된 줄이
목에 감겨 바다에 빠진
상황에서 고래를 따라
끌려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핍은
미쳐버리게 된다. 멜빌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이 인물에 한
장을 마련하여 조명했다.
“불운한 찐방이 천성적으로 둔하고 맹한 머리를 지닌 반면, 핍은 마음이 너무 여리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명민했고, 그의 종족 특유의 유쾌하고 따스하고 명랑한 총기를 지니고 있었다.”(633면)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핍과 짝을 이루는 사환
‘찐빵’의 존재다. 찐빵은 백인이며, 흑인 핍과
달리 우둔한 인물로 등장한다. 백인인 멜빌의 시선에서는 찐빵이 보다
명민하고 유쾌한 성격을 지니고, 핍이 우울하거나 둔한
머리를 지닌 인물로 묘사했을 법하다. 물론 ‘비틀기의 대가’ 멜빌은 현실
세계의 질서를 소설에서는 뒤바꾸어 버린다. 소설에서는 백인을 낮추고 유색인종, 이교도를 높인다. 물론 멜빌의 이러한 관점은 앞서
언급한 ‘경계인의 시각’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운
현실을 소설 속에서나마 대등하게 놓고
보려는, 다시
말해 균형감각을 갖추고 소설에서 이를
구현하려 했던 인물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종족(흑인)은 그 어느 인종보다도 멋지고 자유롭게 모든 휴일과 축제를 즐긴다.” (633면)
“내가 이 검둥이 소년 또한 환히 빛났다고 쓰더라도 웃지 마시라. 흑색도 나름의 광채를 지니기 때문이다. ” (633면)
같은 장에서 멜빌이 이렇게 쓴
부분에서 보아도 멜빌이 흑인들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혹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고자 했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4] 영원회귀의 구조
소설을 읽으며 흥미롭게 느껴지는 한
가지는 멜빌이 소설에다 이교도적인 개념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교도적이라함은 기독교의 흔적이 아닌
인류의 모든 종교를 대상으로 한다. 여기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믿었던 윤회관도 포함된다. 인간의 윤회와 영혼의 부활을 믿었던 피타고라스도 언급할만큼 이교도적인 면모가 풍부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삶과
일상이든, 자연을 대상으로 하든, 소설에는 이러한 반복과 순환의 구조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오오! 친구들이여, 이것이 사람잡는 일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런게 인생이다. 우리 인간들은 오랜 노역을 통해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고래 몸뚱이에서 적지만 귀한 경뇌유를 뽑아낸 후, 피곤한 와중에도 인내심을 발휘해 더러운 몸을 싯어내고 영혼의 임시 거처인 이 깨끗한 육신에서 살아가는 법을 깨닫자마자, 별안간 들려오는 ‘고래가 물을 뿜는다’라는 소리에 그만 넋을 잃은 채 또다른 세계와 싸움을 벌이러 출항해야 하고, 젊은 시절과 똑같은 일상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65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