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한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날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것’,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이 책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는 저자가 7년 간 써내려 간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이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된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내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말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면)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한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전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수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볼 때,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한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그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면)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내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99면)
평생 수집을 하면서도 중년이 된 저자가 자신의 중년기 7년 간 써내려간 이 독창적인 기록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서 소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차원과 비개인적인 차원에서 수집행위를 다름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수집은 사랑과 그 사랑의 상실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수집은 자기 가치와 자기 혐오에 대해 말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서투름에 대해 말해준다. 비개인적 수준에서는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풍요과 과도함에 대해 말해준다.”(215면)
결국 솔직하게 개인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보고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저자의 수집행위는 우표수집으로 시작했지만, 어릴 때 어머니가 애써 모은 우표들을 동생과 함께 못쓰게 만든 후 중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쇠붙이를 주워오거나 자신이 소비한 식표품의 라벨을 수집하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개인의 저항적인 의미로서도 그 의미를 확장해서 볼 수 있을것 같다. 이 부분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무한긍정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이 표출할 수 있는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절차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버전으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소비하듯 우리를 소비하는 이 걸신들린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수집이다. 우리는 가치를 지배함으로써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다.”(26면)
바로 이 ‘우리를 소비하는 이 걸신들린 세계’는 뼈속까지 내면화된 물신화, 상품소비주의적인 우리의 무비판적인 삶에 대해 우리는 ‘No’라고 말할 수 있는 ‘부정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내가 판단한 이유이다. 한 개인이라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저자의 수집을 통한 ‘저항행위’는 다음에서 엿볼 수 있다.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316면)
저자에게 ‘수집’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때로는 저자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행위이지만 저자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의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집의 의미를 성찰한다.
【수집광의 수상록 – 몽테뉴적 자기 성찰】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500여년 전의 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인데, 이 책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이 책에서는 ‘수집’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점이 좀더 다른 부분일 수는 있겠다. 몽테뉴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의 신분과 법관, 보르도 시의 시장을 지낸 배경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저자 윌리엄 교수도 역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기는 서슴지 않는다.
“사실 때로는 그 사전 삽화 컬렉션이 나 자신보다 더 가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나는 그 컬렉션을 질투한다. (…) 나는 종종 나 자신이 중년의 비평가로서, 또 망설이는 사람으로서, 망가진 채로 남겨진 그 어휘 사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283면)
‘물러남의 대가’라고 몽테뉴를 표현한 어느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본 기억이 난다. 이 물러남은 아마도 몽테뉴의 ‘소심함’을 드러내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로서 자신과 ‘거리두기’에 대가라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멀찌감치 두고 들여다보는 사람을 의미할 터이다. 혼란과 비극의 시대 한 가운데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 경도되어 살아가지 않았던 몽테뉴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상당히 메말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몽테뉴의 인간 관계는 사심을 초월한 보다 독립적인 한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윌리엄 교수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내가 품는 의혹은 (…) 수집이라는 것도 대부분 관계를 맺기 보다는 관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면)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수집물(또는 행위)이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있다. 연극무용과 교수답게 저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한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내 분노와 욕망이, 그리고 내 정체성의 탐구가 내 물건들 사이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내 드라마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한다. 그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nagnorisis라고 불렀던 것으로, ‘다시 알기’ 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알기’를 뜻하며, 비극 형식의 본질 중 하나다.”(314면)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절정은 바로 시리얼 상자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두 딸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1579개의 시리얼 상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학과의 강당으로 가지고가서 바닥에 초대형 퀼트처럼 펼쳐놓았다. 자신의 집 창고에 모아 두었던 종이상자들을 펼쳐 배열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서 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예술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세상에 노출되어 연결됨으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1500여개의 종이 상자들은 윌리엄 교수와 두 딸이 먹어치운 시리얼 상자였다. 한 가족이 거부할 수 없는 물질사회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이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1차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는 대상물인 셈이었다. 곧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남긴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윌리엄 교수도 무가치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어떤 유의미한 특징을 이미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기’라는 과정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곧 모든 시작에는 그 끝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남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고나면 자신의 컬렉션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궁금해하고 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반추하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 자신의 수집물들에 대한 행방을 역시 고민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어떤 존재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로 그 어던 인간 존재도 뭔가를 진정으로 소유할 수 없는데, 죽음이 소유를 휩쓸어가기 때문이다.”(361면)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수집품이 유용한 물건들이 아님을 잘 알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임도 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수집물들이 스미소니언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TV프로그램 소품으로나 쓰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두 딸들 역시 아버지의 수집물들을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목이 흥미롭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를 떠올린다면 그 결정은 언제든 바뀔 수 있겠으나, 저자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단순히 덧붙이고 있다.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내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내 아이들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336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낼 줄 아는 능력은 개인의 세계관과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번성기는 바로 마지막 날, 나머지 모든 것의 날이다. 창조에 뒤따르는 휴식은 뭔가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이고, 그것은 곧 죽음의 리허설이다. 그 휴식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알고 느끼는 방식이다.”(350면)
“수집은 소유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90면)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수집품들은 자신의 일부이자 인생의 축약품으로서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속성으로서의 바램과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이도 무가치해보이는 사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그 주인에 의해 끊임없이 분류가 되고 정리되고 하면서 그 수집물의 전체는 낱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수집가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본능으로서 연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저자의 자기 성찰 과정을 상기해보면 몽테뉴의 자기 탐험과 성찰 행위와 매우 유사함을 깨닫는다. 세계에 저항하고 독립된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서 저자의 수집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거울과 창문과 같은 수단으로서의 수집행위】
글의 초입에 언급했던 수집이 저자에게 갖는 의미로 다시 돌아가본다. 저자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수집’은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거울’의 기능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외부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의 경우처럼 평생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수집물이 주는 역할은 예술활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자기 성찰’의 수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이 시에서처럼 내가 예술을 나 자신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용한 경우는 드물었다.”(146면)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이라는 수단은 곧 ‘자아의 확장’ 수준으로 이어졌다.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그 컬렉션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208면)
“내 컬렉션은 중년이 된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것이다.”(209면)
“나는 내 메타포들을 수집한다.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나 자신의 비유적 형상을 그려낸다.”(238면)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할 뿐인 한 권의 책. 그 책(사전삽화 컬렉션 북)은 표현하지 않는 내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281면)
이처럼 여러군데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수집’이라는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한 인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해볼 때, 윌리엄 교수가 말하는 수집이란, 곧 이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물을 지속적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행위가 평생 지속된다.
누구나 수집행위는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실례로 무형이기는 하지만 우리 손 안의 모바일 기기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를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물들을 폴더에 소유한다. 윌리엄 교수의 수집물처럼 낱개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수 없다. 반면 이러한 수집물들이 평생동안 모이고, 분류되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특징을 띠게 되면 그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의 매일 찍은 사진들이 어느 날 사용자에 의해 분류되고, 재배열되고 관리된다면 그 사진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진들 중 어떤 특정 주제하에 ‘선별된’ 사진들은 더욱 주인의 의도를 반영하는 자아의 확장 버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집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은 ‘자아의 표출 도구이자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집행위 및 그 과정은 곧 수집가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 발견 수단 및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책장을 잘 들여다보면 책의 목록을 통해 그 수집가의 욕구와 욕망을 상당히 읽어낼 수 있다. 이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이 사람의 열등감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인지하고 있을까 하는 점들도 그러하다.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이는 영어 관련 책이 많을 수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독 그 부분에 대한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 이런 수집의 양상은 보다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반면 윌리엄 교수의 수집 형태는 상당히 무의식적인 자기 표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에는 저자의 누나와의 관계(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로부터 받은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집’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수집’행위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모은 1570여개의 시리얼 종이상자, 800개가 넘는 우편봉투 속지 컬렉션, 6000장이 넘는 명함 등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저자의 무의식이 투영된 어떤 실체, 저자의 분신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다 버리고, 정리하여 간단하게 살라고 하는 책/운동이 활발히 눈에 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윌리엄 교수와 같은 수집광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이들이 간소하게 살라고하는 ‘유행’에 동조하는 가운데, 저자처럼 ‘싫다’라고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부정성’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많은 것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살을 빼는 것은 이중의 박탈처럼 보일 수 있다.”(26면)
누구나 여행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여행은 반드시 해야하고,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반면 ‘나는 여행이 싫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이 좋다’라는 점은 수긍을 하면서도 다수의 집단적인 견해 앞에서 자신의 ‘부정’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수집행위는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다.
내가 윌리엄 교수처럼 상당한 수집품을 소유했다면, 나는 이 거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나는 모든 것에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는 진리에 따른 것같기도 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왜나하면 나 자신도 윌리엄 교수처럼 ‘집요함과 애착, 물건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갖는다는’ 게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과도 같이 정성들여 완성한 자신의 모래 그림들을 한 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처럼 내 컬렉션도 내 임종 전에 소각장에서 모든 컬렉션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멸과 함께 나의 정체성의 연장이었던 컬렉션도 무(nothing) 속으로 사라진다는 행위로서 말이다.
이 책은 수집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불완전한 존재를 자각하는 자화상을 그린 결과물이다. 아울러 유별난 한 개인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뒤집어 볼 수 있게 해주기도 하며, 우리 자신에게 삶의 실체를 자각하게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