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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Becoming a Mountain: Himalyan Journeys in Search
of the Sacred and the Sublime)
스티븐 얼터(Stephen Alter) 지음 | 허형은 옮김
| 책세상
(걷기의 철학)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육체적,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저자 스티븐 얼터는 어느 날 문득 산행을 결심한다. 히말라야 산 기슭에서 오래 살았고 산사나이들에 대해 잘 알지만 저자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 작가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사냥을 접고 대신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예순에 가까운 그가 집의 침입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후 서서히 회복한 후 산을 오르며 치유하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스티븐 얼터의 이 기나긴 히말라야 등산기가 나에게 특별히 와 닿은 이유는 나 자신도 ‘마음의 감기’라 불리는 우울증 경험해 본 적이 있어서이다. 나 자신이 산을 주로 오른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살기위해서’ 걸었더랬다. 집안에 콕 박혀서 나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지 않기 위해 나역시 밖으로 뛰쳐나가 걷고 또 걸었던 것이다. 저자가 산행에 동행한 라투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라고 쓴 대목을 읽을 땐 나 역시 스티븐 얼터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이고 걸었다고 하는 시인 랭보가 “나는 머릿속에 자리 잡은 유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만 했다.”(231면)라고 말한 부분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혼자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나의 걷기 경험은 이미 시인 랭보가 같은 이유로 무한히 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때, 역시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행을 했나’라는 말이 나올법하게 저자는 힘겨운 산행을 결심하고 강행한다. 그는 왜 그토록 심하게 상처를 입은 후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스물 두 살때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50대 중반이 되어 기나긴 산행을 기획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럴 때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을 한 후,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고 말한다. 히말라야 산 기슭에서 오래 살아온 스티븐에게 걷기란 도시인들의 걷기와는 또 다른 생활의 중심일 것 같다. 스티븐 얼터는 걷기를 “물활론자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자연에는 존재하는 신성(神聖), 정의하기 힘든 그 존재의 발자취를 인정하는 의식”(223면)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스티븐 얼터에게 히말라야 산행은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신성을 인지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티븐은 산행 과정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히말라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뿐 아니라 걷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숲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 철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로와 잘 닦인 길을 버리고 미답의 황무지를 찾아다니라’라고 말한 소로의 생각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명상 행위로서의 걷기를 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걷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 증진뿐만 아니라 명상의 한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우타마 붓다는 ‘방랑하라.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길’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수 없다.”(218면)라는 가우타마 붓다의 말은 과연 무슨뜻일까. 이 말은 저자의 기나긴 산행을 따라가며 줄곧 나에 숙제를 던져 준말이었다.
(만다라의 철학)
산행을 하며 걷기의 철학을 상당히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수도승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는 만다라에 얽힌 이야기도 새롭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불교 수도승들이 며칠 또는 몇 주에 걸쳐 완성하는 모래 만다라라는 완성된 직후,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린다고 한다. 이 황당한 행위 또한 만다라의 과정에 속하는 행위로서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러한 행위를 한 번 본 후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더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정신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한 만다라를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리는데, 이는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이다.”(318면)
(자연에 대한 신성함과 숭고함)
세속을 훌쩍 떠난 장소인 해발 5000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자연은 그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히말라야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신성과 얽혀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여러 인도의 신화 이야기에는 ‘변신’을 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형’신화는 히말라야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산을 타넘는 구름의 모습, 짙은 구름에 의해 가려진 산의 봉우리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누군들 그 자연의 모습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스티븐은 ‘숭고함’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감정적 현기증이다.”(356면)라고 표현해두었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책의 부제에도 밝혀 두었다. 곧 ‘신성함과 숭고함을 찾아나선 히말라야 산행’이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행을 통해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이 주는 경외감과 숭고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등반에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
스티븐은 결국 산행 과정에서 ‘불길’해보이는 꿈이 예언한 듯, 산이 도와주지 못해 산행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로 이렇게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남은 절반의 여정인 돌아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인다. 스티븐의 산행을 따라가며 그의 산행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 정복하려 한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산행을 통해 그는 좀더 산이 주는 가르침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저자 스스로에게 전하는 자신의 위안 한 대목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모든 것 –
육체적, 물질적 자원과 희망, 기대들 –
이 하등 무익한 모험에 낭비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옳은 결정들을 내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음을 앎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 곧, 패배를 받아들이되 우리 정신과 육체가 감당해야할 한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다.”(417면)
책을 덮으며 문득 스티븐의 히말라야 산행은 그 자체가 ‘만다라’ 수행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를 한 손에 쥐고 정성껏 모양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르는 산행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더 오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때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다라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할 순간임을 알게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전문 등반가들도 언제나 한 번의 시도로 산에 오른 사람은 없음을 스티븐이 만난 최고의 등반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오히려 그들은 전문 등반가가 되어갈 수록 산을 이해하고, 산 앞에 더욱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이 책 <친애하는 히말라야 씨>는 저자의 히말라야 정상 정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자의 실패한 산행 기록을 따라가며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너그러운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던 점이 더 좋았다. 저자가 지고 온 다른 저자의 산행기의 저자(브루스 채트윈)가 책에 남긴 말도 오래 인상에 남는다. 그 저자의 동행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동안 쉬어가야한다고 넉살좋게 주장하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또 산행 중 밤새 쉬지 않고 폭풍우를 겪은 아침, 해발 3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볼 수 있다는 브라만카말 수만송이를 발견했을 때 그 꽃밭의 절경 모습과 저자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자 스티븐 얼터 스스로의 치유과정이기도한
자신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산행을 취재하는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읽어나갔던 여정이었다. 그 여운을 좀더 남겨두기 위해 다소 교훈적인 느낌은 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기로 한다.
“이런 운명론적 해석은 제쳐두고 우리는 계단식 논밭이나 절, 돌와 댐을 얼마나 만이 건설하든 산은 항상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대신 연민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실체를 볼 수 없는 신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산에 접근해야 한다. 고지를 정복하고 식만화하는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영토를 땅 따먹기 하듯 차지하며 고산지대의 너그러운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는 산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큰 존재이자 인간에 비해 무한히 영속적인 그 존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8면) "우선, 내가 불굴의 존재라는 생각을 감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의 도전을 넘어 나는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69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발을 붙잡는 건 마음 속 공포였다."
(80면) "산과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타인이 쓴 책을 전부 덮어버리고 오직 바위와 얼음에 새겨진, 혹은 저 위쪽 숲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새겨져 있는 말들만 읽는 것이다."
(135면) "라투는 죽는 건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
(159면)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다."
-저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262면) "챙겨온 책 중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노랫길>을 읽는데, 동행한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쉬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356면) 숭고함에 대하여 "에드먼드 버크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인간이 자연의 가장 극적인 경이로움을 접하면서 경험하는 양면적인 반응을 ‘숭고함의 심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산의 절경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에서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목격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조는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자아낸다. 한마디로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정신적 현기증이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발밑으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보다 더 불안하고 더 향정신적인 은유의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원시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존재를 찾아 자꾸만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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