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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하정 지음 / 좋은여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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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하정 지음 | [좋은여름]

 



우연한 인연에서 재발견하는 나눔의 가치

 


나는 자타공인 집돌이. 물론 일단 집을 나와 어딘가에 가게 되면 호기심으로 이곳저곳을 탐방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이사하기를 끔찍하게 싫어하고 그저 한 곳에서 평생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도시에서, 그것도 집을 마련하느라 빚이 있는 사람에게는 한 장소에서 평생을 보내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평소에는 잘 읽지 않았던 에세이 몇 편을 읽다보니 무엇보다 사람들(저자들)이 살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집돌이의 대리만족인 것일까. 특히 저자가 자신의 글에서 소개하는 우연한 만남이 시간을 함께하는 인연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눈길이 간다. 무뚝뚝한 내가 낯선 곳에서 사람들을 마주할 때 내 생애에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법한 이야기들. 저자가 만난 인연과 만들어가는 이야기들이 신기하다.


에세이스트이면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또 출판사 대표이기도 한 하정 작가의 에세이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는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인연과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 이야기다. 여행에서 덴마크인 쥴리와 대화하게 되면서 서로를 친근하게 여기게 되고, 그 여성이 저자를 초대하면서 이 책의 모든 이야기가 비롯되었다. 저자는 쥴리의 집에 가서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이어서 그는 어머니이자 평생 금속세공을 했던 디자이너 아네뜨를 저자에게 소개한다. 우연한 만남과 스몰 토크로 시작된 순간은 타인이 나누어주는 삶의 이야기를 공유하기에 이른다.


저자가 소개하는 덴마크 가족의 집에서 먼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특징은 오랜 기억이 집안 곳곳에 묻어 있다는 점이다. 몇 대 조상부터 써오던 가구, 책상과 책꽂이, 식기류 등이 집 안에 가득하고, 물건 하나하나에는 추억이 있었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내가 덴마크에 가서 살게 되면 아무도 잔소리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특히나 가족의 역사가 담겨 있는 그런 소품들, 손때가 묻은 물건들은 쉽사리 정리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가족이 내게 말도 없이 그런 물건을 내다 버린다면 내겐 범죄행위나 다름없는 셈이다.


또 물건에 스며든 가족의 추억과 이야기는 가족의 의식으로서 끊임없이 생성된다. . 아네뜨 할머니의 아버지 어위(Aage)는 꽤 유명한 디자이너였다. 어위의 직업적인 정체성보다 더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가 어디를 가든 딸에게 엽서를 써보냈다는 점이다. 가까운 도시에 있는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보고 나서도 어위는 그날의 감상을 엽서에 써서 딸에게 보냈다. 해외여행을 가서는 물론이다. 이렇게 평생 모인 아버지의 엽서는 아네뜨 할머니가 평생 간직해온 소중한 보물이었다. 가족의 작고 사소한 의식, 서로를 생각하고 사랑을 담은 메시지가 시간과 함께 가족 공동의 기억이 되고 유산이 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생각해볼 때, 가족 내에서 이러한 무형의 의식이 소중한 유산이 되는 일. 우리가 주식과 부동산 얘기가 끝나면 공허해지는 것은 소중한 것을 나누는 일이 언젠가부터 우리 삶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타인의 에세이에서 내가 관심 있게 주목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우리 사회가 헬조선이 된 것은 어쩌면 가정에서부터 구성원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특별한 교육을 받아서가 아니라 가족끼리 서로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해주고 바라봐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가정 밖에서 타인에게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지 않겠는가. 어디선가 읽은 폴 발레리의 선문답 같이 낯선 문장이 친근하게 보인다. ‘본다는 것은 보고 있는 것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내게는 이 문장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망치 같은 문장으로 다가온다.


낯선 곳에서 우연히 타인을 만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인연이 이 책에 있다. 집돌이인 내게는 아마도 남은 인생에서 만들기 힘든 인연의 이야기다. 우연한 인연이 이어져 놀라운 이야기를 소유하게 된 저자는 누구보다 부유한 사람일 테다. 소중한 것을 나눌 수 있는 인연이 많은 사람은 삶에서 허기지지 않을 것 같고, 메마르고 힘겨운 인생에서 다시 일어날 기운을, 언제든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배우는 것들이다. 이처럼 삶에서 자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은 이들이 부럽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관계하는 이들과 소중한 것을 만들어나가고 이걸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1] "여기에서 나는 어릴 때 가지지 못한 장난감을 가지고 안전하게 놀고 있다. 같은 놀이를 좋아하고, 서로 지지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133)

[2]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누군가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이, 사실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도 있어." (181)

[3]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가장 감사하는 바입니다."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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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의 아틀리에 - 장욱진 그림산문집
장욱진 지음 / 열화당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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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으로 생을 ‘사랑’했던 예술가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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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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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Suga Atsuko) 지음 |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문학이 되어버린, 한 인물의 삶이 담긴 에세이

 


스가 아쓰코라는 인물을 알게 된 건 올해였다. 우연한 기회에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이면서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여 로마 문화의 황금기를 가져온 인물. 동시에 강경파 로마 세력으로부터 유약한 황제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이 흥미로운 인물에 대한 소설이었다. 이 놀라운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작품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테니 나중으로 미루어 둔다.


스가 아쓰코가 등장하는 대목은 그녀가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에 심취했으며, 그녀의 문학적 발자취를 찾아 가기를 꿈꾸었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르스나르의 신발이란 책을 썼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렇게 1929년에 출생한 여성은 독립적인 직업인으로서 문학도를 소망했다. 그리고 정말 배를 타고 프랑스로 유학을 갔던 것이다. 이후 이탈리아 밀라노로 건너가 공부하면서 조합 형식의 서점에서 일하는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까지 하며 10여 년을 지내고 귀국한 이력의 인물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수많은 이탈리아의 지성인과 교류했고, 이탈리아 현대 문학사의 한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기도 하다. 책과 서점을 중심으로 확장되어간 인연들의 이야기들이 그녀가 쓴 여러 편의 에세이에 묘사된 중심적인 화제다.


특히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이탈리에서도 유명한 밀라노의 짙은 안개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저자 본인이 직접 겪은 다양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특히 남편의 이른 죽음을 중심으로 가족같이 지내던 수많은 인연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지적이고 절제된 형식으로 들려준다. 아쓰코는 남편의 죽음 이후 몇 년을 더 지내다가 13년의 이탈리아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이후 비교문학 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하고, 많은 이탈리아 문학을 일본에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그녀의 에세이가 지닌 특징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문학 연구자로서 여러 문학적 논평을 포함한 지적인 면모와 그녀가 만나게 된 인연들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내게는 그런 면에서 저자의 에세이 한 편 한 편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또 이 에세이가 자신이 겪은 과거의 일을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 썼던 글이기에 균형감이 더 돋보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책 이외에는 가진 것 없는 생활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언제나 서로를 걱정하고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에세이를 읽으며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가진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해주었다.


본문 중에는 저자가 문학도로서, 좋아하는 일에 그토록 좋아서 하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본인이 좋아하는 문학 번역작업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나칠 정도로 번역 일을 좋아 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따라서 일종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문장을 만들어나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일이다.”(79)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운아다. 하지만 그녀는 생계를 위해서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는데, 그 가운데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도 변함없이 보여주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기 어려웠던 시절, 교육을 받으면 곧바로 결혼을 하곤 했던 시절에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시도할 수 있는 여건과 길을 찾아 용감하게 나아간 인물이기도 했다.


나라면 평생 문학을 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싶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규범에 휘둘리고 나를 잃어버리기가 오히려 쉬웠을 것이다. 그녀의 삶은 문학에서 시작해서 문학으로 끝나는, 문학의 삶 자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 현대 문학사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그녀의 삶은 곧 문학이 된 셈이다. 이번에 읽은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저자가 남긴 에세이 작품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저자의 나머지 에세이들도 모두 읽을 생각을 하니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한 것 같아 설레기도 한다.




"(나폴리는) 일면에 자꾸 화를 내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도시와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선 전체를 받아들이고 천천히 살피다보면 어느 날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다." (73)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나칠 정도로 번역 일을 좋아 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따라서 일종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문장을 만들어나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일이다." (79)

"책장을 메운 오래전 사건을 오늘 나의 일상과 끊임없이 겹쳐보며 번역을 해나갔다." (119)

"얼마 전 여름휴가 때 아니타 로가 번역한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읽고 이 독일 작가의 위대함에 눈뜨게 되었다. 독일 북부 뷔베크에 사는 거상 가족의 이야기가 아마도 토마스 만 특유의 (즉 내가 읽을 수 없는 원문의) 단단하고 중층적인 문체를 살린 근사한 이탈리아어로 펼쳐졌다." (195)

"오뉴월, 아름다운 초여름이었다. 전철이 점점 산에 가까워지자 조토의 그림이 떠오르는, 주황빛으로 메마른 언덕에 핀 금작화가 보였다. (...) 조금 더 가니 이번에는 나뭇가지가 휠 정도로 흐드러지게 핀 하얗고 커다란 아카시아 꽃송이를 지나쳤다. 연초록 이파리 사이로 아른거리는 하얀 꽃이 달리는 전차에 닿을 듯했고, 달콤한 향기가 열린 차창으로 들어와 열차 안을 가득 채웠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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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10-20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송태욱 선생님 번역도 훌륭했고 스가 아쓰코 인생 이야기도 넘 좋았어요. :)

초란공 2021-10-20 13:10   좋아요 1 | URL
격하게 공감합니다~! ^^;; 송태욱 샘 작업은 묻지마 구입하기로!

그레이스 2021-10-20 13:14   좋아요 1 | URL
👌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 밀라논나 이야기
장명숙 지음 / 김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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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 밀라논나 이야기

장명숙 지음 | [김영사]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나누다

 


노인 한 명이 세상을 떠나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혹자는 아프리카 격언이라고도 하지만, 아프리카와 도서관을 연관 짓기는 어려울 듯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다듬어졌을 듯싶다. 한동안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에세이 몇 권을 읽었는데, 마침 아내가 읽던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를 나도 읽으면서 앞에 인용한 표현이 떠올랐다. 올해 일흔이 되신 저자는 일찍이 패션계에서 경력을 쌓고 밀라노와 대한민국을 거점으로 평생 활발하게 활동하신 분이었다.


요즘 들어 생각하는 것이지만, 나이가 든다고 모두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성장해야 어른이 되는 것이리라. 저자는 사회의 어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분이란 인상을 받았다. 저자가 내 어머니와 같은 연세이기도 하고, 저자의 큰 아들 역시 내 또래여서였을까, 저자의 젊은 시절 관습과 편견을 극복하고 전력투구하며 나아갔던 행보에서 내 어머니의 삶도 보이는 듯했다. 한 문장마다 이야기를 듣듯이 찬찬히 읽어보았다.


저자의 말 중 조금씩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227)는 문장에 눈길이 멈추었다. 삶과 죽음은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생명이 주어졌다면 죽음은 어김없이, 정면으로 맞게 될 삶의 과정이다. 살면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음을 떠올릴 때 내게 절실해진 화두가 된다. 저자가 나누는 지혜 속에 본인이 해야 할 역할과 몫은 본인이 해야 한다’(260)는 대목이 인상 깊었다. 저자가 삶과 대면하여 어떻게 살고자 했을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모든 생명체, 특히 인간은 삶은 한번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존재다. 모든 단계가 처음일 수밖에 없다. 저자가 양육을 잠시 부모에게 맡겼던 것을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말하며 힘들게 배운 교훈이 바로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역할,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해낸다는 말이 이처럼 생경하고 무겁게 다가온 적이 있을까. ‘부단히 노력하고 전력투구하고 난 뒤 삶을 돌아보는 저자의 모습에서 평생 한결같이 일하셨고 지금도 일하시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최근에 어머니가 요양원에 가서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셨던 순간이, 죽음을 말하는 저자의 태도와 오버랩 되었다. 나 역시 살아있는 동안 무엇보다 내가 해야 할 내 몫을 다할 수 있었으면 하고 소망한다. 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저자의 말대로 소중한 사람과 즐거운 시간과 경험을 보다 많이 하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내 몫을 나름대로 해낼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과 나누고 베푸는 일이 보다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이제는 내가 가진 부실한 것들도 좀 더 나눌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내가 가진 것 모두 언젠가는 버려지거나 타인에게 넘어갈 것이니까. ‘나는 자유다라고 외친 카잔차키스의 선언이 오늘따라 낯설고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책을 덮고서도 삶의 본질에 파고드세요라는 저자의 한 마디 역시 쉽게 떠나지 않는다. 내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일까. 우리 모두는 관습과 유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지만, 내 삶은 어떠해야할지, 내 죽음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는 이제부터라도 살펴보고 돌보아야할 나만의 과제가 되어야 할 테다. 저자는 어려운 철학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꾸준히 성찰하고 깨달은 지혜를 독자에게 나누어준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삶을 사랑해온 방법을 소개한 책이었다.



"진정으로 럭셔리한 삶은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다. 럭셔리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다. 소중한 사람과 즐거운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174)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의 말

"오늘도 나는 내 분신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중이다." (214)

"조금씩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227)

"삶의 우선순위를 알고, 삶의 본질에 파고드세요." (260)

"인간에 죽음을 뛰어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좋은 글을 남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좋은 자식을 남기는 것이다." (261)
- 움베르토 에코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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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0-14 1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볼드답게 진하게 여운이 남습니다.
죽음을 생의 큰 한 단계로 볼 수 있는 것도 성찰을 통해 축복 받은 것 같습니다.
삶의 본질. 또 한 번 생각하게 하는군요.

초란공 2021-10-14 18:27   좋아요 2 | URL
초딩님을 오랜만에 뵙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잠시 마음이 바빠 댓글도 제대로 못달았네요.
건강하고 행복한 가을 보내시길요~

초딩 2021-10-14 19:20   좋아요 2 | URL
저도요 ㅜㅜ 방가 방가합니다 초씨 집안~ ㅎㅎㅎ
 
이선 프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7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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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 Ethan Frome

이디스 워튼 (Edith Wharton) 지음 | 김욱동 옮김 | [민음사]

 


사회 규범이 강요당하는 인간 내면의 풍경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21년에 퓰리처상을 받게 된 순수의 시대는 작가 이디스 워튼의 대표작이다. 워튼의 또 다른 대표작 이선 프롬은 이보다 10년 전인 1911(당시 49)에 작가가 자신의 불행한 결혼을 염두에 두고 쓴 자전적인 소설이다. 사랑, 결혼, 불행 혹은 죽음은 소설 혹은 예술의 형태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재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삶의 본질을 반영하는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독특하게 액자소설의 구성 속에서 화자가 한 인물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이선 프롬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농부로 대학공부까지 조금 맛보았던 남자다. 병으로 보살핌이 필요한 이선의 어머니는 친척인 지나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선은 지나의 보살핌에 고마워하면서도 그녀와 애정이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식 날에야 신랑·신부의 얼굴을 보았다는 우리의 전통 결혼 문화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충돌이 생겨났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술만 마시면 폭행을 일삼는 남편을 맞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물론 평생을 다정한 친구처럼 금슬 좋게 살아온 노부부의 사연도 간간이 접하지만 그만큼 드물다. 부부 사이에 애정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부부 사이에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그 관계는 서로에게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이선 프롬은 바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던 작가의 아바타였다.


소설에서도 부조리한 결혼 생활이 배우자 사이의 갈등으로 표면화되고 있다. 결혼 제도는 사회 규범과 도덕적 인습, 구체화된 제도가 결합된 복합적인 공동체 유지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배우자 사이의 갈등은 곧 개인과 사회의 대립 국면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 혹은 공동체가 개개인에게 요구하고 강요하는 규칙과 역할은 애초에 어긋난 관계로 고통 받고 괴로움을 겪는 이들을 옭아매는 문명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이선과 지나의 무기력한 결혼 생활에 어느 날 지나의 사촌 매티가 등장한다. 매티는 이선의 하루하루에 활력소를 주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이선의 마음을 느끼고 이선 역시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지만, 규범이 지배하는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손발이 꽁꽁 묶였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143)

 

한 집안이 가장이자 병든 아내를 돌보아야 하는 남편, 게다가 자신이 관리해야 겨우 돌아가는 농장의 주인 이선 프롬. 그는 이 모든 역할을 하루아침에 벗어 던지고 사랑을 택할 수는 없었다. 인용된 문장은 이선의 절망과 좌절감이 집약된 표현일 테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인습과 제도가 기대하는 역할을 집어던질 때 사회 혹은 공동체로부터 날아올 비난의 화살을 감당하는 것은 고스란히 이탈자의 몫이 된다. 사회의 비난, 나아가 구성원으로서의 제약과 제재는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무섭게 짓누르기 마련이다. 개인이 속한 공동체를 벗어난다는 것은 추방행위와도 다를 바 없다. 추방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살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작가 이디스 워튼은 인습과 제도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사랑과 자유를 추구하며 벗어날 수 없었던 고뇌와 고통을 이선 프롬의 행동과 입을 통해 표출했을 것이다.


지나가 매티를 내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이선과 매티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도덕과 윤리의 장벽으로 내몰린 셈이다. 부인 지나는 사회적 규범을 무기삼아 두 사람을 곤경에 몰아넣고 압박한 것이다. 사회 혹은 공동체가 강요하는 윤리의 테두리에 내몰리고 압박을 받는 구성원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다시 현실의 질서 속으로 복귀할 것인가, 아니면 인습의 테두리를 벗어던질 것인가. 혹은 이러한 국면이 지나친 고뇌와 갈등 끝에 자기 파괴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선과 매티가 어두운 밤에 함께 썰매를 타고 동반 자살을 암시하는 행동을 함께 한 것 역시 어느 쪽으로도 결정하지 못한 이들의 몸부림일 것이다. 역자의 표현처럼 인간은 작품 속 주인공처럼 실존의 감옥에 사는 수인인 셈이다. 이는 이선과 매티가 놓인 상황을 정확히 요약하고 있다.


작가 자신의 경험과 고뇌가 여실히 반영된 이선 프롬은 길지는 않지만 묵직한 물음을 독자에게 던진다. 가족 구성원 사이의 갈등, 사회 규범과 제도, 인습이 개인에게 강요하는 역할과 기대와의 불화 혹은 대립에 관한 진실을 독자가 인식하게 한다. 하지만 독자가 문학 작품을 통해 보편적인 진실을 접할 경우, 독자는 보다 현명해지는 것일까? 나는 가끔 이점이 궁금했다. 공동체의 규칙을 파악하고 준수하면서도 개인은 자유와 욕망을 추구할 수 있을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자신의 몸을 기차에 던지지 않고 그녀의 남편이 안나를 비난하지 않고 수월하게 이혼을 해주었더라면, 안나는 사랑과 아들을 모두 되찾을 수 있었을까. 소설 속의 선택은 현실 속의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보여줄 뿐이다.


워튼의 시대와 나의 시대 사이에 100여년의 격차가 있지만, 그의 작품이 제기하는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개개인의 삶 속에서 드러난 문제에 정답은 없다. 답은 각자가 내리는 것일 테니. 그러면 고전문학은 우리의 삶에 과연 어떤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각자의 해답 찾기 과정에서 여러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독자는 문학이 제시하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다양한 국면을 검토하고 각자의 진실 찾기를 시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문학은 독자 나름의 해답 찾기 혹은 진실 찾기 과정에서 멍석 까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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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0-04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여러 장면을 보여주고
그 장면의 메시지가 어느 정도 검증 된 것이
대중매체의 그것과 다른 것 같아요 :-)
오늘은 날씨가 흐리네요
그래도 좋은 날 되새요~

han22598 2021-10-06 0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글은 무언가 잘 정돈된 글 같아요. ^^ (저랑 완전 정반대의 글인 것 같아요 ㅎㅎ)

시대가 변해도 비슷한 주제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번민하는 자들의 존재가 중요할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정답을 찾았느냐의 유무보다는 번민하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초란공 2021-10-06 22:36   좋아요 0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읽기 전에 했던 예상보다 묵직한 주제를 던지는 것 같아서 좋았고,
본질적인 문제는 시대와 무관한 거구나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레이스 2021-10-06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토너가 생각나네요.

초란공 2021-10-06 22:42   좋아요 0 | URL
어떤 점이 <스토너>에서 생각났는지 궁금해집니다~^^
어떻게 보면 스토너는 밋밋하고 항상 패배하고 마는(?) 캐릭터 같았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스토너가 저와 비슷하단 생각도 들고 해서 공감이 가긴 했는데요
자세한 건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워낙 잔잔하게 다가왔던 소설이란 인상만 남아있어서요.^^;; 다시 읽어봐야할 것 같습니다 ㅋ

그레이스 2021-10-06 23:41   좋아요 1 | URL
제가 이 책을 안읽고 올려주신 스토리만 봐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하긴 소재가 되는 스토너의 삶이 워낙 많이 쓰여진 플롯이기도 하네요
그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다른 감상을 전달하기도 하니까요^^
결혼, 또 다른 사랑, 하지만 순응...
그런 내용이 비슷하게 느껴졌어요^^
이선 프롬을 읽어보면 다르게 다가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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