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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평점 :
자신에게 진실한 삶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 사르트르의《구토》를 읽고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그날, 그 시간이다, 라고 말할 때가 오리라.”(330)
장 폴 사르트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철학자다. 정작 그는 철학과 문학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문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후세에 작가로 기억되기 바랐다는 말이다. 그의 첫 소설 《구토 La Nausée》(1938)에 등장하는 화자 앙투안 로캉탱은 소설의 마지막에 공간적 배경이 되는 도시 부빌을 떠난다. 파리에서 소설을 쓰기 위해서다. 위에 인용한 대목은 로캉탱이 기차에 오르기 전에 하는 독백이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그날은 언제일까?
소설의 화자 로캉탱은 서른 살에 이미 30만 프랑의 재산을 상속받고 유유자적하게 지낸다. 여기에 매년 1만 4천 4백 프랑의 연금을 받는 잉여계급이었다. 그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만족스러워하지만 친구 하나 없는 고독한 인물이었다. 세계 여러 곳을 수년 간 여행하고 돌아와 부빌에서 지내고 있다. 이곳에서 프랑스 혁명기의 드 로르봉 후작에 관한 역사책을 쓰는 중이었다. 그는 관련 자료가 있는 도서관을 일과처럼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병에 걸리듯 갑작스럽게’ 추상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바닷가에서 조약돌을 들고 던지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호텔 앞에 떨어진 종이를 주우려다가도 빈손으로 일어섰다. 역시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꼈다. ‘시큼한, 일종의 구토증’을 느꼈던 것이다. 이제 그 증세는 식당이나 역전 회관, 그리고 어디든 로캉탱을 따라다녔다.
구토의 원인과 ‘존재’ 개념
도대체 이 ‘구토’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로캉탱의 눈앞에 놓인 ‘사물의 존재’ 자체가 이 증상을 유발하는 것이 분명했다. ‘사물이 존재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란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것뿐이다.”(245)라고 생각한다. 존재는 ‘우연히’ 있게 된 것이다. 또 이 ‘우연성은 절대’이므로 ‘완전한 무상’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것이 무상이라는 것이다. 로캉탱이 말하는 이 존재의 ‘우연성’ 혹은 ‘무상성’은 사르트르가 소설을 발표한 후 5년이 지난 1943년에 출간한 《존재와 무》에서 다루는 개념이다.
사르트르가 사용하는 ‘존재’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언급된 ‘존재’ 개념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고대 서양 철학에서 ‘존재’란 ‘불변하는 것, 언제나 있는 것, 영원한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믿어졌던 ‘우주’, 한결같은 지식을 담고 있는 ‘진리’와 같은 대상이 ‘존재’의 영역에 속했다. 이들은 앎의 대상, 사유의 대상이었다. 반면, 생성과 소멸을 겪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은 감각 혹은 경험을 통해 ‘감지’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반면 로캉탱은 ‘단단하고 움직이지 않는 돌’뿐만 아니라 자신도 ‘존재’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다시 말해 ‘존재’의 범주에는 생성과 소멸을 겪고, 먹고 마시며 움직이는 인간이 포함되어 있다. 나아가 존재는 이 모든 세계에 있게 된 대상이며, 이 ‘존재’들은 그저 ‘우연히’ 있게 된 것들이다.
여기에서 로캉탱이 느꼈던 ‘구토’ 증세의 원인을 짐작해볼 수 있겠다. 하나의 존재(화자)가 다른 존재(조약돌)를 자각할 때 찾아오는 낯선 감정이 아닐까. 다시 말해 생성·소멸을 겪는 존재(화자)가 불변하는 존재(조약돌)와 마주하여 대상의 ‘우연성’을 자각하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자각이 낯설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에게 ‘존재’란 그 ‘속성’을 말할 수는 있어도, 결코 그 자체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존재자로서 화자 자신뿐만 아니라 대상인 조약돌의 존재 이유나 원인을 알 길은 없다. 대신 대상을 사유하는 자신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 때 존재가 느끼는 낯설음과 불안감. 그게 바로 ‘구토’ 증세였다.
우연성의 세계 vs. 필연성의 세계
로캉탱은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역전 회관’을 습관처럼 찾았다. 이곳 종업원이 틀어주는 음악을 들을 때면 구토 증세가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랙타임 형식의 스탠더드 재즈곡 「머지않아서 Some of These Days」를 들을 때, 행복을 느꼈다. “그것은 ‘구토’ 속의 조그마한 행복”(47)이었다. 그는 자신이 음악을 들을 때 구토가 사라진 이유를 음악의 ‘필연성’에서 찾았다. 한 곡의 음악은 ‘필연성의 질서에 따라’ 시작과 끝을 지닌다. 게다가 ‘몇 초 후면 흑인 여자가 노래를 부를 것’임을 아는 시간성 속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내적 질서를 지닌 음악의 필연성은 설명될 수 있고, 규정될 수 있었다. 로캉탱은 이 음악의 필연성 ‘속’에 있을 때 행복감을 느꼈다.
한편 역전 회관에서 여주인을 기다리던 로캉탱은 몇 사람이 술을 마시며 트럼프 놀이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들의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우연성이 지배하는 영역에 속했다. 트럼프 게임의 승부마저 우연에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일요일마다 아페리티프를 마시며 트럼프놀이를 하거나, 맥주와 슈크루트를 먹었다. 혹은 일요일마다 식당에서 보르도산 포도주와 소갈비를 뜯는 부부처럼 습관적인 삶을 산다. 상류 인사들도 일요일 오전마다 투른브리드 거리에서 ‘모자 춤’에 참여한다. 타인의 시선과 체면에 신경을 쓰고, 관습에 순응하는 옷차림을 하고 거리를 나서는 것이다. 이들은 각본에 따라 말하고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행동했다. 이 대부분의 부빌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사르트르의 용어로 ‘자기기만’에 해당할 것이다. 로캉탱은 이들 모두를 ‘세계에 우연적으로 주어진 여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러한 여분의 존재를 자각할 때마다 ‘구토’ 증세를 느꼈던 것이다. 이 여분의 존재들은 음악 ‘속’에서 행복을 느꼈던 로캉탱과 분명히 다른 세계에 있었다.
우연성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서 로캉탱이 거의 유일하게 교류하는 인물이 있다. 오지에 P.라는 이름의 독서광이었다. 그는 7년 째 도서관에 있는 책을 저자 이름의 알파벳순으로 읽고 있었다. 로캉탱처럼 언젠가는 여행을 하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만든 습관과 자신의 천성에 따르는 인물이다. 그가 로캉탱에게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는 파스칼의 말을 꺼낸 것처럼 자신이 정한 습관 속에서 사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천성(동성애적 성향)을 따르다가 도서관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이처럼 우연성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습관에 따라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다른 세계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서로 다른 시간성이 존재했던 셈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우연성이 지배하는 세계’와 ‘필연성이 지배하는 세계’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로캉탱이 필연성이 지배하는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가 머물고 싶어 하는 세계가 레코드판의 음악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로캉탱은 우연성의 세계를 극복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필연적이며 자기 원인이 됨직한 것을 발명함으로써, 이 우연성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245) 우연히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스스로 만들어내면 된다는 것이다. 로캉탱은 점차 ‘존재’를 자각하는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연성이 지배하는 세계는 일종의 ‘무질서’적인 세계다. 이로부터 필연성이 지배하는 ‘질서’의 세계 속에 이르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이 혼돈(카오스)의 세계에서 질서 잡힌 세계(코스모스)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사르트르의 철학 체계 전체가 ‘신의 부재’ 위에 놓여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연성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로캉탱은 결국 드 로르봉 후작에 대해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떤 필연적 존재도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245)고 말했다. 그는 작곡가나 가수가 아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우연성을 극복하는 발명은 ‘책’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만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길 원했다. 로캉탱이 필연성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이 소설쓰기였다. 이 작업은 작곡가가 소설 속에 흐르는 재즈음악을 만들었던 것처럼 우연성의 세계에서 일탈할 수 있는 창조행위였다.
나다운 내가 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음악이든 소설이든 나름의 완결성과 내적질서를 갖는 구조를 창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곧 우연성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창조의 과정에 필요한 것이 바로 ‘상상력’일 것이다. 사르트르는 1936년에 《상상력》을, 1940년에는 《상상적인 것》이란 책을 썼다. 그는 작가가 되기를 열망했을 뿐만 아니라 상상력이란 주제를 진지하게 탐구했다. 이런 맥락에서 로캉탱이 말하는 우연성의 세계는 ‘상상력이 결여된 세계’라고도 할 수 있겠다. 기계적으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이 소멸되어 있었다. 돌처럼 단단하고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삶에 ‘일탈’을 가져올 수 있는 촉매제가 바로 ‘상상력’ 혹은 ‘상상력을 통한 창조 행위’가 아닐까. 물론 여기에 개입되는 행위는 필연성의 세계에 정교한 내적질서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첫 단락에 인용한 대목은 로캉탱이 유복한 상속자의 권태로움, 순응하는 삶을 단절하고자 부빌을 떠날 때 하는 독백이었다. 부빌을 떠나게 된 것은 단순히 역사책 쓰기를 중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뿌리내린 세계와의 단절을 통해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로캉탱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음악을 들으며 “나는 ‘있기’를 원했다.”(324)라고 되뇐다. 여기서 그는 ‘있기’(‘있음’)와 ‘존재’를 구별해서 사용하며, “그것밖에는 바라지 않았다. 이것이 내 인생의 결어(結語)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때 ‘존재’라는 표현은 ‘상상력 혹은 의미가 결여된 상태 혹은 그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반대로 자신이 내린 인생의 ‘결론’에 따라 ‘있기’를 원했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의 본모습(본질)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갈망이기도 하다. 곧 자신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선택해나가는 존재이길 원했다는 의미다. 여기에 로캉탱의 상상력과 결단(용기)이 필요했다. 로캉탱에게 소설쓰기는 자신이 필연성의 세계와 만날 수 있는 자기창조 행위였다. 이것이 어쩌면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영원성을 맛볼 수 있는 행위였을지 모른다.
《구토》에서 로캉탱은 어느 면으로 보나 사르트르의 분신이었다. 몇 년 후 출간되었던 《존재와 무》에 담긴 그의 사상은 이미 이 소설에 반영되어 있다. 습관처럼 ‘존재’하는 삶을 극복하려는 사르트르의 의지는 1964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그의 행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 분명히 스스로의 질서를 ‘발명’한 사람이었다. 습관적으로 존재하는 삶에 저항하고 이로부터 일탈을 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의 삶과 작품에서 새로운 상상력과 영감을 얻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자신에게 진실한 삶을 찾아 파리로 떠나는 로캉탱처럼, 우리의 삶도 그저 ‘존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으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