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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세자의 진짜 공부 ㅣ 라임 틴틴 스쿨 9
설흔 지음, 유준재 그림 / 라임 / 2017년 9월
평점 :
<라임 틴틴 스쿨>시리즈 9번째 이야기는 설흔 작가의 《소현 세자의 진짜 공부》입니다. 설흔 작가는 역사 속 인물과 고전을
재조명해 온 작가로 이번 작품에서도 소현 세자의 삶을 통해 오늘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합니다. 소현 세자는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이자 9년동안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다가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그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탓에 많은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더욱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소현 세자가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약물에 중독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어 그의 죽음은 많은 의구심을 갖게 하지요.
폭염 경보가 발령된 신시의 강변에 늙고 지친 버드나무 아래 성긴 그늘로 숨어든 화자 '나'의 곁에 낯선 남자가 별로 넓지 않은 그늘에
갑자기 쳐들어왔어요. 행동과 말투는 마흔 언저리였으나 자세히 보면 서른 정보밖에는 안 되어 보이는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 하는 사람인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며 기억을 잃은 제이슨 본처럼 솔직하고 담담하게 고백했고 나는 그에게 존이라는 이름을 붙혀줍니다.
그는 황제니 경전이니 볼모니 하는 지난간 시대의 단어들을 담아 먼 과거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나는 부끄럽다는 말 한마디에 그의 이야기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존의 언어가 나를 확 사로잡기 시작한 건 부끄럽다는 그 한마디를 들을 때부터였습니다. 부끄럽다는 그 형용사를 듣는 순간, 나는 너무 놀라서
접고 있던 종이배를 손에서 놓아버렸습니다. 요 근래 나를 사로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화두가 바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존이 말했듯 일을 당한 처음에는 분노와 슬픔의 감정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했습니다. 세상을 다 부수고
내 목숨도 함께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 상황은 바뀌었지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이 내내 분노하고 슬퍼하며 지낼 수만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생활이랄 것도 없는 생활에 몰두하는 사이, 분노와
슬픔은 슬며시 연합하여 손 꼭 잡고 내 몸을 빠져나갔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어느 순간부터는 후줄근한 부끄러움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존의 그 한마디는 기묘한 방식으로 나를 위로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 냉정한 도시에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구나, 하는
동지애적인 감정이 돌처럼 굳었던 내 마음을 살짝 흔들어 가루를 떨어뜨렸습니다.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뜨듯해졌습니다. (본문 30,31p)
나는 처음 강변에서의 만남 뒤로도 삼전도비가 세워진 소공원 근처의 놀이공원, 남한산성, 그리고 시위자와 경찰이 대치하는 광장에서 만남을
이어가게 되고 존은 그때마다 전쟁에 패한 뒤 암담했던 과거의 숱한 일들을 감당하며 느꼈던 무기력과 분노, 자책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렇듯 과거의 인물이었던 소현 세자를 '존'이라는 이름으로 현 시대로 소환하여 나와의 만남을 통해 과거의 이야기로부터 현재를 돌아보게 합니다.
《소현 세자의 진짜 공부》는 비운의 왕세자 소현 세자의 삶을 자신의 고백을 통해 풀어내고 있어요. 이는 소현 세자의 삶을 좀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듯 했지요. 소현 세자가 털어놓은 부끄러움과 자책은 공감과 위로를 선사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현 시대의 우리들에게 삶의 공부가 되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