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안에 담은 것들 - 걷다 떠오르다 새기다
이원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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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주말이면 남편과 아이를 대동하고 아차산 둘레길을 걷곤 했었는데, 요즘은 그나마도 잊고 산지 오래다. 겨울이 지나 이제 걷기에 좋겠거니 했더니 금새 더워지고 더위가 가셔 이제 걸을만 하겠거니 했더니 금새 또 추워졌다. 어쩌면 이렇게 날씨 핑계를 대면서 산책이 주는 여유로움 대신 귀찮음을 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이 아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버스 정류장까지는 10여분의 시간이 걸린다. 매일 오가는 거리지만 한 번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없이 늘 바쁘게 걷고 바쁘게 지나친다. 산책이 마치 사치인 것처럼. 그러고보니 계절이 변화하는 모습을 바라본지가,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문득 걸으며 바라봤던 주변이, 걸으면서 잠겼던 사색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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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걷기. 나를 벗어나는 두 발이 있다. 걸을 때 생각은 생각의 독자 노선으로 멀리 멀리 간다. 산책의 권리는 생각과 두 발이 '따로 또 같이' 갖는다. 이 분리, 이 사용법은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 또는 히든카드. (본문 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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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원의 첫 산문집 <<산책 안에 담은 것들>>은 이병률 시인의 말을 빌어 '한 시인의 산책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하겠다. 저자 이원은 산책에 대해 '산책은 나를 간명하게 만들어준다. 간명해진 몸으로 삶 속에 머물게 하며 빛이 사라지지 않게 해준다. 산책은 희망이다. 어느 순간에도 나를 돌보는 손길을 거두지 않는 엄마처럼, 아픈 희망이다' (본문 9p)라고 말하고 있을 만큼 산책에 매혹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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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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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흐르는 것이라고 믿는 것과 흐르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 것 사이. 공간: 채워지는 것과 비어 잇는 것 사이. 또는 사라지는 허공과 나타나는 허공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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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는 언제 메워질까. 사이 안에 다 있다. 사이가 사라지면 시간도 공간도 욕망도 당신도 사라질 것이다. 사이가 사라지면 삶과 죽음이 바로 옆이었다는 것, 모든 언어는 하나의 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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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가 사라지면 멈춘다. 그 자리에서 썩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이를 꿈이라고 희망이라고 삶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사이를 결핍이라고 환영이라고 부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문 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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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기 때문일까? 산문집에서는 보기 힘든 아름다운 문장들이 읽는 동안 내내 감탄을 자아낸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 상상력을 더해주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그동안 천천히 걷는 것을 산책이라 생각했던 나의 산책에 대한 정의를 새로이 하게 되는 듯 했다. 엉킬 때, 가벼워지고 싶을 때, 종이비행기를 날리듯 어떤 것을 잊고, 잃고 싶을 때, 고요해지고 싶을 때 산책은 나를 벗어나는 나를 만날 수 있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하여 산책은 매일 떠나는 여행과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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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면 작가와 함께 나도 그 길을 걷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든다. 가보지 못한 홍대 골목 골목이 익숙해지는 느낌처럼. 그저 걷고 눈으로 보는 것으로 산책의 의미를 부여했던 나와 달리 작가는 삶과 산책을 닮을 꼴로 보며 산책 속에 삶을 그려내고 있었다. 산책은 그저 두 발로 걷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 떠나는 가장 쉽고도 깊은 여행이 될 수 있었던 게다. 기억, 사람 등을 담아낸 '산책의 역사'와 마주하면서 나 역시 그 산책의 역사를 그려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산책 속에 나도 기억과 사람과 그리움과 나를 담아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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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을 벗어날 수 없다. 그 스스로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를 산책할 수 없다면 나 스스로를 산책할 수 없다. 그 스스로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을 초월하여, 사람이 된다. 사람은 사람을 초월할 때만이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을 통해서만 사람 너머로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니체의 문장대로,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 사람이다.
우리는 무엇이기 때문에 지상의 시간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무엇도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된 것이다.
우리는 한없이 주저앉아서, 때로는 한없이 울면서 사람을 배워간다.
오늘도 사람 속을 걸으며 사람과 이별한다. 이별하며 사람을 이해한다. (본문 169, 1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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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산책 안에 담은 것들' 본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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