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로부터 온 편지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이유로 책을 덮은 뒤로 단 한 번도 다시 읽지 않게 된 소설일 뿐이다. 아무리 유명한 고전이라 할지라도 다 재미있는 것은 아니니까 난 그저 그런 소설이겠거니, 생각했다. 물론 고전 소설을 읽지 못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나, 도저히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에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카뮈로부터 온 편지>>를 통해 <이방인>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카뮈로부터 온 편지>>를 읽기 전에 저자의 이력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저자 이정서는 2014년 기존 알베르 카뮈<이방인>의 오역을 지적하며 새로운 변역서를 내놓아 학계에 충격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이것은 출판계와 번역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오며 자성을 이끌어냈다고 하니 저자 이정서의 정밀한 번역의 시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왔을지 알 듯 싶다. 더욱이 이 책은 ‘김화영의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번역 연재를 했던 6개월의 시간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한데다 실제 번역 과정을 소설로 재탄생시킨 일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이 작품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미뤄 짐작할수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실제 번역 과정을 소설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카뮈로부터 편지를 받으면서 시작되는 판타지 형식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이방인>이라면 이미 수많은 출판사에서 수십 종의 번역서를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불문학의 대가인 김수영 교수가 펴낸 <이방인>이 수십 년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물론 시대에 따라 재번역을 하면서). (본문 10p)

 

퇴근 무렵, 강고해 팀장이 발신인이 'A. Camus.'카뮈인 편지 한통을 건넸다. 편지의 대략 내용은 자신의 소설을 한국에서 다시 내줄 수 없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주인공 이윤은 죽은 카뮈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을리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수많은 출판사에서 수십 종의 번역서를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불문학의 대가인 김수영 교수가 펴낸 <이방인>이 수십 년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뒤늦게 자신의 출판사에서 다시 번역해 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곧 흥미를 잃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가족 전부가 저녁을 먹게 된 토요일 저녁, 중2 작은 딸의 <이방인>이 재미없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두 딸과 <이방인>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되고, 이윤은 책을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도저히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소설을 간신히 다 읽은 이윤은 이런 소설을 두고 세계인이 열광했다는 뒤표지 카피에 아연하게 되고 큰 딸의 말마따나 이야기가 전혀 아귀가 맞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에 이윤은 카뮈의 편지를 끄집어내게 되었고 여러 권의 번역서를 읽으면서 <이방인>의 지루함이 어디서 왔는지 확신하게 된다.

 

무엇보다 카뮈의 문장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깔끔했다. 혹시나 싶어서 불어판을 보니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렇게 단순하고 명료한 문장을 김수영은 왜 그렇게 따분하고 모호하게 늘어놓았던 것일까?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문 23p)

 

번역이기에 가능했던 일이겠지만 김수영이 개인적인 해석으로 따로 놀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이방인>을 잘 읽히지 않고 재미가 없는 '전혀 다른'소설로 만들어버렸음을 알게 된 이윤은 <이방인>을 새로 번역하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번역자를 찾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감팀장의 권유로 인해 이윤은 직접 번역을 하기로 결심하고 연재를 올리게 된다. 이렇게해서 소설은 카뮈의 원 문장과 김미영의 번역과 자신의 번역을 비교하여 수록하는 내용으로 진행되어간다. 이렇게 번역을 연재해가는 과정 속에서 이윤의 심리가 탁월하게 묘사되어 진다. 이윤의 심리를 따라가다보면 오역을 바로잡아 가야하는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이를 통해 오역을 지적하며 새로운 번역서를 내놓음으로써 오해 받고 출계와 번역계에 논쟁을 불러 일으키면서까지 <이방인>을 출간한 저자 이정서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한마디로 놀랐다.

아무리 소설의 재미가 360도 다른 각도에서 나온다지만 이런 소재와 주제의 소설이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건, 경이로움을 넘어 내 상상력의 한계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 소설은 한마디로 언어적 재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류의 재담이나 법정류의 청담도 없다. 아니 그와는 아주 다르게 두 사람의 <이방인>번역을 꼼꼼히 비교하며 읽어야 한다.

그러나 재미있다. 아니, 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너무나 재미있다. 비교된 두 개의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 범죄자와 법의학자의 대결을 보는 이상의 스릴이 있고, 권위주의자와 기득권을 쳐부수는 통쾌함이 있으며, 프랑스어와 영어와 국어의 같음과 다름을 경험하는 풍부한 문화여행이었다. (추천사_김진명)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하잖니, 서로 다른 두 언어가 딱 하나의 의미로 대응될 수 없으니(본문 13p)"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전에는 번역에 따라 작품이 주는 재미와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서로 다른 두 언어가 딱 하나의 의미로 대응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차이로 인해 작품의 의미가 훼손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정역으로 인해 작품이 가진 가치를 오롯이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과 쉼표하나, 조사 하나의 차이로 인해 작품의 의미가 달라짐에 따른 번역의 어려움을 이해하게 된 듯 싶다. 두 개의 번역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는 실로 새로운 소재의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