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
제니 페이건 지음, 이예원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파놉티콘-명사. 언제나 죄수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감방을 원형으로 만든 원형감옥. 그리스어 파놉토스는 모두에게 보인다는 뜻. (표지 中)

 

영국 최고의 사실주의 영화감독 켄 로치가 영화화 결정하고 Scottish Screen 문학상 수상, 2012년 영국 서점 선정 최고의 데뷔작, 2013년 최고의 젊은 영구 작가 선정 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소설이며 열다섯 살에 파놉티콘에 갇혀 실험 대상이 되어버린 소녀에 관한 이야기 <<파놉티콘>>의 소재가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져 읽어보게 된 소설이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언어가 너무도 거칠어 받아들이기가 좀 어려운 작품이었다. 문화적 차이를 감안해보지만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허나 아나이스의 이야기는 파놉티콘이라는 감시 체제가 자기 검열의 형태로 구조화되고 내면화된 현 감시 사회, 즉 우리 대다수의 일상과 다시 만나게 된다는 역자의 말처럼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이라 생각된다. 앞서 '파놉티콘'의 정의에 대해 쓴 것처럼 파놉티콘은 '모두 본다'는 의미로, 이는 영국의 철학자인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구조는 이중 원형으로, 바깥 원에는 수용자들이 배치되고 안쪽 원에는 감시탑이 배치되어 모든 수용실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수용자들은 감시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감시자의 감시를 받지 않을 때조차 자신이 감시받는다고 여기게 된다고 한다.

 

저들은 날 보고 있고, 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저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본문 7p)

 

이 소설은 열다섯 살의 소녀인 아나이스가 '파놉티콘' 시설에 입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나이스는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위탁가정을 스물세 군데를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되었지만, 열한 살 때 나온 후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을 옮겨 다녔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아나이스는 이렇게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폭력과 약물에 길들여지게 된다. 아나이스는 폭력 전력이 상당하다. 마리화나 소지, 흉기 소지, 헤로인 17그림 소지 등 16개월 동안 무려 100건이 넘는 위반 행위로 기소된 전력이 있다. 이번에 아나이스가 이 시설에 오게 된 것은 경찰을 공격했고 그 경찰이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파놉티콘에 들어오게 된 아나이스는 시설의 비슷한 류의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고 몰래 들여온 약물을 복용한다. 이들의 생활을 엿볼 때 언뜻 보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감시자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곳에도 없는 것이다. 단 아나이스의 상상의 세계만 빼고 말이다. 아나이스는 자신만의 생일 게임으로 자유를 즐긴다. 상상 속에서 그녀는 다양한 삶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 파리를 생각하자. 뉴욕, 피렌체, 제이를 생각하자. 제이와 키스하는 생각, 제인의 품에 안긴 느낌을 생각하자. 경찰이 작아지기 시작한다. 처음엔 그저 머리 크기가 묘하게 안 맞는다 싶을 정도였는데, 곧 코가 점점 길어지더니 몸 전체가 빠른 속도로 내게서 멀어진다. (167p)

 

 

사실 거칠고 노골적인 표현들로 인한 흡입력 부족 때문에 아나이스를 통해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을 되짚어보는 소설의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나의 독서력이 많이 부족했다. 책을 읽은 후에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역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로소 이 소설이 가진 의미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열다섯 살의 사춘기 아나이스의 이야기를 담아냈지만 청소년 소설이라 하기엔 너무 버거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고지식한 나의 생각으로 인해 청소년 소설의 주제와 이야기의 폭이 넓어진 것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다.

 

아나이스가 다른 어떤 소설 속 인물들보다 인상적이고 특별한 이유는 십대 사춘기 '소녀'로서 겪는 (비)일상적인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초현실을 진솔하게 그려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춘기 소녀의 환상과 두려움, 욕망과 꿈, 당돌함과 무모함, 투박함과 예민함을 거침없이 담고 있기에. (옮긴이의 말 中)

 

물론 사춘기 소녀가 겪는 심리적인 부분을 많이 담아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나이스의 현실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독자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는 무지수이다. 분명한 것은 이는 개인적인 견해라는 점이고, 나의 독서력은 부족하며, 상당히 고루한 편임을 분명하게 밝혀둔다. 「트레인스포팅」의 저자 어빈 웰시가 이 소설을 두고 "페이지마다 열정과 놀라운 스토리텔링의 마법이 가득해 생기가 넘친다. 매우 감명 깊은 작품이다." 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것을 볼 때, 내가 알지 못하는 이 소설만의 의미와 매력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거칠고 노골적인 표현으로 인해 이 소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듯 싶었는데, 역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 소설을 알게 되었다. 이를 음미하며 다시 읽는다면 분명 그 매력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고로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금 꼭 읽어볼 생각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내게 낯설었지만 그동안 꽉 막혔던 사고를 조금은 열어볼 수 있었던 작품은 아닐까 싶다.

 

헐벗은 느낌, 노출된 기분이다. 이는 아나이스가 반복하는 말이다. 실제로 아나이스는 자신을 보호해줄 피부가 없는, 우리 대다수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여러 사적이고 사회적인 울타리를 누리지 못하는 '취약' 청소년이다. 하지만 이런 소삭을 들킨 것만 같은 느낌은 사실 보편적이다. 다만 우리 대개는 혼돈의 시절을 지나게 되고 그렇기에 이에 성장통이란 이름을 붙이고 잊어버릴 여유가 있다면, 또 많은 이들이 나이와 사회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그 진통을 오래 안고 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많은 경우 계속해 불안정한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런 한편 다른 차원에서는 그러한 헐벗은 느낌이 나날이 보편화되어 지극히 당연한 것은 받아들여지고, 심지어는 그를 반기고 끊임없이 제 헐벗은 상태를 재확인해야 하는 이상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아나이스의 이야기는 파놉티콘이라는 감시 체제가 자기 검열의 형태로 구조화되고 내면화된 현 감시 사회, 즉 우리 대다수의 일상과 다시 만난다. (옮긴이의 말 中)

 

(이미지출처: '파놉티콘' 표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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