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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어린 왕자>가 개봉되면서 원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몇 번이고 읽었던 <<어린 왕자>>였는데, 영화 개봉 소식을 접하자 왠지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내가 이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받아 본 표지 속 어린 왕자는 내가 알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인데, 나만 훌쩍 자라 진지해진 어른이 된 기분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고전을 어른이 되서 다시 읽었을 때 느끼는 감동과 깊이는 사뭇 달랐다. 아마 <<어린 왕자>>는 그 감동과 깊이가 더 크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코끼리를 소화시키는 보아뱀이 아닌 모자만 보이는 많은 진지한 사람들과 숱한 관계를 맺으며 분별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관계로.
어른들도 가끔 아이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말을 통해서이다. 숫자를 신뢰하는 어른이 되는 순간 우리는 모두 어릴 적의 언어를 잃고 말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만의 방식으로 말을 했던 것인데, 우리는 어른의 시각으로 혼자 상처받고 들볶이면서, 심하게는 내가 왜 이 아이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거지? 하는 '어른'의 비겁함에 부끄러워질 때도 있는 것이다.
<어린 왕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이것이다. 아이와 어른의 시각차, 그것은 시공간의 차이에 있는 게 아니라고. 우리의 '어린 왕자'는 지구라는 별에 내려와 몸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 5p)
표지를 펼치니 옮긴이의 말 중 눈에 띄는 구절이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많이 느꼈던 것은 바로 내가 어릴 적의 마음, 언어를 잃어버려 아이의 마음, 아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때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다툼이 되기도 한다. <어린 왕자>의 키워드가 바로 '아이와 어른의 시각차'라는 글귀에 보니 이 책이야말로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언어를 되찾음으로써 나와 아이의 시각차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어릴 적의 언어를 찾아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어린 왕자>>의 내용을 모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더랬다. 헌데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생소함을 느꼈다. 아마 어른의 시각으로 처음 접하는 <<어린 왕자>>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코끼리를 소화시키는 보아뱀을 그렸던 화자인 나는 화가를 포기하고 어른이 되어 비행기를 조종하게 되었고 사하라사막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한 후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된다. 어린 왕자는 양 한 마리를 그려 달라고 하고 나는 신비로움에 압도되어 양을 그려주기 시작하지만 어린 왕자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끝내 나는 서둘러 엔진 수리를 시작해야 해서 되는 대로 그림을 그려 툭 던졌는데 오히려 어린 왕자는 마음에 들어했다. 그 그림은 바로 상자였다. 어린 왕자는 굉장히 흡족스러워했는데, 어른인 내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아이의 요구가 귀찮아진 어른이 취하게 되는 아주 흔한 태도였다. 무엇일까? 마치 그것은 그러한 어른들을 비꼬는 듯 하기도 했지만, 숫자와 같이 보이는 것에만 주목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했다. 이 밖에도 어른들의 모순적인 모습은 어린왕자가 소행성 B612를 떠나 6개의 별을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어린 왕자는 첫 번째 별에서 권력의 위엄을 갖춘 왕을 만난다. 왕은 전제 군주였고 불복종을 용인하지 못했지만 선한 사람이었기에 이성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왕을 잘 보면 이는 아이들 앞에서 권위를 내세우며 명령하길 좋아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말과 행동을 바꾸는 어른들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다. 어린왕자는 왕이 있는 별을 떠나면서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라는 말을 하는데 이 또한 우리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느끼는 말 중 하나가 아닌가. 두 번째 별에서 만난 자부심이 강한 남자, 세 번째 별에서 만나는 술꾼, 네 번째 별에서 만난 사업가, 다섯 번째 별에서 만나는 가로등지기 그리고 여섯 번째 별에서 만나는 지리학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모순적 모습의 어른들이다. 이렇게 책을 통해 본 어른들은 정말 이상하다. 그러니 서로 시각차가 다른 아이들의 눈에는 이 어른들이 얼마나 모순적으로 보일 것인가. 헌데 그 중 어린 왕자는 가로등지기는 터무니없게 여겨지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보다는 다른 것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어른인 내게는 그 역시 분별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가 '나'가 아닌 '타인'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는 어린 왕자의 그 말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따지고보면 어른이란, 타인을 밟고 일어서 우뚝 서고, 누군가를 지배하고 통치하면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정말 터무니없는 존재가 아닌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이, 장미꽃을 먹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우주가 달라지는 것이다.
하늘을 보라. 자신에게 물어보라. '양이 그 꽃을 먹었을까, 안 먹었을까?' 당신들은 모든 것들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게 될 것이다… … .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어른은 결코 없을 것이다! (본문 137p)
"눈으로는 보지 못해요. 마음으로 찾아야만 해요." (본문 122p)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요… … ." (본문 129p)
어른들에게 사소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아이들에게는 우주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른이 된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떤 것이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고 찾으려 했지만 이제는 눈에 보이는 숫자로만 그 중요성을 결정하는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우리는 현명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있잖아요… 내 꽃 말예요… 나는 책임이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너무 약해요! 너무 순진해요! 온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 네 개를 가진 게 전부예요… … . " (본문 135p)
가시 네 개로 큰 동물들에게 맞서야 하는 가녀린 꽃과 같은 내 아이에게 나는 그 가시 네 개를 타박하고 오해하면서 참 많이도 어른인 척 했던가보다. 어른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어린 왕자>>를 읽으면서 엄마와 자녀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여우와 어린 왕자가 길들이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처음 옮긴이의 말에서 이 소설의 키워드는 '아이와 어른의 시각차'라고 했던 말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개봉으로 인해 새삼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 왕자>>가 읽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 시작된 책 읽기였는데, 마치 넓은 우주를 품에 안은 듯 하다. 그동안 만난 어린 왕자는 진짜 '어린 왕자'가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 만난 오늘 비로소 나는 진짜 '어린 왕자'를 만난 것이다.
(이미지출처: '새움' 본문, 표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