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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걸스
로렌 뷰키스 지음, 문은실 옮김 / 단숨 / 2015년 8월
평점 :
우연히 보게 된 <<샤이닝 걸스>>의 표지와 시놉은 독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시간을 여행하는 살인마 VS 살아남은 소녀'라는 설정은 누구라도 호기심을 가질만 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작 미국 TV드라마 방영이 확정되었다는 문구 역시 스릴러를 좋아하는 나에게 작품에 대한 기대를 한없이 높여주었다. 이런 큰 기대감 탓이었을까. 여타의 스릴러에서 보여주는 긴박감 넘치는 빠른 진행이 아닌 탓에 초반 스토리에 집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특히 시간 배경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몰입도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또한 각 파트마다 각각의 등장인물을 1인칭으로 하여 전개되는 구성이 등장인물의 심리를 이해하는데는 좀더 쉬울 수 있으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기존에 접해왔던 스릴러를 떠올린다면 이처럼 작품에 집중하기는 다소 힘들 듯 싶다.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작품임에 틀림이 없기에 기존 스릴러에 대한 기대없이 읽는다면 오히려 온전히 이 작품이 가진 흥미로움,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꼭 이야기하고 싶다.
이야기는 1974년 7월 17일 하퍼로부터 시작된다. 외투 주머니 속 플라스틱 조랑말을 움켜쥐고 있던 하퍼는 땅바닥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아이는 흙바닥에 돌멩이, 잡지, 빨대 등으로 서커스를 만들고 있었다. 하퍼는 자신을 소개했고 여자 아이는 자신을 일곱 살 거의 다 된 커비 마즈라치라 소개했다. 하퍼는 커비에게 조랑말을 건넸고 선물이 아닌 담보물이니 안전하게 간직하고 있으면 나중에 가지러 오겠다고 말한다. 이 만남이 바로 이 책의 핵심 스토리가 되는 '시간을 여행하는 살인마 VS 살아남은 소녀'임을 짐작케 한다. 이 만남 이후로 이야기는 31년 하퍼, 74년 커비를 비롯한 수많은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갈비뼈에는 붕대로 감고, 발에는 깁스를 한 31년의 하퍼는 철저하게 버려진 거리, 나무판자로 막아버린 퇴창들과 '시카고 시의 저주를 받은 집'이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우연히 얻은 열쇠로 한 건물에 들어섰다. 그곳은 바로 더 하우스. 더 하우스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를 불렀다. 하퍼가 창으로 다가가 바깥 광경을 잠깐 내다보니 길 건너 집들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그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진숙, 조라, 윌리, 커비, 마고, 줄리아, 캐서린, 앨리스, 미샤, 낯선, 그가 모르는 여자들의 이름이 하퍼 자신의 필체로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하퍼는 그것으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어떤 문이 속에서 열리는 듯 했고, 빛나는 소녀들의 얼굴을 보았으며 그들이 어떻게 죽어야만 하는지를.
그의 머릿속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그녀를 죽여. 그녀를 막아. (본문 48p)
하퍼는 특정한 부류의 여자에게 선호를 정해놓고 욕구를 제한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말벌 같은 허리, 혹은 빨간 머리, 혹은 손가락을 집어 넣어 쑤실 수 있는 풍만한 엉덩이를 가진 여자들을 선호하는 남자들도 있지만, 그는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면, 얻을 수 있을 때가 있다면 그 무엇보다도 시간을 들여가며 손에 넣었다. 더 하우스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더 하우수는 잠재력을 원했다. 그들의 눈에서 불을 빼앗고 눌러 꺼버리고 싶어 했다. 하퍼는 그렇게 할 방법을 알았다. 칼을 사야했다. 총검만큼이나 날카로운 칼이 필요하다. (본문 81p)
이제 그는 여자를 찾아내야 했다. 하퍼는 마치 평생을 술에 취해 흐릿하게 살아오다가 장막이 확 벗겨져 내린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퍼가 손잡이에 손을 뻗자 문이 번쩍이는 빛으로, 깜깜한 지하 창고에 터진 폭죽처럼 날카로운 빛이 고양이의 내장을 훑고 지나가듯이 홱 열렸고 하퍼는 다른 시간대로 들어섰다.(본문 62p) 그리고 이유도 모른 채 여자들은 과거에서 온 하퍼에게 하나둘 아주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커비 역시 사고를 당하지만 그녀는 살아남았고 신문사에 들어가 살인자를 찾으려 한다.
이렇게 쫓고 쫓기는 상황이 발생하면 긴장감있는 스토리를 기대하게 마련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런 부분이 정말 미약하다. 이는 이 살인범이 시간 여행을 통해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더 하우스가 살인범인 하퍼가 잡히지 않게 도와주고 있는 탓에 아슬아슬한 장면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 오묘한 것은 이 스토리에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더 하우스가 어떻게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주었는지, 더 하우스는 왜 샤이닝 걸스가 죽기를 바라는지가 불분명하다. 하퍼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 더 하우스가 바라는 살인을 실행하고 있는 것일까? 헌데 이것이 무서운 것은 어떤 이유도 목적도 없이 살해당하고 싶다는 욕구만으로 빛나고 있다는 그녀들을 살해하는 하퍼와 같은 존재가 현실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유도 없이 그저 살인만으로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퍼의 모습은 사이코패스의 맨 얼굴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긴장감없이도 공포감을 유발한다.
<<샤이닝 걸스>>는 지금껏 접해왔던 스릴러와는 차별성을 둔 새로운 장르의 스릴러라 해도 좋을 것이다. 긴박감 넘치게 진행되면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기존의 스릴러와는 차별된 점에서 조금 낯선 느낌을 주지만, 판타지와 조화를 이루면서 이 스릴러만의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시간 배열의 복잡성으로 인해 다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결말의 아쉬움도 있었지만 연쇄살인마의 시간여행이라는 독특한 소재는 충분히 매력적인 스토리임에는 틀림없었다. 현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듯 하여 공포를 느끼기에도 충분했던 작품이니만큼 드라마로 보여졌을 때 어떤 시너지효과를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