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용이 있다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지음, 김유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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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15년 만다라체 상을 수상한 작품 <<여기 용이 있다>>는 헐리우드가 주목한 이야기꾼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의 소설로 영화 시나리오 작업과는 별개로 잠깐씩 짬을 내서 어른들을 대상으로 쓴 이야기라고 한다. 촬영 중 쉬는 시간이나 영화 후반 작업, 비행기나 기차역 등에서 떠오르는 내용들을 메모해 둔 내용으로 작가는 이 책을 읽을 때 이야기 사이사이에 몇 초간 휴식을 취하며고 이야기들을 순서대로 읽기를 권하고 있다. 113편의 미니 픽션들은 상당수가 1~2페이지 분량의 짧은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볍고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정말 많은 생각을 유도하고 있다.

 

이야기들을 순서대로 읽기를 권한다. 읽다보면 처음에는 이야기들의 미로 속에서 정해진 길이 없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엄연히 입구와 출구가 있다. 그 속에서 단계적인 진행이 있고, 순서에 따른 의도도 있으며, 일부 시적인 요소도 있다. 잘못된 우회로와 놀라움, 반전, 휴게소 등도 있다.

이 책을 통해 당신은 가까이에 있는 무언가 특별한 것을 찾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실제의 미니어처이자 소문자로 쓰는 고함이며, 병 안에 들어 있는 배이다. (본문 9p)

 

저자의 권유대로 (사실 모든 책에 대해 늘 그래왔지만) 순서대로 읽기 시작했다. 많은 언어가 실종되고 있지만 연인들은 꼭 필요할 때 쓸 말을 열 개 혹은 열두 개 정도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았고, 시인들 역시 '아침''식탁보''희망' 등의 말을 저장하였으며 목숨 걸고 진심으로 이것들을 지켜낼 준비가 되어있다는 [전염병]을 시작으로 어린 소녀 마샤가 욕조 안에서 비누와 색색의 새끼 오리들과 함께 몸을 담그고 있자니 자신의 작은 몸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물이 욕조 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아르키메데스의 실수], 우리를 담고 있는 여행 가방은 우리 자신을 가장 잘 함축해놓은 축소판이자 우리의 버릇과 기호, 의도, 살면서 잃고 얻는 것 등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요약해준다는 이야기 [여행 가방], 한 권 안에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 수록함으로써 성격에 따른 책 읽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경고], '이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라는 짧은 한 글귀만 적혀있음에도 묘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등 이 소설 속에 수록된 113편의 픽션들은 때로 난해하고, 때로는 공감을 주고 때로는 혼란을 주는 내용이었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말처럼 이 이야기들이 만들어 낸 미로 속에 갇혀있는 듯한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되어 저자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출구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조차도 어려웠다. 고백하건데, 나의 독서력으로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여행 가방도 우리처럼 늙어간다. 다크서클과 주름, 균열이 생긴다. 가방의 원래 재질은 단단하지만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약해진다. 한 승객이 가방을 분실한 대가로 아주 합당한 보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똑같은 가방을 받았다고 해도 절대 예전 것과 똑같을 수는 없다. (본문 47p)

 

 

분명한 것은 <<여기 용이 있다>>에는 결코 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용'은 무엇일까? 저자는 앞서 이 책 제목에 나온 용들은 수 세기 전부터 고대의 미완성 지도들 속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 책 제목에 나온 용들은 수 세기 전부터 고대의 미완성 지도들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지도들이 가리키는 세상이 끝나는 그곳에서 바로 지식이 생겨났다. 비축된 물이 다 떨어지기 전에 어디에서 배를 돌려야 하는지, 또는 배를 침몰시킬 최악의 협곡이 숨겨진 깊은 바다가 어디인지 그 지도 위에 주의 표시를 해 놓았다.

'여기 용이 있다'라고. (본문 6p)

 

 

 

갈 수 없는 그곳, 더 이상 모험심을 품지 못하게 하는 그곳, 우리의 지식이 끝나는 그곳에서 상상이 시작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은 항해자들이 위험 표지판을 보고 뱃길을 돌렸던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고로, 이 책의 제목은 세상만사의 신비한 생각의 중심에 깊게 다가가고 우리 자신과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픽션을 이용하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상상력의 개척지를 저자는 상징과 풍자로 뒤섞인 113편의 거대한 퍼즐로 채워냈다. 부족한 독서력으로 그 퍼즐의 완성품을 끝내 그려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누구도 가보지 못한 상상력의 개척지로의 안내를 기꺼이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가져볼 수 있었다. 난해하고 때로는 길을 잃은 듯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나에게 이 소설은 현실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제 독자들에게 이 페이지 사이사이에 오래된 지도 속의 용들이 있다는 것을 알린다. 이 책을 포함한 모든 책은 미개척지이자, 살아 있는 이야기들의 묘지이며, 상상과 두려움, 그리고 욕망으로의 초대, 우거진 숲, 열쇠로 잠긴 옷장, 야밤에 나서는 외출이다. 그러니 부디 이 책장을 조심히 펼치기 바란다. 여기 용이 있다. (본문 9p)

 

(이미지출처: '여기 용이 있다' 표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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