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철학 - 질문으로 시작하여 사유로 깊어지는 인문학 수업
함돈균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주변 사물은 우리가 흔히 일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사물이 어떤 추억과 얽혀져 있다면 그 사물은 추억을 떠올리는 매개체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사물에 대한 고찰을 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이나 해볼 수 있었을까? 도대체 평범한 사물을 보고 어떻게 철학을 논할 수 있는가 말이다. 문은 문이요, 거울은 거울이요, 계산기는 계산기일진대,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하자 나는 어느새 책 속에 푹 빠지고 말았다. 평범한 사물을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라는 놀라움에 더해진 역사와 문화의 맥락을 통한 저자의 철학적 성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도구로만 알고 있던 사물에 대해 작가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이런 사유를 하게 된 것일까? 저자는 사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물은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물리적 대상이지만, 시간·장소·상황에 따라, 또 누가 그것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체로 변한다. 사물은 인간과 삶의 의미를 포괄하는 '관계'의 매개물이기도 한 것이다. (본문 5p)

 

우리는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 때 흔히 집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보면, 우리가 의식하지 않았을 뿐, 문을 경계로 직장인에서 아빠로, 사회인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바꾸어지고 있었다. 또 한 발 더 나아가면 '문을 경계로 당신은 다른 세계에 들어서'(본문 97p)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삶의 의미를 담은 사물을 바라보는 저자의 예리하고도 기발한 사유다. 사물에 대한 고정적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펼쳐보이는 내용들에서 그만의 독특함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시적 직관과 철학적 성찰이 만난 사물에 대한 그의 성찰은 'ㄱ' 가로등을 시작으로 'ㅎ'의 후추통까지 88가지에 이른다.

 

어둠을 밝혀주는 한 줌의 빛인 가로등이 '어둠 속에 나타난 빛의 진정한 힘은 어둠을 전면적으로 제거하는 데 있는 게 아니며, 가로등의 역할은 빛이 사방의 어둠 속에서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예감하는 하는 것'이라는 철학적 사유에 철학자 플라톤이 쓴 <국가>에 어둠 속 동굴에 갇힌 죄수의 이야기가 더해지자 가로등은 그저 가로등이 아닌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가로등이 희망이 되고 세족식으로 화제가 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까지 더해지면 어둠과 더불어 나타나는 빛인 가로등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안심을 주며 희망을 필요로 하는 낮은 자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가로등은 그야말로 '신'이 된다.

 

어둠이 가능한 지상에 신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어떤 방식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서 가로등을 본다. 언뜻 거기에서 신의 실루엣을 본 듯도 하다. (본문 19p)

 

개인적으로 아주 인상적이었던 거울을 살펴보자. 어제의 나와 일주일 전의 나와 일 년 전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니 '같다'는 이미지 인식이 곧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인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거울은 나의 연속성을 확인시켜주는 소중한 도구라고 했지만, 10년 전 사진 얼굴과 오늘 아침 거울 속 얼굴이 다르듯 여러 사진 속에서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하고 있기에 '나의 연속성'과 '나의 같음'의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나의 현존(있음)'을 확인시키는 거울은, 실은 '나'라는 하나의 실체는 '없다'는 진실을 기만하는 도구(본문 22p)라고 저자는 사유한다.

 

많은 이들에게 순간의 파라다이스를 제공해주는 사물이었던 담배를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대가 된 것을 볼 때, 담배는 변하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라는 사실을 간단히 보여주고 있다는 이야기에서는 사물이 그저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우리의 고정적 관념을 깨뜨리는 좋은 예가 되어주고 있다. 부채를 통해 희망의 다른 면을 이야기하는 것은 또 어떤가. 부채가 원래 있던 바람을 부른 것이 아니라, 허공에 흔드는 내 손의 움직임(운동)으로 바람을 생겨나게 하는 것으로 바람은 내 자발성이 만든 '운동의 결과'라고 한다. 가만히 있을 때는 아무것도 없지만, 내가 움직이면 비로소 생겨나는 허공의 각성 같은 것이 바로 부채 바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희망과 연결지어 생각한 저자의 기발함을 보자. 우리가 희망이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물건처럼 어딘가에 놓여 있다는 착각을 하곤 하지만, 희망은 '아직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발적 의지를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공중의 부채 바람, 한 순간의 반짝이는 자기 각성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채를 보면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발적 의지를 매순간 잊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자가 좋아했던 젓가락,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행해오는 젓가락질은 둘이 있어야만 시작되는 '사람다움'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젓가락은 양쪽 바깥에서 '감싸듯이' 집는다. 젓가락은 양쪽이 각각 움직이지만 음식물을 퍼올리거나 긁거나 찌르기보다는, 같은 방향을 향해 바깥에서 감싸듯이 안으로 움직이며 음식물을 들어올린다. 바깥에서 감싸는 동선으로 음식물에 다다른 각각의 젓가락은 그때 '하나'가 되는데, 젓가락의 모임새도 둘이 모여 정확히 '사람 인(人)'자가 된다.

어쩌면 '사람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간다움'이라는 공장의 '인'은, 불균형한 둘이 각자 자기 동선을 작동시키고, 한 방향을 향해 감싸듯 움직이면서 비로소 사람[人] 형상을 하게 되는 '젓가락의 윤리'일 수도 있다. (본문 242p)

 

흔한 사물이었지만, 이 책에서 모든 사물은 철학이 된다. 그동안 주변에 있던 모든 흔한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나의 고정관념이 한 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기분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 세상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사물로 채워져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저 인간의 도구로만 존재하는 사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렇게 2013년부터 <매일경제>지에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 '사물의 철학'을 모아 꾸린 질문으로 시작하여 사유로 깊어지는 인문학 수업 <<사물의 철학>>은 흔한 일상의 사물에 대한 고정적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보여주고, 스스로 사유하도록 이끈다. 뻔한 사물에 대한 확고한 상식이 뒤집히는 순간,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 책을 읽는동안 쳇바퀴 돌아가듯 평범하고 지루하기만 했던 일상 속에 다른 시간의 통로가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출처: '사물의 철학' 표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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