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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읊조리다 - 삶의 빈칸을 채우는 그림하나 시하나
칠십 명의 시인 지음, 봉현 그림 / 세계사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케이블 방송에서 시를 읽다가 울던 홍은희 배우를 보게 되었다. 그녀가 지은 [사진]이라는 시에 공감하면서 문득 오랫동안 읽지 못했던 시가 읽고 싶어졌다. 짧은 글 속에서 느껴지는 위로와 공감이 그리워졌다. 그렇게해서 읽게 된 책이 바로 <<순간을 읊조리다>>다.
슬플 때, 외로울 때, 화나거나 속상할 때, 억울해서 울고 싶은 찰나에 단 한 줄의 짧은 글로도 마음을 위로받을 때가 있다. 많은 말을 담아 놓은 듯한 짧은 한 줄은 마치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렇게 나를 바라보곤 한다. 가끔은 힘들고 지칠 때 그렇게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시와 만나 위로받곤 했는데, 어느 새 그런 감정들이 찾아와도 시를 찾아볼 여력도 없이 마음에 담아두거나 삭히곤 했다. 사실 내 스스로가 힘들고 지쳐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시를 읽으면서 아, 내가 지금 위로받고 있구나,를 느끼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 듯 싶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진짜 문장들!을 만난 탓이다. 우연히 접하게 된 시집에서 뜻밖의 위로를 받으면서 나는 조금씩 차분해져갔다. 김행숙, 용택, 나희덕, 이연주, 윤동주, 정호승, 최승자, 황혜경 등 시대를 대표하는 칠십 명의 시인들이 읊조린 우리 삶의 순간을 붙잡은 감동적인 시가 수록된 <<순간을 읊조리다>>를 읽는 독자들 역시 나처럼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공항에서 쓸 편지 _문정희
여보, 일 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나 지금 결혼 안식년 휴가 떠나요
그날 우리 둘이 나란히 서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겠다고
혼인 서약을 한 후
여기까지 용케 잘 왔어요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고
아니 오아시스가 사막을 가졌던가요
아무튼 우리는 그 안에다 잔뿌리를 내리고
가지들도 제법 무성히 키웠어요
하지만, 일 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병사에게도 휴가가 있고
노동자에게도 휴식이 있잖아요
조용한 학자들조차도
재충전을 위해 안식년을 떠나듯이
이제 내가 나에게 안식년을 줍니다
여보, 일 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내가 나를 찾아가지고 올 테니까요 (본문 23p)
여자들은 아내, 엄마, 며느리, 딸 수많은 이름을 가지게 되지만, 정작 자신의 진짜 모습, 진짜 이름은 잊고 살게 된다. 누구의 엄마로 불리어지는 수십 년 세월동안 자신은 사라지고 없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하고, 위로받는 내용의 시들이 참 많았지만, 수많은 이름을 갖게 되면서 '진짜 나'가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는 중인 나는 이 시에 무척이나 공감하면서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보았다. 나 아닌 누구의 엄마와 아내로 살아가는 시간이 결코 나쁘거나 불행하지는 않지만 문득문득 온전한 '나'는 무엇이었던가를 떠올릴 때가 있었는데, 이 시를 읽다보니 공감과 위로가 동시에 밀려온다. 하지만 시만으로 공감하고 위로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시는 시화 또한 압권이었다. 여행가방을 들고 나갔지만 여자의 시선은 여전히 집에 머물고 있다. 결코 떠나지 못할 그녀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게 바로 우리네 주부들의 모습이 아닐런지. 에고...별 수 없으시군요, 하지만 그래서 더 위로받고 있는 건가봅니다, 나 혼자 중얼거려본다.
김경미 시인의 '고통을 달래는 순서'라는 제목을 가진 시가 있다. 그 시의 내용은 제목보다도 짧은 단 세글자인 '견딘다'. 다잡은 두 손이 '견딘다'라는 단 한 줄 속에 수많은 것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로인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견디게 된 듯 싶었다. 힘들고 아프고 슬프지만 우리는 견딘다. 힘들고 지치고 아프고 외롭지만 그래도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니 말이다.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_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도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본문 66,67p)
단어 _이이체
의연해져
불행은 잠시 동안만 긴 거야 (본문 100p)
내 마음은 한없이 바닥으로 꺼지고 있는데, 왜이러는지 나도 잘 모를 때가 있다. 헌데 이 시들은 왠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듯 나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토닥토닥, 괜찮아진다고. 토닥토닥, 이해한다고.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수많은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시인들은 가장 간결한 글로 우리를 위로하고, 공감해주고, 감싸주고, 달래주고 있었다. 이 시들 속에는 지금의 나, 예전의 나 모두가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시 한 편 한 편이 이다지도 소중한가보다.
낙화, 첫사랑 _김선우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본문 105p)
내 삶이 다른 누구와도 결코 다르지 않음을 느끼며, 나는 내가 잘 못된 길로 가고 있지 않음에 감사하게 된다. 아픈 것도, 외로운 것도, 고독한 것, 이 아픔들이 새싹이 되어 우리 몸 어느 구석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남아 줄테니 말이다. 힘들 때도, 기쁠 때도 함께하면 좋을 문장들은 아픔들이 새싹이 되어줄 자양분이 되어줄 터이다.
삶의 빈칸을 채우는 그림하나 시하나 <<순간을 읊조리다>>를 읽으면서 내 삶의 빈칸도 조금씩 채우는 법을 배우게 된다. 오랜만에 읽은 시 속에서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내 삶을 바라보게 되어 참 좋았다.
(이미지출처: '순간을 읊조리다' 본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