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 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1944년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쓴 작품 <<봄에 나는 없었다>>는 작가 스스로 완벽하게 만족하는 작품이자 꼭 쓰고 싶었던 이야기로, 수년 동안 구상한 후 삼일 만에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녀가 필명을 사용한 것은 추리소설에서 벗어나 새로이 도전한 심리 서스펜스에 대한 독자들의 혼동을 우려했기 때문인데, 오십 년 가까이 비밀에 부쳐졌었다고 한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작품이 추리 소설이 '아닌' 것에 대한 서운함이 있는 것을 보면 그녀의 우려를 이해할 수 있을 듯 싶다. 놀라운 것은 '인간 내면의 초상을 그린 보석 같은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은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듯이, 추리 소설이 아닌 심리 서스펜스로서의 애거사 크리스티의 역량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추리 소설의 여왕으로서의 애거사 크리스티가 아닌 또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 그녀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무척 반가운 일이었으리라. 그녀는 '매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여성의 고독, 사랑의 오만함과 잔인함에 대한 특유의 날카로운 성찰을 담은 여섯 편의 장편을 발표했고, 그 중 <<봄에 나는 없었다>>는 중년의 여인인 조앤 스쿠다모어가 자기기만적인 삶을 깨닫고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그린 작품(표지 中)이다.

 

막내딸 바버라의 갑작스러운 발병 소식에 바그다드에 갔던 조앤은 모든 일을 계획해서 순조롭게 돌아가게 해 놓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의 기차역 숙소 식당에서 세인트 앤 고등학교에 함께 다녔던 블란치 해거드를 만나게 된다. 조앤은 학창시절에는 누구랄 것 없이 열광했던 블란치가 볼품없이 마르고 부산하고 너저분하고 늙수그레한 여자가 된 것을 보며 그녀의 삶이 불행했음을 짐작하며 자신의 모습에 우쭐해지지만, 오히려 조앤은 블란치로부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듯한 뜻밖의 말들을 듣게 된다.

 

"바버라는 걱정하지 마. 이젠 괜찮을 거야. 내가 장담해. 윌리엄 레이는 좋은 사람이야, 너도 알겠지만. 아이도 있고, 모든 상황도 그러니 말이지. 바버라가 아주 젊고 이곳 생활이 그래서 그랬을 뿐이야. 젊은 여자의 머릿속은 종종 그렇게 된다니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런 게 바로 학벌 의식이지!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것. 넌 정말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본문 26p)

 

자동차와 기차를 이용해 돌아가려던 그녀는 기차를 놓친 탓에 사막의 기차역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블란치의 의미심장했던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녀에게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게 한다. 반듯하게 잘 자란 아이들, 자상하고 유능한 변호사 남편, 여유로운 삶을 누리며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던 조앤은 과거 속에서 남편이 원하던 농부가 아닌 변호사가 되기를 권했던 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남편의 외도와 유부남과의 결혼하려는 딸, 외톨이가 되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완벽하다고 느끼던 자신의 삶 속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과 마주하면서 진실 속에 가려진 허울뿐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조앤은 과거를 의심하게 된다. 그런 의심 속에서 그녀는 끝없이 불안해한다.

 

도와주세요, 하느님....저는 미쳐가고 있습니다...제가 미치지 않게 도와주세요...생각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세요....고요....고요와 태양....그리고 심장 뛰는 소리...신은 날 버리셨어....신은 날 돕지 않으시지...난 외톨이야. 완전히 외톨이야...무시무시한 고요.....지독한 외로움....가여운 조앤 스쿠다모어....멍청이, 헛똑똑이, 사기 덩어리 조앤 스쿠다모어.... (본문 207p)

 

이 책은 이렇게 그녀가 외면했던 진실 속에서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추락하는 과정이 긴장감있게 기록되고 있다. 그녀를 통해 우리는 덮어버리고 싶었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관대하고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포장하려 한다. 그러나 나의 이런 모습이 타인에게도 포장된 모습 그대로 보여지는 것은 아닐게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 진실을 받아들이고 바꿔나갈 용기를 가지고 있을까? 여기서 애거서 크리스티는 조앤의 결말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끝없이 추락하면서 자신의 진실된 모습과 마주했던 조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간 후의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모습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봄에 나는 없었다>>은 자기만족에 빠진 딱한 영혼인 조앤이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되고 진실을 알게 되면서 불안해하는 심리묘사가 압권인 작품이다. 조금은 지루한 진행도 있었으나 마지막 결론이 주는 반전이 놀라운 작품이기도 하다. 불편한 진실 속에서 끝없이 추락해가는 조앤의 모습은 우리가 감추고 외면하며 스스로 포장해왔던 나 스스로의 모습과 닮아있다. 조앤은 아내이자 엄마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마주한 인간의 본성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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