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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동창생 - 열아홉, 소년의 약속
윤이경 지음, 김수영 각본, 오동진 인터뷰.글 / 북폴리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연예뉴스를 통해서 빅뱅의 멤버 탑이 영화의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수 출신의 연기자에 대한 약간의 편견이 있었던 터라 그다지 흥미롭게 보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주말,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영화 <동창생>에 대해 소개하던 중 가수 탑이 아닌 배우 최승현을 보게 되었다. 살아있는 눈빛이 캐릭터와 너무도 잘 어울렸는데, 특히 내가 좋아하는 스토리, 동생을 위한 오빠의 사투가 감성을 자극했고 이 호기심은 <<소설 동창생>>으로 이어졌다. 영화를 보고 싶다는 딸래미와 함께 읽기 위해 주문하고 책을 받고보니 꺄~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배우로서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표지 삽화가 마음에 쏙 든다. 그렇게 배우로서의 최승현에 대한 호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다보면 어느 새 강대호 아니 리명훈의 캐릭터에 빠져들게 된다. 북의 세력 다툼, 공작원, 간첩이라는 전반적인 스토리가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얼핏 비슷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전혀 다른 감성으로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묵직하게 다가오는 슬픔이 매력적이었다.
명훈아, 혜인아....미안하다...명훈아...니 동생 잘 지켜야 한다... (본문 16p)
쓰러진 영호의 손에는 영화와 그의 아들 명훈, 그리고 딸 혜인이 찍힌 가족사진이 쥐어져 있었다.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텨왔던 모든 일들을 뒤로한 채 이제 고향으로 갈 일만 남았건만, 영호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2년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영호를 대신해 명훈이 서울에 오게 되었다. 누군가는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남한으로 내려오지만, 명훈은 그저 '살고 싶어서' 내려왔다. 아버지가 배신자로 낙인 찍히자, 어머니는 총살을 당했고 명훈과 혜인은 수용시설에서 서로를 의지한 채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8살 밖에 되지 않은 혜인을 열세 살에 불과한 명훈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 명훈의 모습을 지켜보던 정찰국 소속 대좌 문상철은 명훈에게 동생 리혜인과 살아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혜인을 데리고 지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말에 명훈은 사냥꾼이 쳐놓은 올무에 걸려버린다. 혜인을 지키기 위해 명훈은 그렇게 기술자가 되어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탈북자 강대호가 된 명훈은 탈북자들에게 제2의 고향이라 불리는 하나원에서 생활하다가 약국을 운영하는 한 중년 부부에게 위탁된다. 그 중년부부는 오랜 세월 정찰국 8전단의 고정 간첩으로 안전가옥을 운영하면서 은밀하게 마약 거래를 통해 비밀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평범한 열아홉 살의 고등학생 강대호가 되어 학교에 가게 된 명훈은 왕따를 당하고 있는 혜인과 짝이 된다. 동생 혜인과 같은 이름인데다 왕따를 당하고 있는 혜인의 처지에 명훈은 혜인의 편에 서게 되고 둘이 친구가 된다.
명훈은 교복을 입는 순간 너무도 빠르게 그 나이 또래의 고등학생으로 돌아갔다. 잔혹하리만큼 철저한 훈련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명훈의 피부에 스며든 것들. 피부가 교복을 감지한 순간 되살아나는 습관들. 선생님과 동급생들, 분필 냄새와 소음들, 수업 시작 종과 청소, 벌칙과 훈계 같은 것들. 떠나왔던 시간 속으로 명훈을 쭈뼛쭈뼛 걸어 들어갔다. (본문 51p)
그렇게 평범한 학교 생활을 보내던 명훈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건강 악화 이후에 생긴 세력 다툼에 의한 명령을 하달받고 노동당 35호실 공작원들을 사살하기 시작한다. 이 대리전으로 국정원 요원인 정민과 동섭은 기술자를 쫓게 되고 명훈은 지키고 싶은 단 하나, 혜인을 위해 모든 것을 걸게 된다. 그렇게 8전단과 35호실의 다툼 속에 명훈은 끝까지 살아남아 북으로 돌아가려하지만, '북으로 돌아간 기술자는 없다'는 말처럼 결국 죽음 앞에 내몰리게 된다.
"오빠랑 무슨 사입니까?"
"무슨 사이?"
무슨 사이라고 말할까...
"우리 그냥 학교 친구야!"
"동창이란 말입니까?"
그래, 동창생....서로가 서로에게 세상 하나밖에 없는 친구. (본문 284p)
아버지가 죽고, 기술자로 만들어지게 되고, 사람을 죽이게 된 명훈. 이념이나 신념이 아닌, 그저 죽이지 않는다는 약속에 미끼가 되어 필사적으로 달려든 명훈은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그는 친구 혜인 옆에 서면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다. 선생님의 질문에 쭈뼛해지며, 혜인이 건네는 노트를 훔쳐보며 대답하는 우리 아이들과 같은. 사람을 죽이는 기술자가 되었지만, 근본까지 달라질 수 없는 어린 소년. 그의 어깨에 짊어진 세상은 너무도 무거웠다.
<<동창생>>은 세력 다툼 속에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미끼가 될 수 밖에 없는 어린 기술자의 고뇌를 그려냈으며 그 속에 윗선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용당하는 남한이나 북한의 현실도 함께 녹아내고 있었다.
힘 있는 자들을 낚는 미끼는 돈이나 권력이었다. 하지만 작고 힘없는 저들에겐 그저 죽이지 않는다는 약속이 미끼가 될 수 있엇다. 그것만으로도 저들은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돈이나 권력은 선택일 수 있지만 목숨은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그걸 미끼로 쓸 때, 인간은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본문 257p)
<<소설 동창생>>을 읽으면서 울컥하는 감정으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장면들이 있었다. 어린 소년이 감내해야 할 세상의 무게와 말보다는 몸으로 겪는 것이 더 익숙한 명훈의 고통 때문에, 동생 혜인에게 건네는 '오빠야'라는 말 한마디에, 오빠에게 주기 위해 직접 만든 빨간 목도리를 더워도 풀지 않는 혜인이 때문에, 그리고 서로 다른 이념과 신념으로 희생되어가는 작고 힘없는 이들 때문에.
간첩, 기술자, 공작원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명훈은 동창생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열아홉 살 소년일 뿐이었다. 그 소년의 고뇌가 담겨진 배우 최승현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사진출처: '소설 동창생' 표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