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 개정판
김정현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버지>>를 처음 읽은 것은 17여년 전이었다. 1996년 즈음에 출간되었던 작품이었으니 아마 그 때가 맞지 싶다. 나름 혼란스러웠던 십대를 보내고 이십 대에 들어선 지 얼마되지 않았던 그 때, 이 책은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무능하고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찾지 못했던 부성애를 느끼게 했고,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던 작품이었다.

그 때 당시 작품에 대한 큰 호응에 힘입어 배우 박근형 주연으로 영화로 제작된 바 있었는데, 사실 영화는 소설에 비하면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흐른 탓에 이 작품에 대해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2012년 자음과모음에서 재출간된 사실을 얼마 전에 인터넷서점을 둘러보다가 알게 되었다. 문득 그 당시 내가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감정들이 솟구치면서 다시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른만큼 나의 아버지는 더 나이가 드셨고, 알츠하이머와 파킨슨 병을 앓게 되면서 자식들과 떨어져 홀로 요양병원에 계신다는 지금의 상황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더욱 간절하게 했는지 모른다. 친정 아버지는 딸인 나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렇게 예뻐하시던 손주도 기억하지 못했다. 뒤늦게 딸인 나를 알아보셨다는 사실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온 터라 이 책이 눈에 밟혀 다시 읽어보게 되었는데, 처음 읽어봤던 당시보다 더더욱 나를 슬프게 했으며 더더욱 나를 아프게 했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의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묵직함이 나를 짖눌렀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내 아버지와 진배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힘겹게 했나보다.

 

이름 없는 지방대학 늦깍이 1년생의 인간승리적 행정고시 합격에도 불구하고 동문, 동향, 혈연 그리고 의도적으로 이어지는 인맥 어느 울타리에도 얽혀 들지 못했던, 야심에 날뛰고 그것을 위해 연을 찾아 쫓아다닐 성격 조차 되지 못했던 정수는 동기들에 뒤처지면서 승진에 누락되고 한직에 맴돌기만 했다. 누구보다 맑고 아름다웠던 아내 영신과의 행복했던 시절은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하게 되면서 어느 덧 각방을 쓰기에 이르렀고, 언제나 이른 출근, 늦은 귀가,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의 정수와 아이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멀어졌다. 대개의 동년배들이 겪는 증상인 소화불량, 식욕부진, 체중감소, 무기력, 위경련 같은 복부통증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정수는 친구인 남박(남박사)로부터 췌장암진단을 받고 앞으로 남은 인생이 5개월 뿐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정수는 죽음에 대한 미움, 분노, 거부의 욕망, 삶에 대한 체념, 아쉬움, 남은 시간에 대한 초조, 인생에 대한 허탈, 허무....등으로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정수는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을 술에 의지하게 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가족은 술에 쩔어있는 정수의 모습에 경원해하는데, 딸 지원은 그런 아버지에게 실망과 분노늘 담은 편지를 보낸다. 점점 외로워져가는 정수는 일식접에서 만난 소령이라는 여인와 사랑하게 되면서 허전한 마음을 기대게 된다. 정수의 인생 어느 부분을 뒤져도 가슴속 가장 큰 자리에 그 아내와 자식을 비워 둔 적이 한 순간도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남박은 정수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리게 되고, 가족은 뒤늦게 정수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을 깨닫게 된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남은 가족에 대한 걱정과 안위만을 생각하는 정수는 끝내 가족을 위해 마지막 결단을 내리게 된다.

 

"자존심이라고? 내게 남은 자존심이 어디 있는데? 이미 자네에게 죽음을 사정할 때부터 난 다 무너진 거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니야, 사랑해. 자넨 몰라, 더는 괴롭힐 수 없어. 그만 갈래. 그게 사랑하는 마지막 방법이야. 내가 남아 있어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이제 아내 앞에서, 자식 앞에서, 그토록 사랑하는 지원이, 희원이 앞에서 이렇게 무릎 꿇고 애원할 일만 남았어...아내는 힘들게 밤을 지새며 쓰러지고, 자식 또한 편히 한 번 눕지 못하는데...나만 약에 취해 편안히 드러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뻔뻔함 또한 견딜 수 없네." (본문 301,302p)

 

표현에 서툰 우리네 아버지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에, 가족 사이에서 늘 외톨이가 되어간다. 언젠가 읽어본 인터넷 기사에서 현 사회를 살아가는 40~50대의 아버지들은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혼자가 되어가고 있다고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무뚝뚝함 속에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없이 깊고 넓게 자리잡고 있음에도 말이다. 자식을 위해 밤낮으로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서 투쟁을 벌어야 했던 아버지, 그러나 편히 쉬고 싶은 가정에서도 그들은 홀로 외로움을 느껴야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의 아내, 그리고 자녀들에게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따져 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야말로 공허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그 자신에게만 미루지 못할 무엇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그들의 지나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비단 정수뿐만 아니라 남 박사 자신도 그러한지 모른다. 또 대부분의 남편, 아버지들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본문 140p)

 

<<아버지>>는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가족들 안위를 걱정한 한 중년의 남성과 그것을 알지 못했던 가족들의 화해와 사랑을 담아낸 지금 우리 시대의 아버지의 자화상을 담아냈다. 누군가로부터 정을 느끼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살아 있음을 느끼는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 정수를 통한 심리 묘사를 통해 너무도 절절히 그려졌다. 아버지를 향한 딸의 경원과 분노에도 그것이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아버지들의 넓고도 깊은 마음이, 사람 냄새가 너무도 그리운 우리 아버지들의 마음이 정수를 통해 전해진다. 지금쯤 홀로 병원에서 지난날을 그리워하고 있을 친정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여전히 내 가슴을 맴돌고 있다. 아버지를 향한 지원의 편지 속에 내 마음을 담은 듯한 글귀가 있어 옮겨본다. 그 마음이 홀로 계실 아버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아빠, 얼마나 서운하셨어요, 얼마나 노여우셨어요.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셨어요? 얼마나 허무하셨어요?

아빠를 사랑해요.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아빠를 사랑해요. (본문 211,2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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