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박주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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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대학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갔더라도, 그곳이 내게 무얼 해줄 거라고, 거기만 통과해 나가면 무언가 또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본문 19,20p)

 

온갖 경쟁을 헤치고 수능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여 대학에 들어가고나면 인생은 탄탄대로로 펼쳐질 줄 알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대학 입학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무작정 달려 대학교에 발을 들여놓지만, 정작 인생은 그 다음부터였다. 대학에 가면 뭐든 할 수 있다, 라는 사탕발림은 옛말, 이제는 취업란을 위해 또 무작정 달려야만 한다. 이렇게 열심히 달리지만 뜻대로 안되는 일은 너무도 많다. 그러다 문득 내가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또한 허망한 일이다. 얼마전 모 프로그램에서 대학생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한 여대생의 인터뷰는 현 사회의 청춘들이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있는 질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 스물일곱 살의 백수 윤승아가 있다.

 

그녀는 실생활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걸 전공하고 사 년 전 대학을 졸업한 후 대기업에 입사했으나 일 년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잠깐잠깐 아주 별 볼 일 없는, 별 볼 일 없기에 더욱 견디기 힘든 일들을 하다가 지금은 아주 완전히 푹 쉬고 있는, 한마디로 백수다. 승아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이 살아가는 우울한 청춘이다.

날마다 찾아드는 다른 날은 사 년 꼬박 채워 다닌 대학이 아무 의미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 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진열대 위에서 마냥 기다리는 청춘이지만, 그래도 세상 사람들이 붙여준 가격으로는 절대 자신을 팔지 않을 거라는 일말의 자존심은 있다.

 

학창시절 줄곧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큰 오빠는 정작 사회에 나와서는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큰 오빠와는 반대편으로 나아가 학교 성적도 엉망이었고, 툭하면 싸움질에 정서가 불안하다고 선생님이 부모님을 학교로 부르게 했던 작은 오빠는 지금 오히려 엄마의 기준으로 한다면 엄마를 창피하지 않게 살아주고 있는 사람이다. 학교와 사회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던 게다. 하지만 승아는 자신이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그런 일이 과연 있기나 한 건지, 내가 남들만큼 할 수 있는 게 있는지 의문이다. 그렇게 승아는 희망을 잃어버린 듯한 우울한 이십대를 자포자기 상태로 보내고 있었다.

 

스물일곱이나 되어서 내가 잘하는 건 뭘까를 고민해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그걸로 돈을 왕창 벌거나 어마어마하게 유명해진다면 모를까, 그게 이전에 내가 하던 일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잘하는 일을 한다고 즐거우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좋아하는 야구를 해서 먹고살 만큼 돈을 버는 사람은 야구를 할 줄 아는 사람 가운데 지극히 극소수에 지나질 않는다는 얘기이다.

희망하고 애쓰고 실패하고 절망하고 다시 도전하고, 그렇게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나는 노래를 부른다. 나는 개미랑은 거리가 먼 베짱이. 나는 비관적인 베짱이. 자존심이 있으니 겨울이 오면 개미집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냥 얼어 죽고말 베짱이. (본문 65,66p)

 

엄마의 성화로 승아와 면담을 요청한 작은오빠는 좋아하는 것, 잘하는 걸 묻지만, 승아는 대답하지 못한다.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승아는 겉으로 태연한 체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스스로를 힘겹게 붙들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서로 비밀없는 친구 효림이도 마찬가지다. 승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구석에 자신을 구겨두는 것에 점점 더 익숙해져가는 것이, 이렇게 형편없는 우리가 정말 우리일까봐 무섭고 두려워한다.

 

효림도 나도 희망이라는 것에 지쳐가고 있다. 점점 더 약해지고 있고. 다만 버티기 위해서 자신을 다독거리는 것만으로 온종일 진이 빠진다. 그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삶 속에 지금 우리가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 105p)

 

꼭 뭘 해야 한다면, 만약 그래야 한다면 글이라고 써 볼까, 생각하던 승아는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몸과 마음을 움직여나간다. 물론 이 싸움에서 이길 확률은 몹시 희박하지만 그대로 싸워야 한다면 철저히 자신의 방식대로 싸우고, 이길 수 없다 해도 절대 사회의 기준에 맞춘 방식에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오기도 생겨난다. 불안하기만 한 희망이 사그라들까 걱정되지만 그녀는 무수히 탈락하고 거절당하고 거부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그럼에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아니 꿈을, 그리고 삶을 각오한다.

 

우리는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아직 찾고 있다. (본문 180p)

 

어린 시절 책을 읽는 큰 오빠 옆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던 승아는 이제 소설을 쓰면서 달라질 것이며, 자신 안의 가능성을 믿기 시작한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승아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스물일곱의 우울한 청춘, 승아에게 세상은 기회도 주지 않았고,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따져보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기회를 거두어가버리곤 했다. 승아의 이런 절망은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절망적인 심정을 너무도 잘 묘사하고 있다. 너무도 짧은 청춘의 유통기한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불안한 심정이 승아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무언가를 찾고, 꿈을 그리고 삶을 각오하고 살아가려는 승아의 변화되어가는 심정 속에서 청춘들은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위로받고 있게 될 것이다. 꼭 뭘 해야 한다면, 만약 그래야 한다면, 당신을 무엇을 해보겠는가? 우울증하고 무기력한 당신에게 딱 한 번이라도 이 질문을 던져보길 바란다. 그것이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출입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승아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우리는 젊고 아직도 못 해본 일이 많다. 분명한 것은 내가 오로지 내 힘만으로 해낼 수 있는 것, 그리고 기회란 것이 주어질 때 최선을 다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또는 행운이랄 것이 따라주어야 할 것들, 그 모든 것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1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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