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 - 위기의 순간을 사는 철학자들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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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었던가. 우연히 SBS에서 방영하는 시사프로그램 <최후의 제국>을 시청한 바 있다. 총 4부작으로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최적의 시스템이라 불렸던 자본주의는 왜 이렇게도 많은 부작용을 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였고, 격변의 시대에 던지는 '이제 인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경고를 보냈다. 어디 자본주의 뿐일까? 정치, 사회이념 등도 위기에 봉착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벌어지고 있는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류는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저자 이택광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철학자들에게 묻고 있다.

 

 

이들을 호명해서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은 이 세계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유였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을 종합해볼 수 있다면 훨씬 입체적인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이론가에 대한 평가도 물어봤다. 단순한 호사 취미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각자의 입장을 들어보고 맥락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철학은 실패에 대한 사유다. 따라서 찰학은 또다시 실패할지언정 다시 시도하기를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자들이 경제학자들과 다른 점을 여기서 짚어낼 수 있다. 자본주의가 실패하는 바로 그 위기의 순간에 철학은 새로운 체계를 사유한다. 위기의 순간을 사는 것이야말로 철학자의 본질이자 사명이라는 것이 이 책에 실린 철학자들 사이에 합의되어 있는 명제다. (본문 9~11p)

 

이 책은 '철학자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약도'와 '철학자들을 만나다'라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소개한다.

'철학자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약도'는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왜 프랑스 철학인가?, '정치적인 것'의 계보학, 영국의 신좌파, 이탈리아적인 차이, 철학과 아시아를 통해 저자의 이론, 사유를 만날 수 있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낯설지만 흥미진진한 이론의 콜로세움으로 들어서게 된다. (본문 24p)

 

상대적으로 침묵에 빠진 한국의 지식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하대학교 철학과 김진석 교수는 언젠가 한국은 '이론 생산'에 실패한 사회라고 지적하면서 이론이 아니라 다른 실천의 맥락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바로 이런 실패의 지점에 세계사상의 흐름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이론 생산의 근거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을 굳이 '한국적'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여하튼 김진석 교수가 예측했던 그 지점보다 세계사상사의 지도가 훨씬 확장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흥미진진한 전환의 시기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본문 59p)

 


이어 '철학자들을 만나다'에서는 저자가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지그문트 바우만, 가야트리 스피박, 피터 싱어, 사이먼 크리츨리, 그렉 램버트, 알레르토 토스카노, 제이슨 바커 등 아홉 명의 철학자들과 각기 나눈 인터뷰의 내용을 엮었다. 경제적 발전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지적인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 죽음이 운위되는 시절에 민주주의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을 주장했던 자크 랑시에르의 현 상황의 입장, 현재 우리는 정치적 공백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으며, 옛날 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새로운 방식들도 마지못해 미적지근하게 시도되고 있을 뿐이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 파산이라면 새로운 방식들은 이 파산의 기회를 대체한다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말하고 있다.

 

단지 자신들의 집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일상적인 업무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 거리로 내려와 그곳에 자리 잡을 때, 그리고 두려움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권력과 맞서기를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을 때, 침묵하던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할 때 기존 권력의 권위는 발가벗겨진다. (본문 101,102p)

 

내가 한국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당신이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또는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책임을 지는 것은 필연이다. 설령 책임지는 것을 거부하더라도 책임은 언제나 강렬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당신의 선택의 결과를 주의깊게 고려하고 당신 자신과 당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면밀하게 따져본 뒤에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그 선택이 무엇인지, 또한 그 선택이 초래할 문제들에 대해 최대한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려울지라도 그 노력을 통해 선택의 결과를 평가하고 추후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본문 153p)

 

민주주의적인 직관을 배양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교육자의 걸을 걸으며 주력하는 가야트리 스피박은 인터넷을 총체성과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SNS는 해악이 가지 않는 선에서 인상적인 속도를 발휘하는 까닭에 이 기술에 따른 결과는 독이면서도 약임을 이야기한다. 호혜적인 관계를 위해 협동하고 사회 전체를 위한 최선을 추구해야 하며, 인간 본성과 조화를 이룬 정치체제가 필요하다는 피터 싱어, 정치라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는 윤리적 확신에서 출발한다는 사이먼 크리츨리는 실망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이야기한다. 아시아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한국은 다른 근대성의 차원이라는 점에서 서구에 말해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그렉 램버트, 자유주의 정치학은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광신주의를 이용한다고 말하는 알베르토 토스카노는 우리에게 필요한 생각은 '다른 세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이 안에서 내재적인 것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진리는 훨씬 더 도전적임을 이야기하는 제이슨 바커는 투쟁은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하겠지만 싸움은 중요한데 이는 미래에 더 큰 정치적 도전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임을 이야기한다. 죽어버린 자유민주주의 대신 젊은이들이 새로운 정치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도처에 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붕괴에 직면한다면 붕괴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 지구적 경제가 균형을 유지하는 한 앞으로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붕괴 위기를 맞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자본주의는 언제가 위기 상태다. 오늘날 그 차이는 규모이지 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본문 228p)

 

위기의 순간에 철학은 새로운 체계를 사유하고, 다른 점을 짚어낸다. 이에 위기의 순간을 사는 것이야말로 철학자의 본질이자 사명이라는 명제 속에서 풀어낸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또다시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도하기를 요청한다.

사실 철학은 선호하는 장르가 아닌 탓에 책을 읽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흥미로웠던 것은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인 탓이리라. 편독이 심한 나로서는 새로운 장르를 경험해보고, 무지했던 분야에 대한 새로운 앎에 대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앞서 언급했던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고 의문을 가졌던 부분을 자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작품이라 하겠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 한 것 사이에서 비로소 사유의 혁명은 시작된다. 이 경계의 혁명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 들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위기의 순간을 사는 철학자들은 답을 제시한다기보다 우리 자신에게 그 답을 고민해보도록 주문한다. (본문 11p)

 

(사진출처: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표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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