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번지 파란 무덤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세월을 살고 죽은 껍질을 둘러쓰고, 다시 또 한 세월을 살고 죽은 껍찔을 둘러쓴다. 매시간 세상과 접한 가장자리의 감각만 남겨두고 온통 죽은 껍질들로 에워싸이고 또 에워싸여 사는 오래된 나무, 그 나무가 죽어 다른 무엇이 되고, 그 무엇이 또 다시 오랜 시간을 거쳐 변한 초자연적인 존재, 우리는 그것을 도깨비라고 부른다. (본문 350p)

 

책 제목 <<404번지 파란 무덤>>은 호기심을 끄는 작품이었는데, 제목과 표지 삽화만으로 뱀파이어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왠지 '뱀파이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은 캐릭터지만 주인공 공윤후는 엄연한 '도깨비'다. 보통 도깨비 이야기에 등장하는 도깨비들의 모습은 무섭거나 우스꽝스럽게 생긴 경우(이를테면 키가 작거나 뚱뚱하거나 거대하거나)가 다반사인데 반해, 이 책에 등장하는 도깨비 공윤후는 책 표지처럼 참~잘생겼다. 이건 뱀파이어와 도깨비에 대한 엄연한 도발(?)이지만, 꽤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뭔지는 내 이름으로 알 수 있지. 공윤후. 어디에도 없는 것인 '공', 있지만 없는 날인 '윤', 얼마나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시간인 '후'. " (본문 25p)

 

갸름하게 잘 빠진 턱, 왼쪽 눈썹 끝에 은빛 이슬처럼 맺혀 있는 금속 피어싱, 왼쪽 귓볼과 연골에 알알이 박힌 희고 푸른 옥들, 그믐달 같은 입매 그리고 한여름에도 햇빛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파란 재킷을 입은 남자. 그가 바로 공윤후다. 공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슬픈 여자들은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외로운 남자들에게는 사랑을 이어주는 마술을 부린다는 것이다.

신경섬유종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자살을 결심하고, 태어나서 꽃 같은 거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자신을 위해 파란 장미를 구입하고 건물 옥상에 들어섰다. 하지만 자살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공이 나타났고, 여자 얼굴에 매달려 있던 육중하고 단단한 살덩어리를 떼버렸다. 마치 혹부리 영감의 혹을 떼어가듯이. 눈물을 흘리는 여자 앞에서 나타나 행복을 주는 남자, 그가 바로 공이다.

 

미용사인 병구는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민혜를 짝사랑한다. 155센티미터의 작은 키에 연애 같은 건 해본 적 없던 병구는 우연히 공윤후의 마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사는 게 너무 외로워 뭐라도 의지하고 싶었던 병구는 공윤후에게 민혜와의 사랑을 부탁하기 위해 윤후를 찾아나선다. 공윤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검색을 하던 병구는 '공의 모든 것'이라는 블로그를 알게 되고 공윤후 옆에서 조수처럼 일하던 이순옥의 인터뷰를 녹취한 기사를 보게 된다. 공윤후를 찾아 그의 주소지 도개산 404번지인 공동묘지로 찾아가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그를 만나게 되지만, 병구는 블로그의 주인인 닉네임 롬롬을 통해 윤후와 민혜의 정체를 알게 되고 고민에 빠진다.

 

"너 좋을 대로 해. 인간은 선택을 할 수 있어서 인간인 거야. 혼자가 무서우면 둘을, 둘이 무서우면 혼자를 택하는 거야. 하나는 불행, 둘은 다행이라지만, 어느 쪽이든 거기엔 반드시 대가가 따르지." (본문 158p)

 

도개산 입구 마을에 사는 산하는 엄마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지만 끝내 엄마의 손을 잡아보지 못했다. 엄마는 명이를 키우고 교통사고로 병원에 누워 있는 동하를 돌보러 다니는 것만으로 늘 피곤했으며 그리움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탓이다. 산하는 엄마가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손을 잡아줬으면 소망했고 이제는 누구의 손이라도 잡고 싶었다. 결국 산하는 엄마 대신 마을로 이사 온 프란츠의 손을 잡고야 만다. 명이는 피부가 불그레한 더벅머리 사내아이가 반팔 티와 반바지 차림으로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큰오빠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한 눈에 그 아이가 오래전에 실종된, 그래서 이미 사망신고가 된 오빠임을 알았다.

 

죽은 언니의 영혼과 살고 있는 아완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동네 베이커리에 손님이 찾아온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재킷의 안감과 똑같은 천에 쓴 편지를 돌려달라고 한다. 아완은 언니가 죽은 후 쪽빛 천 조각을 발견하고 편지에 적힌 공랑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공의 모든 것에 집착하는 룸룸의 블로그에 들어가게 되고, 룸룸을 통해 조만간 공윤후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아완은 룸룸의 지시대로 윤후와의 만남을 지속하게 되는데, 공은 과거의 연인이었던 허아요와 닮은 아완에게 끌린다.

 

<<404번지 파란 무덤>>은 인간들과의 각각의 에피소드와 활과 공윤후와의 이야기가 중첩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각 장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지만 실은 그 모든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조각조각의 퍼즐들이 점차 완성되어가는 구성들이 페이지를 넘길수록 더욱 흥미로워진다.

 사람처럼 오직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하는 도깨비, 그도 사람처럼 아요의 소유로 살았던 행복했던 한 생의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전래동화에 나오는 도깨비를 소재로 이렇게 참신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상상력이 참 놀랍다. 더군다나 100년도 넘는 시간을 행복했던 아요와의 기억으로 살아가며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는 도깨비라니. 로맨스 소설의 소재의 다양화라고 해야 할까? 참신하고 재미있었다. 사실 재미있게만 읽는 탓에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읽는 내내 재미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게는 좋았던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