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구병모 작가의 작품은 <위저드 베이커리><피그말리온 아이들>을 통해서 이미 접한 바 있는데, 참신한 소재가 모두 흥미로운 작품이었던 터라 작가의 이름은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 탓에 <<파과>>는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갖고 읽어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고, 이 또한 참신한 소재라 읽는내내 책에 푹 빠져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다보면 으레 작가의 말에 주목하게 되는데, 60대 여성 킬러의 고독하면서 아름답고, 잔인하면서 슬픈 이야기 <<파과>>가 냉장고 속 한 개의 과일에서 비롯되었다는 글귀를 보며 작가의 상상력의 넓이와 깊이 등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이야기는 냉장고 속 한 개의 과일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하게는 한때 과일이었던 것. 수명이 다한 것, 분해되어 형태와 본질을 잃고 일부 흔적만이 자기가 왕년에는 그 무엇 또는 그 누구였음을 강력히 그러나 사뭇 안쓰럽게 주장하는 유기화합물에 대한 시선의 발아는. (본문 334p)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 <<파과>>가 뜻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지레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의미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면 오산일 것이다. 사실, 작가의 '대출혈 자폭 서비스'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그런 짧은 소견만으로 이 책을 이해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단순한 破果 라 생각하고 읽는다해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었겠지만 말이다.

<<파과>>는 예순다섯의 청부살인업자인 노부인 조각(爪角)이 주인공이다. 사람들이 간주하는 바람직하고 교양 있으며 존경받을 만한 연장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녀지만 직업이 킬러라는 점만으로도 그녀는 결코 평균치가 아니다. 업계에서는 대모로 불리는 조각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가난한 집의 둘째 딸로 태어나 친척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다 갈 곳 없이 내쳐진 15살에 '류'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이후 류의 죽음 뒤에도 이 일을 계속 한 이유는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으며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게다.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어진 지금, 그녀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녀는 방역작업 중 실수를 저지르게 되지만 다행스럽게도 일은 무사히 맞쳤으되 큰 상처를 입는다. 40여 년을 이어온 방역의 개인사에 치명적인 오점이었고 그녀는 서둘러 자신들를 봐주는 보건소의 장박사를 찾아갔다가 강박사를 만나게 되고 도움을 받는다. 그렇게 알게된 강박사의 부모와 그의 딸을 계기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을 도와주다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간혹 강박사 부모가 운영하는 과일가게에 들러 과일을 사가기도 한다.

아홉 달 반을 배 속에서 키운 아이가 태줄이 떨어지기도 전에 해외 입양 브로커의 손에 넘어간 뒤에도 젖몸살을 앓고 오로가 그치기도 전에 또 누군가의 목을 조르러 가기 위해 한밤의 운전재를 잡았던 조각에게는 누군가와 자신의 삶을, 삶이라고 부르기에 다소 어폐가 있는 생의 작동 원리를 공유하거나 그로써 사소한 희로애락을 등에 업고 해소하는 일상을 그려 보지 못했던 그녀가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연민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176p)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같은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투우라는 젊은 남자가 다가온다. 사실 업자 간에는 서로 모르는 척하는 게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할머니라 부르며 시종일관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일을 그르치게 한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을 죽이면서 그녀를 조금씩 코너에 몰고 가는데, 자신 앞에 나타난 투우의 존재와 이유에 대해 조각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 중요한 상황에 왜 사람을 돕는데? 인지상정? 인간에 대한 예의? 나가 죽으라고 해. 언제 그런 거 챙기고 살았는데? 같이 늙어가는 처지니까 생판 남을 봐도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어? 당신이 이날 이때까지 해온 일과 살아온 방식을 생각하면 그거 너무 뻔뻔하지 않아?" (본문 215p)

 

류의 부인과 아이의 죽음으로 류와 조각은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라는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켜야 할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었고, 그녀는 결국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결과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있었기에 조각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느껴지는 연민은 '고독하면서 아름답고, 잔인하면서 슬픈 이야기'라는 책의 소개글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게 한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본문 332,333p)

 

위의 글은 상처투성이의 삶도 기꺼이 살아내는 조각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 하지만, 실은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자살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살다보면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 갖게 될 것이다. 지금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말이다. 덧붙히자면, 조각이 보여주었듯이 지키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상실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우리는 현재멈춤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을 살아야 함을 저자는 말하고 있는 듯 하다.

 

<<파과>>는 좀체 보기 힘든 65세 노부인 킬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참신한 소재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킬러가 주인공이기에 보여줄 법한 스펙터클함은 없었지만 그에 충당하는 스릴이 있었으며, 죽음이 아닌 삶이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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