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닥터 - 제1회 자음과모음 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안보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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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진실이라는 게 뭐죠? 뭐가 현실인가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당신은 현실인가요? 여기 있는 내가 현실이에요? 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인 거죠?

- 자네가 믿고 싶어 하는 부분까지가 망상이고 나머지는 전부 현실이지. 자네가 버리고 싶어 하는 부분, 그게 바로 진실일세. (본문 205p)

 

인생을 살다보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렇게 그 기억들이 조금씩 망각되어가고 결국은 그 기억에 좀더 나은 상황을 덧붙여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일어나지도 않은 이 새로운 기억이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환상과 기억이 조금씩 어긋나는 일도 일어난다. 그런 예기치 못한 혼란 속에 가끔은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모를 때가 있다. 이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봤음직한 이야기일 게다. 이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누구나의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좋은 것만 기억하는 인간의 습성을 보여줌으로써, 위조된 기억, 날조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우리의 기억은 안전할까 하는 의문을 들도록 이끌어주고자 했다.

 

<<오즈의 닥터>>는 주인공 김종수와 수연의 이야기가 중첩적으로 구성된다. 주인공 김종수는 불면증과 환각이 보이는 탓에 닥터 팽을 만나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전철 안에서 옥수수를 팔던 그가 옥수수를 싫어하는 자신에게 옥수수를 건넸을 때였는데 이후 법원에서 지정해 준 정신과 상담의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옥수수는 그와 궁합이 안 좋은 음식이다. 스포츠댄스가 아직 정착하지 못했을 때 춤바람이 난 엄마와 그런 엄마를 잡으러 뛰어나갔던 아빠가 추격놀이를 하는 동안 혼자 집에 있었던 그가 옥수수를 먹고 또 먹었다가 병원에 가게 된 사건이 있었던 탓이다. 그는 옥수수를 입에 문 사람들이 잔뜩 나오는 환각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는 닥터 팽에게 옥수수 사건을시작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춤 바람이 난 엄마, 엄마처럼 춤바람이 난 일곱 살 많았던 누나가 고등학교 때 뺑소니 트럭에 당해 죽은 이야기까지 오랜 기억을 끄집어냈다.

 

수연은 자신의 이상형에 가까운 세계사 선생님을 미행하고 있다. 완벽한 모범생인 수연은 교무실에서 성적때문에 담임 선생님과 상담 후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찾는 그를 보게 되었고, 결국 찾은 것이 비타민 통임을 알게 된 수연은 그의 색다른 면을 많이 볼 수 있는 날이라는 생각에 그를 미행하게 되는데 그가 형편없이 보이는 두꺼운 목걸이 한 줄을 사는 것을 보고 따라 구입하게 된다.

 

오늘도 종수는 닥터 팽을 만나 아빠의 이야기를 한다. 보험금과 장애인 연금을 타먹기 위해 어린 자신을 뜨거운 물에 담궜던 아빠는 병으로 죽은 엄마로 인해 성실하게 살기 시작했지만 누나의 죽음은 아빠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아빠는 원형 판 놀이기구인 디스코에서 점프를 하다 목과 등골뼈가 부러져 죽었다. 엄마와 아빠, 누나의 죽음으로 이어진 가족 비극사에 대해 풀어낸 그에게 닥터 팽은 정수연이 실종된 지 사흘이 지났다는 얘기를 하게 되고, 세계사 선생님이었던 그가 정수연이 컨닝하는 것을 보고 지적했다가 오히려 강간범으로 몰리게 된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에게 알려져 결국 살던 집까지 방화를 당하고 여관에 묵어야 하는 피해자였지만, 그는 정수연 실종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닥터 팽은 그에게 어릴 때 죽은 누나나 이복형제도 없었으며, 어머니는 그를 낳고 나서 죽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닥터 팽은 그에게 무엇이 진실이냐고 묻게 되고 이제 그는 약물중독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들려주지만 환각과 현실 속에서 혼란스러운 그의 이야기 속에 진실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어 보였다.

그러는 사이 좁은 방 안에 있는 수연이 경찰에 의해 구조되고 있었다. 수연의 상태는 마치 그가 돌보던 고양이를 이후 귀찮아서 내버려두었다는 이야기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었다.

 

- 현실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환각이 보이는 상태로 좀 살면 안 되는 건가요? 현실이라고 해봐야 좋을 것도 없잖아요. 물론 환각이 무조건 더 좋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결국 마찬가지잖아요. 나는 이제 환각도 현실도 상관없어요. 모래든 시멘트가루든 결국은 딱딱하게 한 덩어리로 굳어버리곤 끝이잖아요." (본문 295,296p)

 

그래요, 닥터. 나는 도망칠거예요.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한다니 그건 너무 끔찍한 형벌이잖아요. 나한테는 이 정도가 어울려요. 죄책감도 책임감도 자부심도 없는 이 정도가. (본문 297p)

 

언젠가 읽은 책에서도 나는 이처럼 과거의 기억이 왜곡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다. 기억이라는 것이 나 스스로에 의해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꾸며지고 다듬어져 현재의 기억으로 만들어지고 있음에 놀랐는데, 부정확한 기억으로 기록되고 있는 나의 역사 속에서 그 왜곡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러운 것은 아닐까 생각한 바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앞에 놓은 절망과 고통 그리고 아픔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현실의 외면이 김종수처럼 왜곡을 만들어내고, 환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좋은 것만 기억하고픈 인간의 본성 속에서 현실은 점점 진실에서 멀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불편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우리는 결국에는 나 자신 조차도 환각일지 모른다는 혼란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문득 기억으로 인한 혼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좋지 않은 현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현실도 나와 함께하는 진실임을, 그 고통과 마주하는 것이 진실임을 기억해두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오즈의 닥터>>는 환각과 현실, 거짓과 진실이 절묘하게 버무려져 반전에 또 반전을 주는 작품이었다. 환각과 현실, 거짓과 진실의 배열은 제1회 자음과모음 문학상 수상작다운 놀라운 흡인력과 구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나에게 저자 안보윤의 이름 석자를 기억하게 된 작품으로 '기억'될 듯 싶다. 왜곡이 아닌 진실로 기억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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