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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우한테 잘해줘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23
박영란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녀석이 보낸 마지막 문자는 '영우한테 잘해줘'였다. '영우'가 누굴까? 녀석이 자살하기 직전에 그런 문자를 보냈으니, '영우'는 녀석도 알고 나도 아는 누구일 것이다. 녀석도 알고 나도 안다면 그 사건에 관련된 인물일지도 모른다. 학원가를 떠들썩하게 만들어버린 그 사건. 하지만 영우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본문 7p)
요즘들어 자주 눈에 띄는 책이라 관심을 갖고 있었던 터였는데, 최근에 읽는 <나의 고독한 두리안 나무>의 저자 박영란 작가의 책이라 서둘러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 자살, 최근들어 청소년들의 자살이 뉴스에 자주 등장하게 되면서부터 청소년 소설에도 자살에 관한 소재가 심심치않게 등장한다. 삶이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음을 일깨우고자 함일 게다. 그렇다면 영우는 누구며, 학원가의 사건은 무엇일까? 첫 페이지부터 많은 생각과 호기심을 이끌어냈다. 그와 동시에 시한폭탄을 가지고 있는 청소년들의 세상을 가차없이 보여줄 것 같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처럼 느껴졌다.
이야기는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중학교 3학년인 주인공인 '나'가 J학원 과학고 생물 올림피아드 준비생을 위한 반에서 180센티미터에 근접하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속칭 괴물이라 불리는 '자이언트 코끼리'를 만나면서부터다. 과고를 준비하기 위해 중1 때부터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 틈에 '나'는 생물 공부가 좋아서 조금은 늦게 학원에 들어갔다. KBO(한국 생물 올림피아드) 준비생들은 거의 붙박이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정까지 남아 공부를 했고 열 명은 거의 한 덩어리처럼 붙어다녔으며 그중 '나'와 자이언트는 고아 아닌 고아라는 공통점 탓인지 유독 친하게 지냈다.
사실 '나'에게 과고는 꼭 가고 싶어 열망하는 곳이기보다는 자신을 견디게 하는 일종이 도피처였다. 무기력한 삶을 지속하고 있는 엄마와 필리핀으로 돌아가버린 필리핀 아버지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 꼭 과고가 아니어도 되었을 것임에도 그를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인어트 코끼리, 녀석은 '나'와는 너무도 달랐다. 이 신도시에서 꽤 이름난 부동산 갑부의 아들이었으며, 녀석의 수상 실적은 신족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부모와 세상이 기획해주는 대로 살아온 것이 자신의 17년 인생이라 말할 뿐이었다.
4월이 되자 수업은 강도가 더 높아졌고 저녁식사 시간 30분만이 자유를 찾을 수 있었던 열 명의 아이들은 지구과학 교재를 사겠다며 들어 간 서점에서 첫 사건이 시작하게 된다. '훔친 책으로 공부해야 되냐?'라는 투덜거림과 달리 이들은 모두가 '재미있다'는 짜릿함을 느꼈고, 훔치는 데 성공한 일을 '일종의 성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흥분을 시작으로 KBO반 아이들은 뭉쳐 다녔고, 그 저녁 식사 시간을 시작으로 죽이 맞았다. 성적이 주는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흥분이 일을 지속시켰던 게다. 세 번의 도둑질을 끝으로 '나'와 녀석은 '그런 장난'을 그만 두기로 했지만, 그 장난은 단지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였으며 그 일은 녀석과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성적에 대한 압박과 입시에 대한 강박감 그리고 최고 강사로 손꼽히는 강과를 통해 보는 불투명한 미래가 그들을 도둑질이라는 일탈로 내몰았다. 후에 사건이 발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부모들의 몫이 되었고, 그들은 사건과 무방하게 공부에 집중하기만 하면 되었다.
매일 똑같은 일이 순차적으로 반복되는 하루들이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속되진 않았다. 그 시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별로 없었다. '공부하는 시간의 누적'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본문 179p)
입이 없어 말을 못하는 헬로키티 일가족은 모두 자살했단다. 자살이기보다는 속 터져 죽었단다. 그 답답함이 녀석에게는 있었다. 아니, 아무런 전망도 없이 오직 익숙해져야만 하는 암흑의 세계를 걷는 교육 현실에 처한 청소년들의 모든 답답함일지 모른다. 허무함 속에서 살고 있지만 허무하지 않은 뭔가를 찾으려는 시도 같은 짓은 할 수 없는, '허무함' 그 자체가 그들 세대의 '콘셉트'가 된 그들의 세계의 답답함. 아니 어쩌면 그 허무함을 상의할 수 있는 부모라는 존재의 부재가 그들을 더욱 답답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KBO까지 9일이 남은 어느 날 학원가에 불어닥친 여학생의 자살 사건으로 녀석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그렇게 올림피아드 시험은 끝나게 된다. 장려상을 받은 '나'는 일반고에 진학했고 그들은 간혹 문자를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물었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이 정해진 어느 날, 녀석에게 온 문자에는 '영우한테, 잘해줘라'였고 '나'는 영우를 끝내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생물 올림파아드를 같이 준비했던 녀석에게 문자가 왔다. 녀석이 자살했다고. 암흑의 핵심과 마주쳤을 녀석을 이해한 뒤에야 '나'는 영우를 기억해냈다.
코끼리 발목을 잡고 있는 끈.
그거 누가 끊어야 하는지 아냐?
자신.
그래, 자기 자신!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 (본문 267p)
환경은 다르지만 '나'와 녀석은 헬로키티라는 공통분모로 인해 친해질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없이 암흑을 걸어야 하는 이들에게 강과의 꿈인 '여행자를 위한 여관'은 희망이 되었다.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달리고 있는 그들에게 카이스트를 나와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는 강과의 처지는 그들의 두려움이었고 불안이었지만, 강과의 꿈은 한계의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는 막연한 희망이 되어주었다. '영우한테 잘해줘'는 바로 그 희망이었고, 영우는 바로 자신이었던 게다.
시궁쥐가 되든, 새가 되든,인간이 되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들이 보유한 성적만이 중요한 곳, 우리 아이들은 시험용 코끼리처럼 살아가고 있다. 아무런 전망도 없이 오직 익숙해져야만 하는 이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매어놓은 끈을 끊지 못한 채 그렇게 매어 있었다.
이제 나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어둠의 세계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 한다. 어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라고 저자는 권유하고 있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임을 '나'와 녀석의 심리 묘사를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이끈다.
중학교 2학년 딸아이의 발목에도 나도 끈을 매어 놓은 것은 아닐까. 나 역시도 좋은 대학만이 최선의 길이라 말하는 보통의 엄마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나로 인해 용기내어 끈을 끊지 못하는 딸에게 <<영우한테 잘해줘>>를 건네보련다.
자신에게 잘해주기를,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여전히 공부만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부모인 나이기에 몸소 끊어주지 못하는 그 끈을 스스로 끊어보라고 권한다. 그것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최선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로서 끊어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에 대한 서툰 표현을 이 책으로 대신 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