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아이들 창비청소년문학 45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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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은 흔히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낭만적인 조각가로 묘사되지만, 실은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투사하려는 독재자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표지 中)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피그말리온 효과는 누군가에게 대한 사랑의 믿음이나 기대, 예측이 그 대상에게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을 말하는데, 긍정적으로 기대하면 상대방은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을 하면서 기대에 충족되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으로 흔히 아이들을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자주 드러나는 현상이다. 사실 긍정의 힘이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현 교육현실에 빗대어 볼때, 피그말리온 효과는 오히려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대로 살게 되는 아이들을 훈육하는 씁쓸한 자화상처럼 보여진다.

여기에 <<피그말리온 아이들>>의 모습이 덧대어져 이 사회의 고름이 여과없이 드러났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의 입장에서 내 아이들도 부모라는 독재 앞에 나약한 피그말리온 아이들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상대를 향한 긍정적인 메시지가 아닌, 꼭 해야만 한다는 무언의 업악은 아니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로젠탈 스쿨은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의 이름에서 타온 껏이다. 한 인간에게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며 기대하면 언젠가 그 결과가 재능의 발현과 목표 달성으로 나타난다는 로젤탈 효과 이론을 바탕으로 세워진 학교는, 그 이론 자체만으로는 일반적인 교육 현장과 다를 바가 없다. (본문 42p)

낙인도의 로젠탈 스쿨은 지난 십육 년 동안 방송이나 신문을 막론하고 외부 취재를 일절 거절해 오기로 유명한 곳이다. 청소년 교양 프로그램을 주로 만들어 온 프리랜서 피디인 마는 업체 선정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미지의 영역을 언급하게 되고, 결국 그 어떤 정보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채 학교측의 요청대로 촬영 감독인 곽과 단 둘이서 낙인도에 들어서게 된다. 핸드폰 반납은 물론 학교 촬영을 허가받은 상태에서 학생 식당에 가 보는 일까지 교장에게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학교 교육 방침에 의심을 품게 된다.

범죄자 자녀들과 고아들이 대부분인 이 학교는 사회 하층민으로 규정되는 이들을 모아 놓고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으로 자신감과 자존감을 향상시켜 부모와 같은 길로 이탈하지 않게 도우며 올바른 도덕관념을 장착시키고 이 사회에서 한몫할 수 있는 일꾼으로 키운다는 일차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특수한 환경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범죄의 재생산과 대물림을 가능한 한 막고 궁극적으로 사회 안정을 꾀한다(본문 42p)는 이차 목표를 가진다.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있는 듯 하지만, 식사 끝나고 나면 아이들이 의무처럼 알약을 하나씩 먹는 것을 포착하게 된 마는 더욱 의심을 품게 되는데, 경험을 통한 다양성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보다는 '사실'인지에 중점을 두고, 정서적 혼란을 겪지 않기위한 방향을 제시한다는 이유로 꼭 필요한 사이트만 접근 통로를 열어 놓은 점, 개인 메일을 하나 가질 수 없다는 점 즉,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간과하고 있는 위험한 발상에 마는 무언지 모를 찜찜함을 갖는다.

그런 와중에, 학생이자 교장의 비서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은휘와의 인터뷰에서 '여-기-서-달-아-나'라는 의도 불명의 암호를 확인하게 되고, 설상가상 학생들의 폭력에 관여한 곽과 마는 점점 좁혀져오는 포위망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금지구역에 접근하게 된 곽은 이들에게 감금당하게 되고, 마는 은휘를 통해서 얻게 된 이 학교의 기밀문서가 든 USB를 쥔 채 달아나게 되는데, 섬이라는 한정된 구역에서 마는 의도를 파악하지도 못한 채 은휘의 메시지에 매달려야 했다.

 

사라진 곽, 그리고 뒤에서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마는 교장과의 학교 방칙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한다. 여기서 아이들을 조각하고자 하는 교장의 속내가 드러나게 되는데, 마를 돕고 있는 은휘의 행각이 들통나면서 은휘를 향한 교장의 한마디에는 상아로 조각한 여신상을 사랑하여 아프로디테가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자신 역시 그들을 조각하고 있음이 여실이 드러난다.

아아, 저 애도 결국은 실패작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믿고 곁에 그늘러 왔어도 소용이 없나. 하찮은 출신 성분의 아이를 순결하고 정직하며 고상하게 만들기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본문 191,192p)

그럴싸한 포장으로 사회 하층민의 아이들을 구제한다는 미명하여 억압과 폭행으로 자신의 조각상으로 만들고 있었던 교장은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투시하려는 독재자의 다른 모습이기도 한 '피그말리온'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교장의 모습은 바로 믿음과 기대로 인한 긍정적인 효과를 자신만의 생각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놓은 현 교육현실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딸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다. 겉으로는 네가 원하는 꿈을 찾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라, 라고 그럴싸하게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을 가야만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어른들이, 현 사회가 만들어놓은 조각상이 되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길로만 인도하고 있는 셈이다. 교장을 보며 경악한 것은 그저 가상의 이야기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내 안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사회, 학교 곳곳에 존재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아이는 내가 만들어내고 있는 또 하나의 피그말리온인걸까? 스스로의 욕망이 아닌 부모의 욕망에 이끌려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도 아이가 말귀를 알아듣는 순간부터 피그말리온을 조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문득 섬뜩해지는 느낌이든다.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라는 점에 한없이 움츠러든다.

여기에 더해지는 사회의 비리가 더욱 환멸을 느끼게 했는데, 결국 나는 이 사회에 대한 문제점으로 나 자신을 또 포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했다.

 

<위저드 베이커리>로 구병모 작가는 내가 기억할 또 한 명의 작가가 되었다. <<피그말리온 아이들>> 책 제목에서 오는 호기심도 있었지만, 작가의 이름만으로 책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가진 필력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는내내 추리소설만큼이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역시 구병모 작가다, 라는 탄성을 자아내기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사실 자칫 피그말리온 아이들이 결국 자신의 의지와 욕망대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결말에 대한 아쉬움을 가질 뻔 했다.

-도와달라고 한마디만 해. 왜 말을 못 해? 안 하는 거야? 여기서 데리고 나가 달라고!...너는 왜! 여기서 뭘 더 기대할 게 있어서!

-아저씨, 이제 걱정하지 말고 가세요. (본문 240,242p)

희망이 아닌 안타까움으로 남겨진 결말이 아쉽다고 느껴졌지만, 사실 결국 작가는 마가 등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을 통해 어른들에게 달라지라는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아이들도 달라질 수 있다고. 희망은 바로 기성세대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됨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런지.

 

결국 조각상으로 남기를 각오한 아이들, 이들은 또 다른 사회에서 또다시 길들여지는 것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은 독재자들에 의해 길들여지고 또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학교에서는 교사에게, 사회에서는 또다른 권력자에 의해....우리는 그렇게 조각상이 되어왔고, 또다른 조각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뼈아픈 현실을 구병모 작가는 꼬집고 있다. 그렇게 달라져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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