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백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백영옥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스타일>을 통해서였다. 저자가 '키다리 아저씨'를 좋아한다는 점과 나와 동년배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고, 비록 스토리 자체는 약간 식상한 느낌이었지만 발랄하고 유머러스한 글이 좋았기에 저자의 이름 석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스타일>에서도 블링블링한 느낌이 잔뜩 배어져 있었는데, 신작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도 왠지 블링블링한 느낌이 든다. 실연당한 사람이라면 왠지 부시시한 머리에 충혈된 눈, 얼굴 전체에 내려앉은 다크써클, 시체놀이라도 하듯 침대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나약함과 나태함 등이 떠오르는데, 이른 아침에 조찬 모임이라니...이거 너무 품격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다 이 블링블링한 책 표지는 또 무엇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실연의 또다른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서.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아침 먹어주실래요? (본문 49p)

 

아침 일곱시부터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자는 것, 아침을 먹고 연달아 영화 네 편을 함께 보자는 아이디어는 정말 이상했지만,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하다는 문구는 실연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너무 공감할만한, 그러기에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을 것만 같기에 트위터에 올라온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를 클릭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그렇게해서 모인 21명의 남녀들 그리고 그 중에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 고통이 너무도 큰 세 남녀의 이야기가 여기서 펼쳐진다. 실연은 슬픔이나 절망, 공포 같은 인간의 추상적인 감동들과 다르게 구체적인 통증을 수반함으로써 누군가로부터의 거절이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본문 31p) 더불어 사랑의 증거물로 남겨진 물건들은 추상적이지 않은 실연의 고통을 오랫동안 상기시키게 되기에 실연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연애가 끝나 사랑이 죽고 나면 범죄 현장의 유류품처럼 많은 증거물이 남게 되고, 이에 이 조찬모임에서는 '실연의 기념품'을 처리할 공간을 마련해 물건을 서로 교환하기로 한다.

작가 프랑소와 사강을 좋아하는 아버지에 의해 사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윤사강은 여기서 지훈의 로모카메라를 집어든다. 필름을 현상하게 된 사강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겠다는 생각에 자신이 처리해버린 프랑소와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를 읽고 있는 지훈과 만나게 된다.

 

사실 누군가에게 실연의 고통을 치유받는다는 것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남녀간의 사랑과 실연은 치유도, 용서도 결국 자신의 몫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여기 실연이라는 운명의 카테고리를 묶어낸 인물이 있으니 바로 정미도라는 반전캐릭터를 가진 주인공이다. 사랑도 하나의 기획에서 시작되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실연도 하나의 기획상품이 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짚어준 인물이다. 처음 등장할때의 발랄함과는 달리 중반부 전혀 다른 캐릭터로 등장한 정미도로 인해 실연은 또 하나의 시작임을 일깨운다. 기획상품이라는 것이 조금은 씁쓸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헤어져야 다시 만나고 또 사랑을 이룬다는 미도의 생각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된 셈이다. 결국 이 의도된 기획에서 사강과 지훈은 실연의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에서 놓치고 있었던 무언가를 되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 빠지고 연애에 실패하고 그런 거 아닌가? 긴 전쟁 중에도 서로 사랑해서 아이가 태어나고 그러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들은 헤어질 걸 알면서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러니까." (본문 41p)

과거와 작별하고 커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사강, 한 번의 사랑만으로도 모든 사랑의 가능성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했던 사강에게 실연과의 이별은 새로운 인생과의 시작이 되었다.

프랑소와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은 이렇게 이 작품과 맞물려져 있었다. 우리가 슬픔이여 안녕이라고 인사할 때, 새로운 삶은 시작된다.

 

실연의 고통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며, 실연을 대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잘 그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사랑 후에 이별의 고통을 감내하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랑을 해 본 우리들에게 뜨거운 공감을 이루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실연의 고통이 포장되기보다는 우리가 현실 속에서 겪고 있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기에,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실연에 대한 고통을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듯 싶다.

사랑했던 기억, 그리고 이별의 고통앞에 처연해지는 우리, 그러나 다시 사랑하고 다시 살아가야 하기에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은 실연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을 보듬어주는 일곱시 조찬 모임 같은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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