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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 - 彩虹 : 무지개 ㅣ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톨스토이의 작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어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오로지 사랑'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재물, 명예, 권력 등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해도 사람은 사랑없이는 온전히 살아가기가 어렵다. 그러기에 사람은 사랑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하면서도 또다른 사랑을 찾는다. 우리는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 지금도 그러하고, 아주 오래전에도 이미 그러했었다.
역사 속에는 동성애로 폐서인이 된 세자빈이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가 왜 그래야했는지, 역사 속에서도 그리고 나에게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결코 역사 속에 기록되고 싶지 않았을법한 한 여인이 있었다는 것이 역사가 알려준 사실이었고, 내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그런 그녀를 작가 김별아를 통해 <<채홍>>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내게 애련함으로, 같은 여인으로서의 측은함으로 기억되고 있다. 시대가 만들어낸 가련한 인물, 세자빈 봉씨. 그녀는 세자빈으로서가 아닌, '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인으로서 사랑받길 원했을 뿐이다.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 듯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에 목숨을 거는 인생이 가련타! 사랑이 무언가? 고작 몸의 욕망 그리고 마음의 위안이 아닌가? 하지만 그토록 비루한 몸의 욕망, 알량한 마음의 위안을 떼어버리면 사람의 한살이에 남는 것은 또 무언가?' (본문 48p)
세종이 즉위하고 십일 년 째 되던 기유년, 세자빈으로 봉해졌던 휘빈 김씨가 투기로 인해 쫓겨나자, 가량가량한 얼굴과 몸이 야윈 듯하면서도 탄력성이 있는데도, 씽글거리는 웃음이 고혹적인, 활짝 피어난 한 떨기 모란을 연상시키는 난이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난은 부족함 없이 한껏 양껏 받아온 사랑에 대한 자신감으로 오만했으며,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만으로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덕으로 책봉한 휘빈 김씨가 폐서인이 되자 궁에서는 외모로서 세자빈을 간택했다. 그리고 그녀가 '난'이 아닌 '순빈 봉씨'가 되었다.
순빈 봉씨는 너무 예뻤다. 그러나 세자의 눈에는 그것은 다르게 뵈지 않았고, 전처 김씨를 맞을 때나 감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김씨나 봉씨, 아니 그 어떤 여인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세자는 낯을 가리며 말섞기를 저어한데다, 오직 인의로써 스스로를 신칙하고 덕치를 베풀어 온 나라를 번창하고 태평하게 하는 성군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더욱이 '심하게 아름다운 사람은 반드시 심한 악을 갖고 있다' (본문 94p)고 생각했으니, 첫날 밤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자빈을 앞에 두고 눈을 질끈 감은 것은 세자에게는 어쩌면 당연시자였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봉씨가 첫날밤 제 옷으로 옷고름을 풀었고 스스로 치마를 벗었던 수치심을 맛보게 되었으며, 그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세자빈은 혼자가 되어야했고, 급기야는 상상임신으로 철저히 외면받아야했다. 술을 마셔야 밤을 지새울 수 있었고, 한순간도 살지 않은 것만 같은 고립을 느꼈다.
그렇게 철저하게 외로웠던 밤비 오는 밤, 자신을 부축하던 나인의 손이 자신의 어깨에 닿고 팔꿈치가 가볍게 가슴을 스치고 따뜻한 체온과 함께 달콤한 숨결이 귓불에 훅 느껴지자, 세자빈은 삶의 향취인 살내, 사람 내새에 자릿함을 느꼈다. 고립감과 외로움에서 철저히 혼자였던 그녀에게 온 당황스러움은 삶의 본능이었다.
"아아........네가 나를 살고 싶게 하는구나!"
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믿을 수 없은 열정, 스스로마저 설득할 수 없는 지독한 갈망이 해일처럼 몸과 마음을 덮쳤다. (본문 255p)
작가는 소설의 제목이 '채홍(彩虹)'인 까닭을 무지개가 태양의 반대편에 뜨는 이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왕이라는 태양이 빛나는 반대편에는 권력과 욕망과 사랑과 질투 등의 인간적인 감정들로 채색된 여인들의 무지개가 떴음으로 뜻하며, 또한 중의적으로 다양한 색을 가진 무지개는 성적 소수자의 국제적 상징이라 전한다. 역사는 순빈 봉씨를 동성애자로 인한 폐서인이라 기록했지만, 이 작품에서 봉씨는 사랑을 원하는 여인으로 기록한다. 나는 그녀가 동성애자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자로부터의 외면으로 극심하게 외로웠던 그녀는 진실된 사랑을 갈구했으며, 그 외로움을 채워준 이가 그저 나인 소쌍이었고, 그녀가 여인이었다는 점일 뿐이었다.
".........그저 사랑하고 보니 사내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제가 사랑한 사람이 여인이었을 뿐입니다!" (본문 14p)
궁궐이라는 곳은 철저히 외로운 곳이다. 고립감으로 서로에게 정을 붙힐 수 밖에 없었던 나인들, 사랑하고 싶지만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던 내시들, 세자가 드는 처소가 어딘지 밤마다 귀와 눈을 쫑긋 세울 수 밖에 없었던 후궁들. 나인들이나 봉씨가 동성애자였다기보다는 철저한 외로움에서 사랑을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 여인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역사는 봉씨를 동성애자로 기록하지만, 사실 그녀는 세자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가련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행여 그때도 사랑이 죄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사랑으로 죽으리라는 것을. (본문319p)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특히 여성에게는 더욱 더- 죄가 되었던 세상에 봉씨는 사랑을 알았던 인물이다. 권력과 이권 다툼만이 역사에 기록되었던 그 시대에 봉씨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인 사랑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은 변했다. 부부간의 소홀함이 이혼 사유가 되었고, 동성애자라 하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다. 이제 역사는 사랑을 기록하게 될 것이다.
사랑없이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므로. 봉씨는 그 사실을 너무도 일찍 알아버린 여인이었기에, 그 비애를 고스란히 받아낼 수 밖에 없었던 가련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