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은 들을때마다 고깝게 들린다. 어쩌면 그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서 그렇지 않다, 라고 확신할수도 없다. 세상이 바뀌어 여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세상의 중심에도 우뚝 설만큼 그 위치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여전히 우리네 여자들을 따라다닌다. 고까운 말임에도 불구하고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어려운 말, 그래서 더욱 싫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난설헌>>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말 또한 이 말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이 말은 꼬리표다. 양반이든, 기생이든, 몸종이든 그 위치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여자들에게 이 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말이다. 난설헌의 생을 들여다보면서 이 말이 더욱 싫어졌다. 이 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난설헌, 초희가 가진 삶에 대한 애착이 안쓰럽고 서글프다. 언제쯤이면 여자은 이 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 딸에게도 이 꼬리표가 따라다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왠지 마음이 아리다.

 

"함 사시오, 함 사이오" 함진아비들의 드높은 목청에 기왓장이 들썩거리고 신명스러운데, 초희의 마음은 조바심이 인다. 울타리에 길들여진 열다섯 살 초희가 감내해야할, 아녀자가 걸어야 할 생의 덕목이 너무도 버거운 탓이다. 열다섯 살, 이 어린나이에 초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맞이해야 한다. 그 삶에 나타나는 불긴한 징조들이 그녀의 삶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예견한다.

 

"난초에 비유한 대상은 어머니입니다. 시들어가는 꽃의 덧없음을 바라보면서 속울음을 삼키는 어머니의 애틋한 모습을 그려보았어요." (본문 22p)

 

초희와 균의 스승인 이도사님은 초희의 <감우(感遇)>를 읽으며 자기애가 강한 초희에게 핀잔 비슷한 화평을 했다. '난설헌'이라는 초희의 자호를 처음 접한 오빠 허봉은 이름 없이 살아가는 여인들 앞에서 난설헌,하고 부를 기회는 없겠지만, 작품의 말미에 당호로 난설헌이라 지칭하는 것이 좋았다. "난초와 자신이 서로 교감하고 있음을 절묘하게 나타낸 시"라 생각한 허봉이 한지를 돌돌 말아 소매 속에 밀어넣은 것은 초희에 대한 애정과 그녀가 가진 재능을 높이산다는 의미였을 게다. 그랬다. 이 시대 여인들은 이름 없이 살아가는 것은 기본이요, 글을 쓰거나 읽는 것이 흠이 되었다. 그러니 시어머니의 "지필묵이나 서책일랑 절대로 들고 올 염도 하지 말라"(본문 74p)는 으름장을 탓할 수는 없었을 게다.

안동김씨 명문대가와의 결혼이지만, 아직 벼슬 한자리 못하고 기방이나 들락거리는 남편, 보기 드문 미색에 희고 갸름한 얼굴에 도드라진 코날이 고집깨나 있어 보이는데다 눈이 부시도록 희고 화한 새 며느리의 육색에 심사가 꼬인 시어머니로 초희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가 못했다. 서책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막으리라, 규방의 여자가 공부 무슨.....(본문 108p) 시어머니 송씨는 초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딸자식한테 서책을 읽게 하고, 사랑방에 불어내어 시를 논하고 사서삼경을 읽게 했던 사돈의 처사를 비난하지만, 어찌보면 그렇게 자라지 못했던 자신의 환경에 대한 안타까움이 초희에 대한 분노로 나타났을지 모르겠다.

힘든 시집살이로 서책을 읽어보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붓을 잡아보지도 못하는 초희는 아버지의 죽음, 오라버니의 유배 등 친정의 안타까운 소식들로 몸과 마음이 허약해진다. 오랜 세월 끝에 얻은 딸과 아들이지만, 어미 품에서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한 채 먼저 보내야하는 슬픔을 견뎌야했으며, 모진 시어머님의 시집살이와 남편의 데면데면한 행동에 기댈 곳 없는 서글픔도 감내해야했다. 그 아프고 슬픈 마음을 풀어낼 곳은 붓과 종이 뿐이었다.

 

"아무것도 원망할 것이 못 돼요. 모든 원인은 자신에서 비롯된 것인데 누구를 탓하고 말고가 있겠어요. 처음 시집 와서는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저를 아프게 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이 좁으나 좁은 조선 땅에 태어난 것도, 여자로 태어난 처량함도, 남편을 만나게 된 것도, 원망하고 서러워했던 걸 부인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조선 땅에 태어남도, 여자로 태어남도, 김성립을 낭군으로 맞이한 것도 제게 주어진 운명이겠지요. 그 운명에 따르지 못하고 어긋나고 삐거덕댄 것은 지나친 애착과 미련이 더께 끼어서 그랬던 것이겠지요. 그걸 훌훌 털어내니 한결 세상이 밝아지고 홀가분해졌습니다." (본문 350p)

 

<<난설헌>>은 한없이 고단하기만 했던 허난설헌의 일대기를 담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의 삶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여인네들의 삶이다. 너무도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시대 여인의 삶이 이 책에 등장하는 여인들에게 모두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재능이 오히려 자신의 삶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던 초희는 운명이 서글프고 애련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시어머니 송씨는 어떨까? 조선시대 아낙네의 덕목에 맞추어 살아야했던 송씨 역시 운명의 피해자일지 모른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남편에 복종하고, 아들의 급제에 목을 매는 것이 그 시대 여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운명에 복종하며 산 자신과 달리, 남편의 삶의 일부가 아닌 자신의 삶을 사는 며느리가 왠지 고까웠으리라. 결혼한 지 14년, 나의 삶보다는 가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자식들의 삶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아내이자 엄마인 나의 모습을 빗대어 보면, 송씨의 마음도 이해못할 것도 아니다. 그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초희의 몸종이었던 덕실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초희와 달리 초라한 자신을 견뎌내지 못해 그녀의 남편을 빼앗으려 하는 덕실이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애처로운 것은 그 마음 또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아버지와 오빠의 도움으로 글 공부를 하고 스승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결혼 전의 삶은 결혼 후 초희의 삶은 극명하게 달라진다. 지금도 다를 바 없겠지만, 결혼이라는 것이 이렇게 한 여자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서글프다.

세상이 바뀌었다. 결혼으로 여자의 삶을 옥죄고 있다는 자각이 들면서 결혼적령기는 점점 늦어지고 있는데다, 미혼 여성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 결혼이 아닌 연애와 동거를 선호하게 되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의 꼬리표가 이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여자이기에''아내이기에' 겪어야 했던 부당함을 이제 소리낼 수 있게 되었음에 여자인 나는 반갑고 기쁘다. 초희가 가졌던 한(恨)이 이제야 풀어내고 있는가보다.

 

<<난설헌>>은 스물 일곱 짧은 생을 산 난설헌이 여자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겪어야 했던 심리적 묘사가 난설헌의 시어처럼 섬세하게 담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신분제도로 가슴앓이를 해야했던 최순치와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했던 남편 김성립의 심리적 묘사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이 작품은 허난설헌의 생애를 통해서 남근중심사회 속에서 살아야했던 여성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사회를 통해 여전히 뿌리깊이 존재하는 남성우월주의와 남아선호사상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해도 좋을 듯 싶다.

초희의 삶에 대한 애련함,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내려앉는다. 이 작품을 읽기전까지는 그녀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작품을 통해서 허난설헌의 생애를 보고 들은 후에야 비로소 그녀의 시 한 구절 한 구절 속에 담겨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도 짧은 생을 살다가 허난설헌은 작가 최문희를 통해 <<난설헌>>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초희야, 너무 영민함도, 너무 다정함도, 지나친 나약함도 이 세상에 배겨나지 못하는 것을, 어쩌자고 머릿속에 촛불을 켜고 산더더냐.' (본문 3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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