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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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를 볼 때, 꼭 등장하는 장면들이 있다. 혼자 남으면 죽는다, 샤워씬에서는 꼭 죽는다, 도망가다 꼭 넘어진다 등등 영화 속에 꼭 등장하는 장면이고, 그 장면이 나오면 지레짐작 하면서도 오싹한 기분을 떨칠수는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결말이 뻔히 보이는 로맨스 소설에서도 해피엔딩의 결말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과 행복감을 느낀다. 추리소설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보여지곤 한다.
추리 소설을 읽다보면 비슷한 트릭이 보여지는 경우가 있어 범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진행되게 될지에 대해 대략의 상황을 예건하게 된다. 놀라운 추리를 하는 똑똑한 사립 탐정과 사건을 해결한 실마리를 놓치곤 하는 경찰 그리고 사건의 주무대가 되는 밀실이나 죽어가는 순간에 피해자가 남긴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다잉 메시지’ 등은 추리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부분들은 추리 소설의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추리를 하게 되고, 작가들은 식상함이나 상투적인 느낌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요소들을 토대로추리소설을 써내려간다. 

<용의자 X의 헌신><백야행> 등을 집핍한 미스터리의 제왕이라 불리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인데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는데, 생각과는 달리 책 표지에 적혀진 문구가 심상치 않았다.

이 미스터리가 위험하다!
패러디 정신과 블랙 유머로 가득한 초현실 자학 미스터리

"본격 추리 소설의 규칙을 낱낱이 까발린다!" 라는 문구를 보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추리소설을 만날 수 있겠다는 설레임을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추리 소설이 가지고 있는 긴장감보다는 웃음코드를 더 많이 가진 작품이었다.
조연 오가와라 반조 경감과 주인공 덴카이치 탐정 두 주인공이 열 두가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담았는데, 그 사건들을 통해서 추리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상투적인 패턴을 소개하고, 비난하면서 추리 소설을 재평가하고 있다. 이는 미스터리 작가인 자신에 대한 성찰일수도 있으리라. 
오가와라 반조 경감을 자신은 탐정 시리즈의 조연에 불과하며, 터무니없는 논리를 펴고,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는 동안 애꿎은 사람을 용의자로 몰아세우며 시간을 벌어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상투적인 말들을 내뱉어주면서, 탐정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까지 해주어야 한다는 푸념도 함께하고 있다.

나는 절대로 범인을 잡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진범을 밝혀내는 것은 주인공 덴카이치 탐정의 역할이므로, 그가 멋지게 피날레를 장식하기 전에 내가 사건을 해결해 버리면 주인공은 무의미한 존재가 되고 만다. 무엇보다, 탐정 소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사건 해결의 핵심이 되는 열쇠를 번번히 놓쳐야 한다. 용의자를 적당히 의심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운 좋게, 혹은 우연히라도 ’제대로 된’ 의심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본문 9,10p)

추리소설 속에 탐정들은 사건 현장에 어떻게든 알고 찾아온다. 지나가는 길이거나 혹은 사건과 관련된 누군가와 지인이거나, 의뢰자가 갑자기 사망하거나 하는 일로 어떻게서든 사건에 연루되어 어느 누구도 찾지 않았지만, 제 때에 나타나준다. 그러면 경감은 "생초보 탐정이 나설 자리가 아니야. 물러나 있게."라는 구태의연한 대사를 읊어준다. 
사건의 패턴 또한 비슷하다. 트릭의 제왕인 밀실 선언,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를 설명하는 폐쇄된 산장의 비밀, 다잉 메시지에 대해 담은 최후의 한마디, 알라바이에 대한 트릭을 내세운 알리바이 선언, 동요 살인에 대한 트릭을 보여주는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 등등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12가지의 사건은 그렇게 추리 소설속에 자주 등장하는 사건의 패턴들을 소개함으로써 기존 추리 소설의 규칙을 낱낱이 까발리면서 비판하고 있다. 이 패턴들은 경감과 탐정의 대화를 토대로 주로 보여주고 있다.

"아, 또 밀실 트릭안가."
한마디로 지겹다. 요즘에도 과연 이런 패턴의 사건을 반기는 독자가 있을까 싶은데도 몇 건 중 하나꼴은 반드시 이런 트릭이 나온다. (본문 24p)

"요즘 세상에 밀실로 소설의 분위기를 띄우라는 건 한심한 요구야." (본문 30p)

"흔히 말하는 ’다잉(Dying)메시지’라고."
"골치 아프지요. 그 패턴은."
"그렇지, 뭐."
"작가 입장에서는 손쉽게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서스펜스를 높여주는 효과도 있으니 편리하겠지.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스토리 전개가 부자연스러워죠."
"당연히 부자연스럽죠. 도대체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메시지 따위를 남길 여유가 있겠어요?" (본문 93,94p)

"’알리바이 허점 찾기 식 탐정 소설’의 범인은 바로 저 녀석이에요. 결론은 언제가 똑같군." (본문 123p)

경감과 탐정은 소설 밖에서 추리 소설의 식상한 패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12가지 사건은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살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사실 이 책에서는 사건의 해결에 대해서는 그닥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어쩌면 독자들 역시 이런 흔한 트릭에 대한 뻔한 결말을 알고 있으리라 여겼기에, 추리 소설에 대한 작가의 심정을 담아낸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듯 하다.
작가는 과연 흔해빠진 트릭으로 추리 소설을 써내려가는 작가들에 대한 비판만을 하고 있는 것일까? 두 주인공의 이야기 속에는 독자들에 대한 야유도 함께 담겨져 있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겠네만, ’알리바이 허점 찾기’ 패턴에는 고정 팬이 있어. 작가나 우리 같은 등장인물들은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의무가 있지." (본문 125p)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처럼 논리적으로 범인을 찾아내려는 독자란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대부분 직감과 경험으로 범인을 간판해 낸다.
"나, 소설을 중간쯤 읽다가 범인이 누군지 알아 버렸어."라고 말하는 독자가 잇다. 하지만 추리를 통해서 알아낸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녀석이야!’라고 적당히 꿰맞췄는데 결과적으로 들어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와 같은 ’꿰맞추기’식의 경우 예측이 한 인물로 모아지지 않는다. 독자의 범인 꿰맞추기는 경마의 우승마 예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본문 58p)

추리 소설의 상투적인 등장인물이나 패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독자들 역시 저자의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뿐 아니라 예산과 시청률을 앞세우고 있고, 원작보다 질이 떨어지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에 대한 분노도 담아냈다.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보다는 시청률 때문에 그러겠지. 원작의 복잡한 스토리를 그대로 방영하는 것보다, 조금 진부하더라도 알기 쉽고 적당히 섹시한 내용을 넣는 편이 시청률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어."

"요즘 미스터리 소설 부문에서 신인상이 많이 나오는데, 방송국이 스폰서를 맡는 겨우가 늘고 있어. 1000만 엔도 넘는 상금을 펑펑 쏟아 붓고 있지. 결국 드라마 원작을 구하기 위해서야." (본문 156,157p)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성찰, 같은 패턴으로 추리 소설의 질을 떨어뜨리는 작가들에 대한 비판, 그리고 추리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 대한 아쉬움 토로 뿐만 아니라, 비주얼적인 부분과 예산과 시청률을 앞세워 추리 소설이 가지고 있는 복잡하고 논리적인 부분을 배제시켜 드라마화 하는 방송매체에 대한 불만이 섞인 저자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듯 하다. 이런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저자는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미스터리 소설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페이지가 쉴새없이 넘어갈 정도로 어리버리함을 설정해야하는 경감과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탐정이 이끌어가는 이야기가 코믹하고 재미있었다. 기존 추리 소설에 대한 저자의 통쾌한 비판, 추리 소설을 사랑하는 저자의 마음이 그 코믹 요소 속에 잘 스며들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비록 식상한 패턴이라고는 하지만 그 식상함이 바로 독자들이 추리 소설을 사랑하게 된 기본적인 요소였을지도 모른다. 그 요소들이 지금의 추리 소설이 사랑받는 하나의 분야로서 당당하게 자리잡을 수 있게 필요 요소였다는 것 또한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작품을 읽고나자,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 많은 기대를 하게 된다. 식상한 패턴이 아니라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는 그의 미스터리는 어떻게 진행될까? 그의 작품 세계에 한번 빠져봐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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