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일의 레시피 키친앤소울 시리즈 Kitchen & Soul series 1
이부키 유키 지음, 김윤수 옮김 / 예담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8년 전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은 남은 가족 모두에게 큰 슬픔이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바로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 달만에 십년은 늙은 듯한 아버지에게 엄마의 빈자리가 우리보다 더 크게 느껴지셨나보다. 8년이 지났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쓸쓸해보이고, 각자의 가족을 꾸리고 있는 나와 동생과 달리 엄마가 없는 빈자리가 주는 공허함에서 회복되지 못한 듯 보인다. 아쓰타 료헤이가 부인 오토미가 세상을 뜨고 2주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채 모든 일들이 귀찮아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무기력하게 있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을 읽으며, 힘겨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버지에게도 49일의 레시피가 필요했을텐데....이 책을 읽으면서 이모토처럼 아버지가 슬픔에서 치유될 수 있도록 도와드리지 못했던 점에 많이 안타깝고 죄송스러웠다. 

33년 전 유리코는 동물원에서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오토미라는 이름의 새엄마가 될 사람과 처음 만나게 되었고, 계모 오토미는 아버지와 자식을 낳지 않고 지내다 2주 전 아침 71살로 이 세상을 떠났다. 이혼서류를 작성하고 집을 나서 친정으로 돌아가는 오토미는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하게 대했던 옴마(’오토미 엄마’를 줄여서 부른 칭호)가 절실히 필요했다. 
도시락 주머니에 소스가 배어나온 것에 버럭 소리를 지른 것이 부인 오토미와의 마지막 대화였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스러움으로 아쓰타는 2주 동안 절망과 슬픔에 빠져있었고,  갑자기 찾아온 노랑머리의 열아홉 살의 여자아이 ’이모토’가 아니었다면, 오토미의 작업실에서 꼼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모토는 오토미가 자원봉사로 그림편지를 가르치던 복지시설의 원생으로 선생님이 죽으면 집안 정리와 바깥양반의 밥, 법회 같은 자질구레한 일을 49일쯤까지 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49일이 되는 49재에는 독경과 분향은 필요없고, 오토미의 ’49일의 레시피’에 쓰여진 요리를 서서 먹는 형식으로 밝고 즐거운 연회를 열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했다. 
오토미의 생활 레시피에는 요리, 창소, 세탁, 미용, 기타의 항목으로 나뉘어서 ’히나마쓰리 레시피’, ’생일 레시피’ 같은 제목 밑에 요리법 등이 일러스트로 설명되어 있었고, 세탁과 청소 요령 등도 적혀 있었다.옴마의 레시피에 그려진 일러스트의 주인공들은 다름아닌, 젊은 시절의 아쓰타와 어린 시절의 유리코였다.
오토미가 자원봉사로 있던 리본하우스는 병이라고 진단받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약물 같은 무언가에 의존하게 된 여성들을 지원하는 곳으로, 오토미는 리본하우스에서 원생들에게 그림편지를 가르치기도 하고, 레시피를 가르쳐주곤 했다.

"전부 그런 건 아닌데 리본하우스에 오는 애들은.............집안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아서요. 정말 단순히 어떻게 먹고 말하고 세탁하고 청소해야 하는지, 또 속옷을 어떻게 개고 쓰레기는 어떻게 처리하는지도 몰라요. 배운 적도 없고 물어볼 데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고."

"리본하우스의 리본(reborn)은 영어로 재생, 다시 태어난다는의미라는데, 나는요, 선생님과 그 카드를 만나면서 분명히 변했어요. 지금의 나는 어떻게 먹어야 몸에 좋은지 알고 요리와 청소도 할 줄 알고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요. 가지고 있는 카드가 많아지면서 나에게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굉장하잖아요. 나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런 것도 안다는느낌으로요." (본문 63,64p)

이모토는 오토미에게 배운 것들을 펼쳐보이며, 좌절에 빠져있는 아쓰타와 이혼 서류를 작성하고 친정으로 온 유리코에게 ’엄마의 맛’을 보여준다. 결혼 생활동안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유리코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그로인해 애인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이와 유리코 모두 포기할 수 없다는 남편을 놓아주지만, 유리코와 남편 히로유키는 여전히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남아 있음을 안다.
죽은 자의 영혼은 49일 동안 이 세상에 있다가 법회가 끝나면 저 세상으로 떠난다고 한다. 아쓰타 그리고 유리코, 그리고 옴마 오토미 역시 이제 혼자서 헤쳐 나가야하는 것이다. 무기력했던 아쓰타와 유리코는 이모토로 인해서 옴마의 49재 연회를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이모토의 소개로 지붕과 벽 등을 손봐야 할 하루미가 함께하면서 일은 옴마를 위한 연회를 준비하고, 옴마의 레시피로 아쓰타도 장 보는 걸 익히과 요리와 청소, 세탁 등을 직접 하게 되었다. 

옴마의 연회에는 오토미가 리본하우스 여자애들이 새로운 생활을 위해서 하우스를 떠날 때 주었던 ’발자국’을 모델로하여, 옴마의 발자국(자신의 역사, 연표를 일컫는다)을 만들기로 결정하지만, 옴마에 대해서 남편, 딸 모두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채워지지않는 옴마의 발자국의 여백을 보면서 아쓰타는 오래전 오토미와의 기억을 되짚는다.
유리코는 옴마의 오랜 친구의 사토미를 통해서 옴마의 어린시절을 알게 되고, 옴마가 많은 사람들의 ’테이크오프 보드’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옴마는 테이크오프 보드였다는 것도.

"테이크오프 보드, 뜀틀에 발판이 있잖아요. 우리는 그 발판이에요. 뛰어가서 발판을 힘껏 차고 날아오르면 이제 떠올리지 않아도 되요. 과거를 뛰어넘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가지고 똑바로 달려가면 되는 거예요."

"오토미 씨만 아니라 리본하우스 자체가 테이크오프 보드예요. 하지만 크게 생각하면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요? 부모가 자식을 받쳐주듯이 모두 누군가의 발판이 되어서 다음 세대를 앞으로 날려주죠."
(본문 191,192,193p)

아쓰타와 오토미는 옴마의 연회를 열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좌절과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던 그들을 이끌어준 것은 죽은 옴마였고, 옴마는 테이크오프 보드가 되어 이들을 다시 앞으로 날려준 셈이었다. 

"저, 생각났어요. 아버지, 레시피에는 처방전이라는 의미도 있어요."
"처방전? 찜질을 하시오, 라든가, 한 봉지를 먹으시오, 하는 거 말이냐?"
"네. 처방전, 49일의 레시피. 옴마가 우리가 다시 일어나게끔 남겨준 49일의 생활 레시피예요." (본문 247,248p)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떠올렸다. 이 책을 영화로 제작한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부 몇 페이지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느낌이 굉장히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읽을수록 책 속에 빠져들었다. 가족의 의미와 슬픔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잔잔하면서도 감동있게 그려진 작품인데다 마지막에는 몽환적인 느낌까지 가미하고 있어 긴 여운을 남겨주고 있다. 나는 엄마로서 아이들의 든든한 테이크오프 보드가 되어주고 싶다. 옴마는 그 방법의 하나를 제시해주었고, 옴마가 보여준 가족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내게도 큰 발판이 되어주었다.
<<49일의 레시피>>는 아내에게 의존하며 살아왔던 남편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남아있는 가족들이 슬픔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처방전과도 같은 책이다. 죽음이라는 슬픈 소재로 시작된 이야기이지만 너무 무겁거나 어둡지 않았던 점이 이야기에 빠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결코 가볍지 않았기에 잔잔한 감동이 크게 와 닿았으며, 긴 여운을 남겨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가족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많은 책을 접해보았지만, 최근 가장 마음에 들었던 소설이었다. 
그 여운과 옴마의 너그러움과 사랑으로 한동안 따뜻함을 간직할 수 있을 듯 싶다. 나는 그렇게 옴마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