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는 바보가 아니다 우리들의 작문교실 14
안도현 지음, 김준영 그림 / 계수나무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67년 베트남전쟁 징집을 거부하여 미국 전역을 발칵 뒤집어 미국 정부로부터 선수 자격은 물론 세계 챔티언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출국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미국 사회의 흑인 차별에 저항하고 반전 평화 운동에 불을 지피는 사회 운동가였던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

검은 눈동자보다 흰자위가 더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둥근 눈, 선명하고 굵은 눈썹과 쌍꺼풀, "썰면 한 접시는 되겠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두툼한 입술이 무하마드 알리와 똑같아 ’알리’라는 별명을 가진 판수는 두터운 윗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언제난 콧물을 달고 다녔고, 콧물이 안 보이는 날은 입가에 끈적끈적한 침을 흘리고 다녔다.
알리의 모습 때문에 어른들을 판수를 바보 취급하기 일쑤였고, 동네에서 꽤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인정받았던 ’나’의 부모는 알리와 어울려 다니지 말라는 말을 수백 번 더 들어야했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보다 알리가 오히려 더 현명하고 용감하고 섬세한 아이임을 알고 있었고, 어른들의 알수 없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알리와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다.

망을 봐주는 조건으로 동네 형들에게 백로 알 두개를 건네받은 나는 알리에게 하나 건넸지만, 알리는 "이 알 속에는 백로 한 마리가 들어 있어." 하며 알을 제자리에 갖다 놓기 위해 소나무에 올라갔다가 다리를 삐었고 덕분에 아버지에게 허리때로 흠씬 두들겨 맞고도 히죽 웃었다. 길을 걷다가 벌레들을 밟을까봐 고개를 숙이고 다녔고, 수업시간에 화장실에 갔다가 처음 본 나비가 어디에 사는지 궁금해서 수업을 고스란히 빼먹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다리 하나를 잃은 왕 하사 아저씨와 친했던 덕분에 베트남에서 가져온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던 주인공은 친한 친구인 알리와 텔레비전을 볼 수 있도록 했지만, 알리는 아직 텔레비전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이들을 생각했고 알리 덕분에 토요일 저녁 일곱 시에는 왕 하사 아저씨네 국수 공장 뒷마당에는 텔레비전 시청회가 열리게 되었다.

알리의 머리가 아니라면 이 세상 어느 부자도 이렇게 작은 텔레비전 하나로 잔치를 연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알리는 실제 생활은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부자였다고 생각한다. (본문 86p)



알리네 가족은 알리네 할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알 수 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동네를 떠나야했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열세 살의 어린 이들은 어떻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하는지도 모른채 헤어지고 말았다. 34년이 흐른 뒤 듣게 된 알리의 이야기는 어린시절 보아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조 위원장이었던 판수(알리)는 동료들을 위해 35미터 크레인 위에서 113일을 투쟁한 끝에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랬다. 그 시절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았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부모나 선생님 같은 어른들에게 고분고분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존경해야 하고, 반대로 공산당을 가장 증오해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궁금한 게 있어도 함부로 질문을 하지 못하게 어른들은 우리의 입이 무거워지기를 바랐다. 알리네 아버지가 알리를 피멍이 들도록 때려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으며, 학교에서 가죽 잠바가 아이들을 꼼짝 못하게 다루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나쁜 소문 때문에 알리네가 이사를 가야 하는 일이 벌어져도 이웃들은 누구 하나 동정을 보내거나 연민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본문 134p)

아이들의 마음보다는 겉모습과 좋은 성적으로 아이를 판단하는 어른들에게 알리는 바보였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작은 생물들의 목숨도 소중히 여겼던 아이의 마음은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 못했기에 바보가 되었다.  끝내 다른 노동자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던 알리는 평생 바보같이 살다 갔다는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바보가 아니라 영웅이었음을 알았고, 자기 몸속에 평생 동안 들어 있던 날래를 꺼내어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알리는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외모와 닮아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하마드 알리의 용기와 닮아 있었다. 
여전히 우리는 겉모습만으로 잘 못된 편견을 갖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한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런 ’바보’가 있어야 더 좋은 사회로 변화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기꺼이 ’바보’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보’를 비난하고 욕하는 못난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순수함’을 찾기 위해서 동화를 읽곤 한다는 말을 하곤한다. 많은 동화책을 읽었지만 아직 나는 순수함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나만의 이익을 챙기기 급급했기 때문에 이야기 속에서 들려주는 순수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알리’와 놀지 말라고 권유하고 있는 주인공 '나'의 부모가 내 모습과 오버랩되고 있다. 나는 <<알리는 바보가 아니다>>를 통해서 ’순수’라는 것이 무언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열세 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던 주인공들이었지만, 그들은 진정 세상을 올바르게 볼 줄 아는 눈과 마음은 가지고 있었다.



(사진출처: ’알리는 바보가 아니다’ 본문에서 발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