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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길을 따라 - 김인성의 영국문학기행 2
김인성 지음 / 평민사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김인성이라는 여자는 참 글을 잘 쓴다
나는 이렇게 알차고 재밌는 기행문을 읽어 본 적이 없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을 읽으면서 지나치게 감상적인 미사여구와 진부하기 짝이 없는 풍경 묘사에 질린 적이 있는데 ("수도원 기행" 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게 아니라 공지영이 쓴 기행문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 같다 즉 작가 이름값 때문에 팔린 게 분명하다) 이처럼 잘 다듬어진 책은 왜 안 팔리는 걸까?
1990년대에 발간된 책이니 벌써 10여년 전 책이지만, 세월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갈하고 깊이있는 내용이 돋보인다
진지하게 글을 쓰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빼놓지 않는 저자의 글솜씨에 박수를 보낸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도 문학가로 성공하지 못하고 기행문이나 엮어 내는 걸 보면 (본인도 이에 대한 회한이 아주 많은 것 같다) 창조자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녀의 영국 기행문이 돋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영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유적지 한 곳도 허투로 지나치지 않는다는데 있다
학부부터 시작해, 석사, 박사 과정까지 젊은 시절을 바친 학문의 산지를 방문한 느낌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겨우 TV에서 빅벤이나 윈저궁 보고서도 직접 영국에 가면 감탄하면서 보는 게 평범한 우리들의 실상이고 보면, 세익스피어나 버나드 쇼, 토마스 하디 등 세계 문학사에 길이 빛날 작가들을 전공한 저자가 직접 그 문학의 발생지를 방문했을 때의 감동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의 감정을 잘 절제하면서 독자에게 영문학에 관한 깊이있는 지식을 전달해 준다
굳이 기행문이 아니더라도 영국 문학에 대한 입문서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는 영국 문학가는 세익스피어가 고작이었다
물론 세계사 교과서에서 밀턴이나 버나드 쇼, 토마스 하디, 셸리 등 여러 이름을 듣긴 했지만 그저 이름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그들의 작품을 접하지는 못했다
막연하게 이런 영국 작가들이 있더라고 알고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자세한 해설과 더불어 그들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생생하게 다가옴을 느낀다
가장 훌륭한 입문서나 평론서는 그 책을 읽음으로써 원전을 읽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인성의 영국문학기행" 은 훌륭한 책이다
특히 나는 시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는데 시인들의 유적지를 방문해서 거기에 얽힌 일화와 영시를 감상하는 법을 조곤조곤 풀어내는 저자의 이야기에 반해 영시를 읽고 싶다는 새로운 충동을 느꼈다
저자도 지적한 바지만, 시는 번역하면 그 맛을 잃어 버린다
시처럼 운율을 중시하는 문학 형식은 특히 그렇다
잘 알려지지 않은 스코틀랜드나 웨일즈 시인을 알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20세기 초반의 웨일즈 시인인 딜런 토마스는 이 책에서 처음 알았는데, 39세의 짧은 생이 참으로 슬펐다
피카소처럼 예술로 백만장자가 된 사람도 있건만, 딜런 토마스는 짧은 생을 평생 가난과 싸우다 갔다
집도 없어서 창고에서 숙식을 해결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빈곤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만 하다
더구나 독일인 여자를 아내로 얻은 덕에 (그나마 남의 아내를 가로챈 것이다) 1차 대전 당시 영국 정부의 감시를 받았고 급기야는 추방 명령까지 받았다고 한다
아내의 사촌이 당시 독일의 최정예 전투기 조종사로, 영국 군인들에게 악명을 떨쳤기 때문이다
토마스가 세상의 압박에 대항하는 무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연히 시였고, 다른 하나는 불행히도 술이었다
어찌나 술을 좋아하는지 미국 시낭송회에서 번 돈은 영국으로 건너 오기도 전에 술로 탕진했고, 급기야는 네 번째 미국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예술가들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술을 뮤즈로 여기고 지리멸렬한 삶의 방어책으로 생각한 가난한 예술가의 일생이 안타깝다
토마스는 부모에 대한 정이 많아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매일 맥주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권위 유지와 체제 질서로서의 효를 강요하는 유교 문화권의 부모 공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눈 먼 아버지를 모시고 기꺼이 시내로 나가 함께 잔을 기울여 주는 이 가난한 예술가의 정겨운 마음이 따스하게 전해지는 기분이다
영국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 작가들이 많은 것도 의외였다
내가 특히 열광하는 꼬마 곰돌이 Pooh나 귀여운 토끼 피터 래빗,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피터팬 등이 모두 영국 출신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들이 대부분 어린이 동화 작가로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문학가로서 필명을 떨친 후 나중에 동화를 썼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세계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는 보통 내공으로는 안되는 것 같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를 지은 루이스 캐럴은 수학자였는데 책을 재밌게 읽은 여왕이 다음 책을 달라고 했더니 수학 교본을 헌정했을 정도로 신실한 수학 교수였다고 한다
지금도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해리 포터나 BBC 방송국의 텔레토비 등을 생각해 보면 과연 어린이 동화의 원조답다
유명한 추리 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도 말년에는 동화를 썼다고 하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다고 해서 절대 동화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여인의 초상" 을 쓴 헨리 제임스는 미국인이면서도 영국의 격식있는 귀족문화에 반해 평생을 영국에서 산 사람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 미국에 건너 온 이민자였는데 뉴욕에서 큰 돈을 벌어 재산이 300백만 달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도 3백만 달러면 큰 돈이니, 당시에는 대단한 갑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돈 버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에 유럽을 여행하면서 문학이나 철학 등 돈 안 되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도록 격려했다
덕분에 그의 손자들은 유명한 작가나 철학자가 되어 돈과는 거리가 먼 고고한 직업을 택할 수 있었다
헨리 제임스는 당대에도 넓은 독자층을 갖지 못했지만 할아버지의 유산으로 돈에 관계없이 순순한 문학적 열정만으로 글을 썼다고 하니, 19세기 귀족 신사에 대한 부러움이 생긴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에서도 읽은 바지만, 산업 혁명 시대의 귀족들은 고상한 취미의 일종으로 지질학이나 생물학 같은 인문 과학 분야를 택했다고 한다 즉 취미 생활로서 그 복잡한 학문을 즐긴 것이다 유럽이 과학의 혁명을 일으킨 사회적 배경을 알 만 하다)
할아버지 재산이 아무리 컸다고 해도 여러 자손들에게 분배됐기 때문에 정작 헨리 제임스에게 남겨진 돈이 크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는 계절마다 옮겨 다닐 수 있도록 여러 채의 별장을 두고 정원사와 요리사와 가정부 등등 많은 하인들을 거느렸다
그는 영국의 격식있는 귀족문화에 반했기 때문에 재산 증식 대신 풍요롭고 우아한 삶을 즐기려고 했다
부르주아의 사치스런 생활이라고 느끼는 대신, 왠지 모르게 돈 대신 격조있고 우아한 삶을 택한 것처럼 느껴진다
예술가에 대한 내 편견이 작용된 셈인가?
(하긴 제임스는 결혼을 안 해서 재산을 물려 줄 사람도 없었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극작가 세익스피어는 설명하는 것 자체가 구차스러울 정도로 종교로까지 숭배받는 인물이다
호사가들은 인도하고도 안 바꿀 정도로 대단한 문학가라고 떠벌이고, 또 이를 두고 인도 국민을 우롱하는 제국주의의 어처구니 없는 행패라고도 하지만, 어쨌든 영국인을 비롯한 전세계인의 세익스피어에 대한 사랑은 놀라울 정도다
저자는 석사 때 남들이 다 말리는 세익스피어를 졸업 시험 과목으로 택했던 만큼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저자는 남들처럼 자기 전공인 대문호를 찬양하는 대신, 이런 찬양을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오히려 지겹다는 시니컬한 반응을 보인다
왜 사람들은 위인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고 완벽한 인간이라고 정의하길 좋아할까?
성공과 실패, 이기심과 충성심 등 인간을 구성하는 양면적이고 다양한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게 더욱 극적이고 멋있지 않을까?
세익스피어와 관계있는 것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대단한 관광지로 만들어 버리는 영국인들의 광적인 태도에 저자는 질린 듯 하다
16세기 튜더 왕조 시대 사람이니, 왕조차도 세세한 기록을 남기기 어려운 판에, 한낱 배우 겸 극작가에 대한 오늘날의 넘치는 전설과 기록들은 확실히 과한 구석이 있다
아무리 하늘처럼 떠받들어지는 대문호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익스피어의 위대함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고 하니, 괜시리 그 성역에 들어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얄궂은 호기심이 생긴다
진짜 위대한지 아닌지, 내가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겠다는 얄미운 생각 말이다
(그런데 원전으로 읽은 "로미오와 줄리엣" 희곡은 정말 지루했다!!)
"천로역정" 을 쓴 존 번연은 뜻밖에도 직업이 땜쟁이였다고 한다
17세기 청교도 혁명 시대 작품인 만큼 독실한 목회자가 아니었나 짐작했는데 땜쟁이라니, 깜짝 놀랐다
그는 교구 목사에게 감동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됐는데 설교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덕분에 국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상불순죄로 12년간 감옥에 갇혔을 때 번연은 이 유명한 "천로역정" 을 저술한다
번연은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 계층이었기 때문에 목사에게 큰 감흥을 받은 후 순전히 자신의 신앙심과 기도 만으로 훌륭한 저작을 쓴 셈이다
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자기 삶에서 가장 알찬 수확을 일궈낸 작가의 정신력이 놀랍다
그가 이 작품을 쓰는데 몰두하지 않았다면 수감 생활은 한낱 의미없은 고통의 시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눈먼 딸의 옥바라지를 받아 가면서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집필하고, 출옥 후 더욱 훌륭한 설교자가 된 그의 위대한 삶에 감탄을 보낸다
재밌는 것은 번연이 설교자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땜쟁이 일을 계속 했고, 청중들이 원하면 일 하다가 연장을 놓고 유창한 설교를 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들로 볼 때 그는 분명히 에너지가 넘치는 활달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저자가 소개하는 영국 문학가 한 사람, 한 사람에 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다
자랑할만한 문학가들의 생가를 잘 보전해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끄는 영국인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사소한 유적지라 할지라도 일단 예술가와 작품들과 연관을 맺으면 감흥을 자아낼 훌륭한 곳으로 변모한다
이미 그들이 사라지고 사소한 유물들만이 우리를 반긴다 할지라도, 그들의 작품을 읽고 슬퍼하고 기뻐했던 이들은 그 곳을 직접 방문함으로써 다시 한 번 그 때의 감동을 되새길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상업적인 전술이라 비난하더라도 위인들의 유적지를 보존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유적지가 경제적인 이득을 산출함으로써 계속 유지될 수 있음이 다행스럽다
아무리 훌륭한 유적지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잊혀지면 더 이상 보존할 의미가 없어지는 까닭이다
먼저 영문학을 탐독한 뒤 직접 작가들의 발자취를 찾겠다는 야무진 꿈이 생긴다
어쩌면 유럽 100배 즐기기 같은 여행 안내서 대신 배낭여행객들에게 정말 필요한 책은 이런 훌륭한 문학 안내서인지도 모른다
유럽 여행을 계획했을 때 호텔이나 관광지 정보 모으는 나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먼저 읽고 가라는 여행 경험자의 충고가 떠오른다
우리가 관광지를 여행하는 진짜 목적은 단순히 눈요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상징들, 문학과 역사에 녹아 있는 의미를 찾기 위함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