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자리를 찾아서 - 김인성의 영국문학기행 1
김인성 지음 / 평민사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아빠가 권해 줘서 읽은 책인데 정말 글을 잘 쓴다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영국 문학에 대해서도 정통하다
이렇게 잘 쓴 책은 의외로 안 팔리는 경우가 많다
1999년에 나온 책이니 벌써 출간된지 6년이나 지났지만 어떤 문학기행 보다 훌륭하고 참신하다고 생각한다
영국을 여행할 계획이 있거나 영국 문학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은 꼭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시는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더구나 영시는 저자의 걱정대로 일단 번역하면 초등학생 수준의 유치한 글이 되버리기 때문에 제대로 감상하기가 참 힘들다
그렇지만 여기 등장하는 시인들의 이름은, 영국의 국력 덕분인지 교과서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낭만파 시인 워즈워드나 셸리, 키츠, 밀턴 등 시는 모르지만 이름은 유명한 시인들의 이야기가 심도있게 펼쳐진다

실낙원과 복락원으로 유명한 밀턴은 끔찍할 정도로 철저한 청교도였다고 한다
그는 신앙심이 몹시 깊었으나 교회 권력과는 끊임없이 싸웠다
시력을 잃은 후 딸들에게 대필시키며 글을 쓴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런데 정작 딸들에게는 몹시 매정해서 아버지를 싫어했고 밀턴 역시 그녀들에게 대필시키면서도 책에는 손도 못대게 했다고 한다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라 할지라도 시대의 한계는 넘어서기 힘든 법이다
밀턴은 당시에는 파격적일 만큼 진보적인 사상을 주장하고 이혼의 자유 등을 외쳤으나 정작 남녀평등에 대해서는 개념조차 없었다고 하니, 딸들과 여러 아내와의 불화 등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산물 같다

키츠는 약제사이자 외과 의사였는데 19세기 당시만 해도 영국에서 의사의 지위는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낮은 계층이었다고 한다
키츠는 불행히도 폐렴 걸린 동생을 간호하다가 전염되어 약혼녀를 남겨 둔 채 죽고 만다
셸리의 아내 매리는 프랑크슈타인을 만들어 낼 정도로 부부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매리의 어머니가 여성 운동가로 유명한 매리 울스턴크래프트인데 정작 당시 영국에서는 난잡한 여성으로 악명을 떨쳤다고 하니, 시대적 한계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셸리는 불행히도 요트 타고 갔다가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천재에게 걸맞은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바람둥이로 유명한 바이런은 당대 최고의 멋쟁이로 유럽 귀부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사생아가 1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귀족 출신에다가 얼굴도 잘 생기고 시까지 잘 썼으니 요즘 말로 하면 인기 스타였을 것 같다
그리스 독립 전쟁에 나갔다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열병에 걸려 죽고 만다

낭만주의 시인이라고 하는 이 세 사람이 일찍 죽은데 비해 이들보다 앞 시대를 산 워즈워드는 후배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 계관시인이 된다
워즈워드는 쉬운 영어로 영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했는데 오래 살다 보니 늙그막에는 보수적 성향으로 돌아서 후배들의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계관시인이 된 것에 대해 기득권층에 흡수되어 시의 정신을 훼손시켰다고 비난을 많이 받았다
예술가라고 하면 고흐처럼 광적인 구석이 있고 돈과는 거리가 멀고 당연히 권력에도 아무 관심이 없으며 요절할 것 같은데, 90이 넘게까지 장수하면서 그림 판 돈으로 엄청난 갑부가 된 피카소나 역시 80 넘게 살면서 계관 시인의 영예를 안은 워즈워드 등을 보면 예술가에 대한 이런 생각도 그저 대중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예술도 인정받고 돈도 모으고 사회적 지위도 획득하면 더욱 좋다는 결론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올드 랭 싸인의 가사를 보면 좀 이상한 단어들이 많은데 알고 봤더니 스코틀랜드 민요로써 스코틀랜드어로 썼기 때문에 철자가 달랐다
이 민요에 시를 붙인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영웅인 로버트 번즈다
영국은 오랫동안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웨일즈 등으로 나눠져 있다가 16세기에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합병이 됐기 때문에 지역색이 강하게 남아 있다
잘 나가는 잉글랜드에 비해 스코틀랜드는 소외감을 느낄 수 밖에 없어 더더욱 자신들의 것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강하다고 한다
별로 내세울 게 없기 때문에 더욱 한 두 가지 뛰어난 것을 과대포장하듯, 스코틀랜드 지방에 가면 로버트 번즈 숭배는 시인에 대한 찬사 이상이라고 한다
번즈는 그 지방의 민요를 모으고 스코틀랜드 언어로 많은 시를 썼다

뒷쪽으로 가면 영국의 여성 작가들이 등장한다
제일 유명한 여성 작가라면 역시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일 것이다
에밀리와 그녀의 언니 샬롯이 살았던 하워드 지방은 "폭풍의 언덕" 에 묘사된 대로 황량하기 그지없는 지역이다고 한다
에밀리의 다섯 남매들이 서른 살을 전후해 일찍 죽었을 뿐더러 교회 묘지에 가면 오히려 이들은 오래 산 편이라 할 만큼 당시 하워드 지방은 상수도 시설도 형편없고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정도로 환경이 나빳다고 한다
"제인 에어" 를 쓴 샬롯이 이런 환경을 싫어했던 반면 에밀리는 자신이 고향을 사랑해 "폭풍의 언덕" 같은 명작을 남겼다
그런 걸 보면 환경이란 결국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미치는 영향이 달라지는 것 같다

"엠마" 나 "센스 앤 센서빌리티" 같은 영화로 더 유명한 원작자 제인 오스틴도 그녀들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사실 나는 "오만과 편견" 을 정말 지루하고 힘들게 읽었다
지루하기는 "폭풍의 언덕" 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그래도 그 복잡하고 공감하기 힘든 히드클리프 같은 어려운 캐릭터들에 비하면 "오만과 편견" 은 비교적 쉽게 읽히긴 한다
어쨌든 600페이지가 넘는 긴 장편 속에 등장하는 얘기가 오직 어떻게 결혼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라는 사실부터가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랑없는 결혼이 오랜 전통이고, 사랑과 결혼의 결합은 최근에 일어난 풍조라고 하지만, 대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랑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오직 어떻게 하면 조건 좋은 남자를 골라 시집갈 수 있나에만 골몰한다고 불평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18세기 영국에 대한 나의 몰지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오스틴 당시만 해도 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결혼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오만과 편견" 에 등장하는 결혼 타령은, 실은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과업이었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역사나 정치, 전쟁 등과 같은 자신이 잘 모르는 어려운 주제들을 건드는 대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 예리한 필체로 생생한 캐릭터들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즉 아주 쉽게 쓰면서도 날카로운 관찰력이 돋보인다는 얘기다
그녀의 소설들이 영화로 만들어져 생명력을 이어가는 걸 보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건 틀림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오만과 편견" 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
오스틴 역시 에밀리 브론테처럼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살다가 40대에 신장 결핵으로 세상을 떴다

그녀들에 비하면 조지 앨리엇은 행복한 소설가였다
여자 이름이 주는 편견을 피하기 위해 남자 이름을 필명으로 삼은 그녀는 루이즈라는 당대의 지식인과 동거 관계로 지내면서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루이즈는 사랑과 결혼에 관대한 사람으로써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는데 그들이 사생아가 되는 것을 걱정해 자기 호적에 입적시켜 주고 이혼으로 아이들이 피해를 볼까 봐 별거하면서도 결혼 관계를 유지했다
21세기를 사는 내 눈에도 대단하게 보일 정도니, 19세기 영국인들에게 이 남자가 얼마나 특별했을지 알 만 하다
그런 이유로 조지 앨리엇은 루이즈와 결혼 대신 평생 동거를 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 영국에서 동거란 일탈 행위였기 때문에 조지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헌신적인 남편을 만나 평생 보살핌을 받으며 문학적 재능을 마음껏 뽐냈다
올리판트 부인은 조지 앨리엇을 두고, 그 정도로 헌신적인 후원을 받는다면 글을 못 쓰는 게 이상하다고 비판했다는데, 과연 남편의 외조가 대단하긴 했나 보다
그녀의 초상화를 보면 상당히 못생겼지만 한 번 그녀를 만나면 그 매력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었다고 하니, 꽤나 멋진 여성이었을 것 같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20세기의 페미니스트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장식한다
가난한 여류 작가였던 플로라 톰슨은 "가난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작가에게 치명적인 장애다 나는 시작할 준비를 갖추는데만 한평생이 들었다" 는 슬픈 얘기를 남겼다
책 읽는 것은 다른 것에 비해 돈이 적게 든다고 하지만 시간도 많아야 하고 독서력이 쌓이고 글 쓰는 훈련을 하려면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랫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이 방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60대에 처음으로 주목받는 글을 쓴 가엾은 톰슨에 비해 울프는 교양있고 지적인 목사의 딸로 태어나 결혼 후에도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격려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 올라 갈수록 유리 천정은 있었으니, 개인이 사회적 제도의 장벽을 뛰어넘기는 어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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