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복 교수의 고고학 이야기
이선복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생각했던 책은 아니었다
한반도의 고고학적 성과에 대해 권위있는 사학자가 성실한 답변을 해 주는, 교양서이지만 어느 정도 학술적인 체계가 갖춰진 책인줄 알았는데 문화재 보호 개념이 희박한 한국의 열악한 현실을 개탄하는 칼럼류의 글이 많아 당황스러웠다
충분히 새겨 들을만한 비판이었지만 어쨌든 원하는 내용은 아니어서 많이 아쉽다
그래도 평소 막연하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용들이 실제로 맞다고 확인받을 수 있어서 읽은 보람이 있다

 

내가 그럴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민족과 단군에 관한 내용이었다
민족주의와 역사를 결부시키는 일이야 말로 가장 위험한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연 한민족 북방기원설이나 단군의 실체, 더 나아가 한민족이 중국 북방 일대를 다스렸다는 주장이 매우 의심스러웠다
또 한국인의 유전자가 몇 %는 북방 기원이고 몇 %는 남방 기원이라는 말도 과연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끼워맞추기식은 아닌지 굉장히 의심스러운 대목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고고학을 전공한 저자도 그런 일반화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못박는다
한민족이 파미르 고원에서 기원했다는 말은 그야말로 코메디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대체 민족의 기원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다
왜냐면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이래 한 번도 그 맥이 끊긴 적이 없었고 외부로부터 유입과 유출은 계속 이어져 왔기 때문에 특별한 기원을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느 얘기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조상을 찾는다는 발상도 말이 안 되는 게 현재 한국인의 유전적 특성이 고대인의 유해에서 몇 가지 발견됐다고 해서 그 부분만 특별히 강조해 조상이라는 관계를 맺을 수도 없는 일이고 유전적 다양성은 너무나 광범위 하기 때문에 일부 몇몇 특성을 가지고 섣불리 우리 조상이다, 시조다 라고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한반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느냐를 추론할 수는 있겠으나, 한민족이라는 용어부터가 매우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조상을 찾는다는 말도 결국은 관념적인 말장난에 지나지 않다는 얘기다

 

더 놀랬던 점은 애니미즘이니 토테미즘이니 하는 게 19세기 서구에서 나온 이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단군이 곰을 숭상하는 무리와 호랑이를 숭상하는 무리의 결합이라는 현 국사 교과서의 기술도 학자들이 다만 그렇게 해석할 따름이지 실제적인 증거를 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한다
사실 저자의 이런 비판적이고 실제적인 태도 때문에 책 전반에 걸쳐 뚜렷한 주장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그러고 보면 재야 사학자가 강단 사학자에 비해 진취적이고 실제적이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이른바 재야 사학자라는 사람들이 훨씬 더 정치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저자의 말마따나 비파형 동검이 발견되는 곳은 전부 고조선 지배 영역이었겠는가?

 

한반도의 구석기는 70만년 전부터 시작했다고 국사 교과서에 나오지만 실제로 이것을 증명할 만한 유물은 없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상원 검은모루 동굴이 50만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라고 북한에서 주장했으나, 현재는 북한에서조차 이 주장을 폐기처분 했고 그 유역은 동물 화석 지역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70만년 주장은 어떻게 버젓이 국사 교과서에 실린 것일까?
저자 생각으로는 중국에서 대략 70만년 전 쯤에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기 때문에 최초, 최고, 최대의 삼최증에 걸린 학계에서 그렇다면 우리도, 하는 식으로 정설로 만들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저자 말마따나 100만년 전 유물이라도 발견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으나 어쨌든 현재로서는 30만년 전 유물조차 확실한 게 없다고 하니, 아무리 민족의 자존심이 중요하다고 하나 학문적인 공정성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민족의 기원이 오래 됐다고 해서 특별히 그 후손들의 자부심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역사가 미천하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고 보면, 나 역시 저자처럼 무조건 우리 것이 최고라는 허황된 자존심 보다는, 근거가 있는, 타당성 있는 보다 정확한 가설을 제기하는 쪽이 훨씬 더 역사발전에 이바지 할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과 매우 일치한다

 

저자는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를 대략 기원전 5천년 전부터 기원전 천 년 전으로 잡고 있다
당시 경기도 일대 인구를 어림잡으면 천 여명을 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또다시 4천년의 역사를 갖는 단군 조상론은 앞뒤가 안 맞는 가설이 된다
아다시피 단군은 국가의 형태를 띄니 못해도 청동기 시대는 되야 가능한 얘긴데, 천 여명의 인구 확보도 못한 신석기 시대에 어떻게 국가를 수립했겠는가?
4천년 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면 아마도 백성 모으기가 무척 힘들었을 거라고 저자는 일축한다

 

고인돌이 발견되는 청동기 시대가 족장사회였다는 점도 저자는 반대한다
이런 용어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 족장이란 강력한 지배 계급을 뜻하는데 전라남도에만 해도 확인된 고인돌 수가 2만이 넘으니 이것들이 죄다 족장들의 무덤이라면 대체 그 좁은 땅에 족장 세력이 얼마나 많았다는 얘긴가?
당시 인구로 미뤄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저자 생각으로는 고인돌이 강력한 권력을 지닌 자의 무덤이 아니라, 영국의 스톤헨지처럼 특정 사안에 대한 공동체의 기념물 같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인돌의 수는 아마도 사회집단의 가구수와 엇비슷 하지 않겠냐는 얘기다
(모든 고인돌을 전부 이렇게 설명하는 건 아니고 창원 덕산리에서 발견된 거대 고인돌 같은 경우는 권력 집단의 등장으로 본다 곧 이것은 삼한이나 가야와 같은 강력한 사회집단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는 너무 틀려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학계의 주장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이 분이 소수파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근거가 뒷받침 되지 않은 당위적인 주장은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주의해야 함은 분명하다

 

가끔 한국의 고대사를 읽으면서 놀라는 점은, 삼한이 성립된 시기가 초기 철기 시대인 기원전 100여년으로 잡고 있는데, 그 때 이미 로마는 지중해를 제패하고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 같은 위대한 기록을 남겼을 정도로 발달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시 이제 겨우 삼한이 세워질 무렵에 이미 한제국이 세워져 사마천은 사기를 쓰고 있었으니, 대체 우리의 고대사는 왜 이렇게 알려진 게 없다는 말인가?
심지어 신라는 예수님이 태어나던 무렵에 세워졌으니, 아무리 생각을 해도 박혁거세와 예수님의 탄생은 잘 매치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고대사는 먼먼 전설 속의 이야기 같다
한반도의 발전이 고대사에서 그만큼 처진다는 얘긴지, 아니면 기록문화의 부재 때문에 워낙 알려진 게 없다는 얘긴지 모르겠다

 

한나라의 낙랑군 설치를 아예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한반도에 철기가 보급된 것은 낙랑군 설치와 비슷한 연대인 기원전 1세기 무렵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철기가 사용된 시대가 기원전 2세기였고, 한나라가 평안도 부근에 낙랑군을 세운 기원전 108년을 전후해 한반도에 비로소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한반도의 낙랑군 설치를 지지하는 근거로 본다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설을 부정하는 이덕일 같은 사학자의 근거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여하튼 중요한 건 당위성이나 명분이 아니라 주장을 입증할 만한 근거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추가하자면, 저자는 인간의 중요한 특징을 직립보행, 도구 사용, 사회생활, 언어 사용 등으로 본다
각 특성의 배경을 살펴보자면,


1. 직립보행은 삼림에서 초원으로 변한 자연환경에 적응한 결과다
2. 도구는 인간 뿐 아니라 영장류도 사용하는데 차이점은 인간은 일회적인 사용에 그치는 게 아니라 반복적은 사용을 통해 지식을 축적해 더 나은 상태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3.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수명은 대략 12세 전후이고, 8세 이후 첫 임신을 했다면 자식이 성년이 되기 전에 이미 부모가 사망했을 것이므로 사회화를 통한 공동 양육이 아니었다면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4. 언어는 대략 20만년 전부터 사용됐을 것인데 근거는 예술활동이나 무덤, 정교한 도구 제작 등은 상징언어가 없다면 공유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인데 막상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모든 가설에는 나름대로이 합리적인 근거가 있음을 깨달았다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책이긴 하지만, 솔직히 상당히 산만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엮으려는 게 아니라, 매달 발행하는 월간지의 칼럼 형식으로 쓴 글들을 모은 것이라 어쩔 수 없이 통일성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문제지만 말이다
차라리 문화재 발굴의 어려움이나 정부의 대책 미비 같은 문제점을 하나의 장으로 묶고, 학술적인 얘기도 따로 묶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발표된 시대 순으로 죽 나열한 것 같은데 주제가 너무 왔다갔다 해서 읽을 때 슬그머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저자로서는 경주에 고속철도를 지나가게 한다거나, 조선총독부였던 중앙박물관을 일시에 헐고 유물을 다른 곳에 임시보관 하는 것과 같은 무지몽매한 정부 정책이 너무 어처구니 없어 열변을 토했던 것 같지만 하여튼 저자의 울분과 학문적인 얘기가 뒤섞여 일관성이 떨어지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다
물론 각각의 얘기들은 죄다 새겨들을 만한 문제다
나 역시 아직 새 박물관이 개장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8월 15일을 기해 기존의 박물관이었던 조선총독부를 헐어야 했는지 매우 의아해 했던 사람이고, 경주에 경마장을 짓는다거나 고속철 노선을 만든다는 것도 개발과 문화재 보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막연하게 고고학 하면 멋지게만 생각했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아마도 공룡과 관련된 그림책에서 모자를 쓰고 돋보기를 들이대는 서양 고고학자들의 사진을 보고 동경을 품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생각했던 고고학은 구석기 유물을 찾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 인간이 살기 이전의 고대 세계에 공룡과 같은 사라진 생물들의 화석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국에서 연구를 하는 저자와 같은 실제적인 고고학자는 무척 생소하게 느껴질 수 밖에
그러나 역시 고고학은 매력적인 학문임이 틀림없다
인간의 태고적 모습을 누구보다도 가장 근접하게 그려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앞으로 이런 고고학 관련 책들이 많이 출판됐으면 좋겠다
더불어 민족정통론 같은 이론에 맞서 실증사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책들도 많이 출판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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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의 재구성 - 히트하는 영화의 진실 혹은 거짓
김희경 지음 / 지안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서울 가는 버스 안에서 읽은 책이다
책 읽을 때는 비행기 만한 곳이 없는데 그래도 장시간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버스도 괜찮은 독서 공간이다
좀 흔들리기는 하지만 일부러 쉬운 책을 골랐는데 생각처럼 아주 쉽거나 재밌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영화를 분석한 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저자가 미국에서 연수하는 동안 헐리우드 영화를 분석해서 쓴 책이다
그래서 우리 실정과 좀 다르기 때문에 지루한 부분도 있었고 눈에 확 들어오지 않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저자의 말대로 한국 영화계는 헐리우드를 모델로 따라가기 때문에 참조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여기서 언급되는 거의 모든 영화들이 국내에서 개봉됐다는 점만 봐도 헐리우드와 한국 영화계의 밀접한 관련성을 알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스크린 쿼터제에 대한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무 민감한 소재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작년에 나온 책이라, 즉 스크린 쿼터 폐지 논란이 아직 본격화 되기 전이라 넘어간 걸까?
그래도 영화계 최대 이슈라 할 만한 사안인데, 기왕이면 언급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것 같다
아직까지 스크린 쿼터제 유지가 좋은지 나쁜지 판단이 잘 안 서는 독자 입장이라 더욱 그렇다

 

역시 제일 놀라운 부분은 스타들의 몸값이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상업적인 국가 같다
스타들의 몸값이 오른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에이전시 때문이라고 한다
키워 줬는데 배신했네, 이런 감정적인 발언은 끼어들 구멍이 없는 것 같다
모든 계약은 당사자가 아닌 에이전시 직원들을 통해 이뤄지고 그들의 협상 능력에 따라 개런티가 결정된다
스타들이 나온다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닌데 천정부지로 계속 올라가고 있는 까닭은, 사람들이 실패보다는 흥행을 더 오래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책은 대단히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특별히 좋다 나쁘다는 의사 표명을 안 하지만, 분위기 상으로는 영화 찍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게 스타들의 높은 몸값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타들의 몸값은 2500만 달러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배우들이 여기에 들어간다
톰 크루즈, 톰 행크스, 멜 깁슨, 줄리아 로버츠, 해리슨 포드 등이 여기에 속한다
대략 10여 명이 있고, 아래 등급으로 2000만 달러를 받는 배우로는 조니 뎁, 니컬라스 케이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이 있다
그러니까 한국에까지 잘 알려진 배우들 (초등학생도 들으면 알만한 배우들) 이 제일 높은 개런티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뜻밖에도 여자 배우는 줄리아 로버츠와 캐메런 디아즈 두 사람 뿐이었다
이름에 비해 흥행작은 별로 없다는 니컬 키드만이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자료였다

 

배우들에게 2500만 달러를 지급하면 감독들은 얼마나 받을까?
스필버그 같은 유명한 감독들은 보통 1000만 달러 정도를 받는데 피터 잭슨이 킹콩을 찍으면 2000만 달러를 받아 감독들 역시 인플레 현상을 겪을 것 같다고 한다
감독과 배우가 초기 비용으로 이렇게 엄청난 돈을 가져가 버리면 나머지 스태프나 조연 배우들은 뭘 먹나?
한 편의 유명 영화를 찍으려면 보통 1억 달러가 드는데 1/3을 주연 배우와 감독이 가져가 버리니 제작비는 물론 마케팅 비용이 한정없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 나머지 사람들에게 갈 파이는 갈수록 줄어 들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설경구, 최민식, 송강호의 개런티가 5억+알파이고 전도연,장진영 등이 3억+알파라고 한다

 

물론 스타들은 영화를 보러 오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영화 내용을 전혀 모르는데 뭘 보고 극장까지 오겠는가?
특히 연기 잘하는 배우들의 기막힌 연기를 화면에서 볼 때면 나도 모르게 환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책에서 지적한 바대로 스크린 속의 스타가 바로 나라고 착각을 하게 되고 꿈의 나라로 빠져 들면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톰 행크스나 짐 캐리, 해리슨 포드 등은 얼마나 기막힌 연기를 하는가!
당장 나만 해도 톰 행크스나 짐 캐리 나오는 영화는 꼭 본다
그런데 재밌는 건 배우 보고 선택한 영화는 간혹 이건 아니잖아, 할 때도 있지만, 감독 보고 선택한 영화는 거의 다 괜찮다는 점이다
확실히 영화의 분위기나 스타일을 결정하는 사람은 감독이지 배우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감독보다 스타가 두 배 이상 개런티를 받는 걸 보면, 역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원함이 분명하다
(왜 갑자기 금송아지를 숭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오를까?)

 

어쨌든 한 사람이 죄다 가져가 버리는 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병폐인 부익부 빈익빈, 혹은 1등이 죄다 독식하는 문제는 영화판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송강호는 영화 자체의 제작비가 커졌는데 주연 배우가 5억 가져가는 게 무슨 그런 큰 잘못이냐고 항변했지만 (왜 러닝 개런티 얘기는 빼 먹는 거지?)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이 줘 버리면 그만큼 다른 곳에 들어갈 비용은 줄어 들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파이가 커져도 한정없이 클 수는 없는 것이고, 1년에 백만원으로 산다는 스태프들의 어처구니 없는 박봉도 생각해 볼 문제다
또 주연 배우 캐스팅에 이처럼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면 제작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흥행에 성공해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증명되어 온 가장 전형적인 영화를 원하게 될 것이다
수준이 있네 없네 해도 맨날 반복되는 조폭 코미디 영화처럼 말이다
어떤 면으로 봐도 한 사람의 독식은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다

 

프랜차이즈 영화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웠다
인기 있으면 또 만드나 보다 했는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숨어 있었다
속편 만드는 걸 프랜차이즈 영화라고 하는데,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처럼 한 편으로 만들기 어려워 기획 단계부터 속편을 준비하는 거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속편들은 전편의 재탕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아닌 기획의 승리가 되기 십상이라고 한다
전편보다 나은 속편 없다는 말이 단순한 속설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창의성이나 발전 지향적인 점은 찾기 힘들고, 전편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 지루하고 틀에 박힌 영화가 될 수 밖에 없다
당장 떠오르는 영화만 해도 스피드2, 미이라 2 등 재미없는 속편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제작사 입장에서는 전편의 성공으로 관객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된 영화를 또 만드는 게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배트맨 시리즈나 리셀 웨폰 시리즈, 스파이더 맨 시리즈, 터미네이터 시리즈 등 마치 연속극이나 되는 양 시리즈물의 양산은 결국 창의적인 새로운 양식의 영화를 밀어내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한다
우리 영화만 해도 가문의 영광과 두사부일체 시리즈물은 아, 정말 너무 지겨워 이제 그만 좀!! 이라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다
꼭 속편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다 못해 소설이나 드라마의 각색이라도 해야 안심을 한다고 한다
일단 검증이 되야만 투자를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2004년 최우수 작품상 후보 중 오리지널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하나에 불과했다고 한다
오늘 신문을 보니 가문의 영광은 또다시 4편을 기획하고, 마파도 역시 2편을 찍고 있다고 한다
안전한 속편 제일주의 보다는 보다 창의적이고 새로운 실험물들이 많이 나와서 영화가 상업성 속에서도 예술을 추구하는 면모를 보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의미에서 독립 영화들의 고군분투는 무척 반가운 얘기다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기 때문에 확실하게 흥행 요소를 갖춘 전형적인 영화 외에는 선뜻 투자를 안 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된지라, 신인 감독이나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감독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비단 예술 영화가 아니라 할지라도 새로운 스타일은 외면받기 일쑤다
더구나 "갱스 어브 뉴욕" 이 흥행성은 물론 아카데미에서 조차 외면받자 그 후로 실험적인 영화는 더욱 외면을 받았다고 한다
나도 그 영화 보긴 봤는데 세 시간 가까운 시간에다가 전혀 익숙하지 않은 스토리 전개에 황당했던 생각이 난다
(아마도 디카프리오가 안 나왔으면 안 봤을 거다)
어쨌든 돈이 워낙 많이 들어가니 더욱 안전한 코드의 영화만 양산이 되고 실험적인 영화는 외면을 받아 설 자리가 좁아진다
그렇지만 헐리우드는 한국 영화계에 비하면 여전히 새로운 형식의 영화가 끊임없이 수혈되는 역동적인 곳이라고 한다
썬댄스 영화제나 독립 영화관 같은 곳이 관객에게 다가갈 기회를 준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도 독립 영화제나 그런 영화관들이 보다 활성화 됐으면 한다
한국 영화가 스크린 쿼터제 덕분에 아무리 잘 나간다 해도 막상 극장에 가 보면 죄다 흥행하는 영화 한 두 개만 걸어 놔 선택하고 말 것도 없는 게 현실이고 보면, 영화계에서도 무조건 보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픽사의 성공도 눈여겨 볼 만 하다
애니메이션은 애들이나 보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몬스터 주식회사를 본 후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
그 후 니모를 찾아서나 아이스 에이지, 앤츠 같은 영화를 보면서 그 정교함에 감탄, 또 감탄을 했고 오히려 에니메이션은 적어도 서사 구조는 확실하기 때문에 어설픈 영화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역시 미국인들도 이야기가 분명하고 그래픽이 정교한 애니메이션을 선호하게 됐고 더구나 영화의 주 관객층이 가족으로 이동하면서 아이들까지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당장 픽사에서 만든 여섯 작품들은 모두 100% 성공을 거뒀다
배우들의 개런티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제작비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진 마당에, 더구나 비싼 투자비 때문에 안전 제일주의로 대부분의 영화가 전형화 되는 마당에, 애니메이션의 성공은 새로운 기대감을 품게 한다
아직까지 우리 영화는 애니메이션 분야가 약하지만 오히려 이런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는 걸 보면 한 번쯤 도전해 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는 역시 돈을 벌어 들이는 매우 상업적인 분야임을 느꼈다
영화 투자는 거의 도박이라 할 정도로 손익을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단순히 예술 운운하면서 개인의 취향에 맞출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림이나 문학, 음악 등은 개인의 노력 만으로 예술성을 추구할 수 있지만 영화는 워낙 돈이 많이 들어가는 분야이니, 영화의 상업성 추구는 그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필연적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화는 또 하나의 예술 분야이고 단순히 대중 예술에 머물지 않고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는 매력적인 장르다
더구나 잘만 되면 수많은 관객들에게 그 예술성을 어필할 수 있으니 더욱 매력이 큰 곳이라 하겠다
영화계가 단순히 돈에 매이지 않고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쫓는 매혹적인 분야가 되길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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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0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상업주의를 벗어날 수는 없는 건데, 우리나라도 헐리우드도, 저 억소리 나는 몸값에 망연자실 할 때가 있어요. 도대체가 돈의 단위가 다르잖아요ㅡ.ㅡ;;;;

marine 2006-11-09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그 쪽은 국민소득도 높고 그러니까... 그래도 좀 많긴 많죠? 대체 얼마나 큰 돈인지 짐작이 안 가요
 
독일, 내면의 여백이 아름다운 나라 타산지석 8
장미영.최명원 지음 / 리수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쉽게, 편하게 읽은 책이다
모든 책들이 이렇게 술술 넘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250페이지 정도 되는 중간 분량의 책인데 내용이 말랑말랑 해서 2시간도 못 되서 다 읽어 버렸다
앞서 읽은 "그대로 두기" 나 "레니 리펜슈탈" 등의 책은 외국 이름과 지명 때문에 거의 한 자 한 자 눈에 바르면서 지나가느라 시간이 꽤 걸렸는데, 역시 이 책은 독일 이야기지만 한국인이 쓴 거라 쉽게 술술 넘어간다
어떤 책이든 번역서는 문장의 어색함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듯 하다

 

책을 읽을 때 가능한 한 편견없이 대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앞서 읽은 "독일문화읽기" 와 비교하게 됐다
앞서 읽은 책이 독일 문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같은 주제에 대해 저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런데 두 책은 성격이 다소 다르다
"독일문화읽기" 가 독일인들의 가치관이나 문화적인 측면에 대해 썼다면 ( 더 정확히는 독일인들의 민족주의 부활을 비판함) 이 책은 독일인의 생활 습관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썼다
그래서 더 내용이 말랑말랑한 것 같다
어쩌면 나의 잘못된 생각일지 모르겠으나, 책의 저자들은 독일의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고 신문을 열심히 보지 않은 듯 싶다
정치, 사회 문제들에 대한 언급이 너무 없어서 좀 놀랍다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이 쓴 미국 생활기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비단 이 책만 그런 건 아니고, 여태까지 내가 읽은 독일 관련 서적들은 거의 다 그렇긴 하다
그러고 보면 박노자의 노르웨이 이야기는 분석력이 뛰어난 편이다
물론 그가 노르웨이에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자이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로 기대했던 수준은 아니었다
미국에 관한 책은 너무 많아서 탈이지만 다른 유럽 관련 체험기는 비교적 드문 편이고 그나마 프랑스나 영국이 좀 있지, 독일 체험기는 워낙 적기 때문에 상당히 기대를 했었다
제목도 얼마나 멋진가!
그러나 역시 딱 유학생 수준에서의 피상적 고찰들 뿐이라 내용이 너무 말랑말랑 해서 다소 실망하긴 했지만, 그러나 편집도 잘 되어 있고 역시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책장은 쉽게 잘 넘어갔다
적어도 "독일문화읽기" 보다는 훨씬 균형잡힌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책이 얘기하는 신나치주의 부활의 징조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높은 실업률을 외국인 노동자 탓으로 돌린다거나, 독일민족제일주의 같은 위험한 발상법들은 충분히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읽은 책에서는 독일이 민족주의나 애국심 같은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과거 청산에 철저하다고 나왔다
비슷한 시기에 유학한 이들의 시각이 사뭇 다르다
또 "독일문화읽기" 에서 지적 스노비즘이라고 비판했던 독일인들의 학문적 욕구를, 이 책에서는 교양시민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옆 나라 프랑스에서 혁명을 일으켜 군주정을 갈아 엎었을 때 독일은 이른바 계몽군주라는 미명 하에 진리 탐구의 자유만 허용하는 식의 교묘한 통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군주정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독일인들이 특별히 학문 탐구에 열성적이었던 배경에는 그 외의 모든 정치적 자유가 금지됐기 때문에 그나마 열려 있던 지식에의 욕구라도 채우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역사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저자는 독일의 시민 계급을 교양있는 중산층으로 명명한다
독일 전역에 음악회가 번창하고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으로 대표되는 독일 서점가의 번성도 대단하고 특히 시나 소설을 낭독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강성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로든 수준있는 문화가 여러 사람들에게 향유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독일 대학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대학생들이 한정없이 대학에서만 머무르려고 하니 차라리 수업료를 부과하자는 것이 확실히 요즘의 이슈인 모양이다
이 책 외에도 여러 책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걸 봤다
완벽한 사회 복지정책의 표상이라고 할 무상교육 제도가 삐걱거리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인간은 이기적인 동기가 있어야만 발전하는 존재일까?
어쨌든 교육열 높은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대학 등록금 무료가 계급 격차를 줄일 수 있는 환상적인 대안으로 들린다
(늘 하는 말이지만, 돈 없어서 공부 못하는 사람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독일의 숲 이야기는 가슴 설레는 부분이었다
프랑스도 그렇지만 독일도 산이랄 게 없고 국토의 대부분이 평지이고 울창한 숲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래서 산책할 곳도 많고 숲길을 이용한 자전거 정책도 활발하게 이뤄진다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떼제베를 타고 프랑스 시골을 달릴 때 (예약 미스로 야간 열차도 못 타고 비싼 돈 주고 주간 열차 탔을 때) 산은 없고 죄다 들판만 있어 깜짝 놀랜 기억이 난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산 없는 풍경은 상상할 수 없는데, 확실히 유럽은 숲이 바로 우리의 산과 비슷한 정서를 주는 것 같다
그래서 게르만 신화들은 숲과 관련된 것이 많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독일인들은 녹생당까지 만들 정도로 환경 보호에 더 열심인지도 모른다

 

맨 마지막에 실린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 얘기는 가슴이 뜨끔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 차관을 빌릴 때 지급보증을 해 준 것이 바로 파독 근로자들의 월급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독일로 떠난 우리의 근로자들이 조국의 경제발전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만 하다
저자의 지적대로 당시 독일로 떠난 근로자들은, 특히 간호사들은 집안의 유일한 희망인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이야 안 들어도 훤할 것이고, 그나마 위안을 삼자면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근로 환경은 좀 나았지 않았나 싶은 점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 역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좀 더 선진적인 근로 환경을 제공해야 할텐데 참 부끄럽다
어쨌든 그들의 노고에 대해 고국이 새롭게 그 의의를 되새기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재밌게 읽은 책이다
독일 문화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들여다 보면 좋겠다
너무 거창한 기대는 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면 유쾌하게 2시간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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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박물관전 대도록
뱅상 포마레드 외 지음, 고형원 외 옮김 / 지엔씨미디어(GNCmedia)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아쉽다
알라딘에서 품절이길래 예스24에서 구매를 했는데 오늘 들어왔구나!!
가격도 5% 할인해 주고 적립금도 570원이나 준다
예스24에서는 원가 그대로 샀고 적립금은 200원 밖에 안 되던데...

그러나 책 내용은 좋다
일단 판형이 크기 때문에 그림이 한 면을 다 차지하고서 있다
설명은 매우 꼼꼼한 편
아무래도 이번에 전시되는 70편만을 다루기 때문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형태의 미술책이 마음에 든다
주제를 명확히 한정지어 가능하면 자세히 설명해 주는 그림읽기가 훨씬 도움이 된다
주마간산은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번 전시가 풍경화 위주이다 보니 비슷한 그림들이 계속 반복되서 다소 지루한 구석이 있다
또 설명 역시 상당히 현학적인 편이다
하여간 200페이지가 넘는 매우 꼼꼼한 책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열심히 읽고 전시회 가서 꼼꼼하게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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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08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고서 국립박물관 가면 감상이 더 잘 되겠어요. 안 그래도 오늘 포스터 보고 님이 떠올랐죠^^

marine 2006-11-08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이거 완전히 전과 수준이예요^^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노란색의 예쁜 표지만큼이나 내용도 훌륭하다
어쩌면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소비형태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시도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자료 의존적이라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한국인이 쓴 책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서구의 유명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는데 그친다는 점이 늘 아쉽다

 

소비란 무엇인가?
소비가 단순히 재화의 효용을 없애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 확장된 뜻이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소비라고 하면 흔히 낭비와 연결되어 도덕적으로 나쁜 의미와 연결되기 때문에 더 뜻밖이었다
소비가 곧 위세품, 즉 지위의 과시, 혹은 다름의 표지자라는 것은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소비는 곧 비축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더불어 문화를 발전시키며 공동체 사회에서 정을 베푸는 행위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예의범절이나 선물이라는 것도 사실은 비합리적인 소비처럼 보이나 사람들간의 정을 표현할 때 없어서는 안 될 행위들이다
또 예술품이야 말로 먹고 사는 데 아무 영향도 못 미치는 지극히 소비적이고 낭비적인 사치품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 부르고 인류가 이룩해 온 고귀한 정신의 표현으로 생각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야, 즉 내일을 위한 비축품 (여기서는 이걸 낭비로 부른다)이 든든해야 비로소 고차원적인 것, 즉 예술 (이것도 역시 낭비로 볼 수 있다) 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치를 상류계급의 지위추구로만 본 베블런의 현시적 소비론은 절반만 맞는 셈이다
또 크게 보면 소비 혹은 사치, 낭비는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 중 하나다

 

이 책에서는, 진보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부르주아적인 명성과 소비를 누리는 좌파 지식인들을 비꼰다
"혁명을 팝니다" 에서 비판한 반문화와 비슷한 개념이다
또 끊임없이 남과 다른 차이, 차별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보면, 좌파 지식인들의 평등 이론이 과연 현실에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영어 조기 교육이 대표적인 예다
영어가 힘인 사회에 살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은 조기 유학을 보내 자녀를 네이티브 스피커로 만든다
반면 없는 집 애들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자연스레 사회의 하위 구조를 형성한다
계급이 대물림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고리를 끊어야 할까?
저자는 영어 조기 교육을 공교육에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영어 사대주의니 민족 자주성이니 운운하면서 공교육의 영어 조기 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조기 유학 보낼 수 없는 사람들의 자식들을 계속 하층민으로 고정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이 옳든 그르든)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 같다

 

저자는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이론을 들어 미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풍요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소비는 상류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안젤리나 졸리가 매고 있는 루이비통 가방을, 조금만 애를 쓰면 평범한 한국의 직장 여성도 얼마든지 맬 수 있다
물질의 소비가 특정 계층의 차이 표지 기능을 상실해 가기 때문에 상류층은 문화의 소비를 통해 다름을 드러낸다
더구나 이 문화적 감식안이란 것은 쉽게 생기는 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의 오랜 교육과 훈련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니 교양이나 예술적 심미안 등은 어려서부터 고급 교육을 받아 온 전형적인 상류층의 가장 훌륭한 표지자 노릇을 할 수 있다
벼락부자 보다 재벌 2세를 더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갑자기 떼돈을 번 사람은 문화적 우월성을 누리기 힘들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고급 문화를 익히고 교양과 매너 등을 몸에 익힌 재벌 2세는 돈만 많은 게 아니라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죄다 재벌 2세가 차지할 수 밖에!!

 

그래서 부르디외는 계급의 차이를 줄이는 방편으로 미술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비단 미술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문학이나 음악 등 인문학 전반의 교육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즉 공교육에서) 인문학 교육을 철저하게 시킨다면, 즉 예술을 향유할 능력을 기른다면 지식과 문화라는 상징자본이 계급성을 띄게 된 오늘날 (또 물질적 소비가 거의 평등해져 버리기도 한) 계급적 격차를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고 강조한다
수요일 하루는 학교에 가지 않고 루브르 미술관에 모여 예술 작품을 관람하는 프랑스 초등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나 역시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고 있는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는 무리인 것 같다
우선 한국 상류층의 표시가 과연 미적 심미안, 예술적인 감각인지 의심스럽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자본이 한국 사회에서 위세품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클래식 음악은 고사 직전이라고 징징대고 출판의 위기는 어떻게 왔는가?
상류층이 되기 위해 명품을 구입하듯 상류층으로 보이기 위해 인문학도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게 아닌가?
하다못해 지적 허영심을 과시하기 위해 책이라도 한 권 더 읽고 교양강좌라도 나가고 의무적으로라도 음악회나 미술관에 가야 할 거 아닌가?
상류층처럼 보이기 위해, 혹은 상류층을 지향하기 위해 열심히 루이비통 가방은 사들이지만 (한 달간 라면만 먹더라도 말이다) 비싼 음악회에 가거나 책을 사기 위해 굶는다는 사람은 못 봤다
오히려 책 많이 읽는다고 하면 구식케케먹은 사람, 쿨하지 못한 사람, 따분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한국 사회에서 프랑스의 상징 자본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기엔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그렇지만 학교 교육에서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교육을 강조하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인문학이 계급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나 역시 단순한 암기 위주가 아니라, 실제로 예술을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현장 교육이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일주일에 하루 쯤은 국립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서 수업을 듣는다면 얼마나 신나겠는가!!
상징 자본의 소유가 위세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인문학은 더 이상 죽은 학문이 아니고 계급 차이를 좁힐 수 있는 훌륭한 사회 통합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소비 성향과 그 의미를 분석한 훌륭한 책이다
비단 자본주의 사회 뿐 아니라, 소비는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소비를 죄악시 하는 것은 인간의 욕구 (남들과 다르고자 하는 욕구, 남보다 잘나 보이고 싶은 욕구) 를 부정하는 피상적인 고찰일 뿐이다
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보는 기분이 든다
더불어 위선적인 이른바 진보 지식인에 대한 일갈도 일면 시원한 구석이 있다
(아마 불편해 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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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8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ine 2006-11-09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백수라서 시간이 많아요...
문화 때문에 옷 못 사 입는 사람이 바로 저 같은 부류인데 (아주 심한 건 아니지만) 책에서 나온 것 같은 상징자본으로 생각되기는 커녕 어설픈 인문주의적 성향 때문에 놀고 있다는 비난을 듣고 있는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