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복 교수의 고고학 이야기
이선복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생각했던 책은 아니었다
한반도의 고고학적 성과에 대해 권위있는 사학자가 성실한 답변을 해 주는, 교양서이지만 어느 정도 학술적인 체계가 갖춰진 책인줄 알았는데 문화재 보호 개념이 희박한 한국의 열악한 현실을 개탄하는 칼럼류의 글이 많아 당황스러웠다
충분히 새겨 들을만한 비판이었지만 어쨌든 원하는 내용은 아니어서 많이 아쉽다
그래도 평소 막연하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용들이 실제로 맞다고 확인받을 수 있어서 읽은 보람이 있다

 

내가 그럴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민족과 단군에 관한 내용이었다
민족주의와 역사를 결부시키는 일이야 말로 가장 위험한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연 한민족 북방기원설이나 단군의 실체, 더 나아가 한민족이 중국 북방 일대를 다스렸다는 주장이 매우 의심스러웠다
또 한국인의 유전자가 몇 %는 북방 기원이고 몇 %는 남방 기원이라는 말도 과연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끼워맞추기식은 아닌지 굉장히 의심스러운 대목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고고학을 전공한 저자도 그런 일반화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못박는다
한민족이 파미르 고원에서 기원했다는 말은 그야말로 코메디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대체 민족의 기원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다
왜냐면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이래 한 번도 그 맥이 끊긴 적이 없었고 외부로부터 유입과 유출은 계속 이어져 왔기 때문에 특별한 기원을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느 얘기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조상을 찾는다는 발상도 말이 안 되는 게 현재 한국인의 유전적 특성이 고대인의 유해에서 몇 가지 발견됐다고 해서 그 부분만 특별히 강조해 조상이라는 관계를 맺을 수도 없는 일이고 유전적 다양성은 너무나 광범위 하기 때문에 일부 몇몇 특성을 가지고 섣불리 우리 조상이다, 시조다 라고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한반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느냐를 추론할 수는 있겠으나, 한민족이라는 용어부터가 매우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조상을 찾는다는 말도 결국은 관념적인 말장난에 지나지 않다는 얘기다

 

더 놀랬던 점은 애니미즘이니 토테미즘이니 하는 게 19세기 서구에서 나온 이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단군이 곰을 숭상하는 무리와 호랑이를 숭상하는 무리의 결합이라는 현 국사 교과서의 기술도 학자들이 다만 그렇게 해석할 따름이지 실제적인 증거를 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한다
사실 저자의 이런 비판적이고 실제적인 태도 때문에 책 전반에 걸쳐 뚜렷한 주장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그러고 보면 재야 사학자가 강단 사학자에 비해 진취적이고 실제적이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이른바 재야 사학자라는 사람들이 훨씬 더 정치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저자의 말마따나 비파형 동검이 발견되는 곳은 전부 고조선 지배 영역이었겠는가?

 

한반도의 구석기는 70만년 전부터 시작했다고 국사 교과서에 나오지만 실제로 이것을 증명할 만한 유물은 없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상원 검은모루 동굴이 50만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라고 북한에서 주장했으나, 현재는 북한에서조차 이 주장을 폐기처분 했고 그 유역은 동물 화석 지역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70만년 주장은 어떻게 버젓이 국사 교과서에 실린 것일까?
저자 생각으로는 중국에서 대략 70만년 전 쯤에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기 때문에 최초, 최고, 최대의 삼최증에 걸린 학계에서 그렇다면 우리도, 하는 식으로 정설로 만들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저자 말마따나 100만년 전 유물이라도 발견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으나 어쨌든 현재로서는 30만년 전 유물조차 확실한 게 없다고 하니, 아무리 민족의 자존심이 중요하다고 하나 학문적인 공정성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민족의 기원이 오래 됐다고 해서 특별히 그 후손들의 자부심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역사가 미천하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고 보면, 나 역시 저자처럼 무조건 우리 것이 최고라는 허황된 자존심 보다는, 근거가 있는, 타당성 있는 보다 정확한 가설을 제기하는 쪽이 훨씬 더 역사발전에 이바지 할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과 매우 일치한다

 

저자는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를 대략 기원전 5천년 전부터 기원전 천 년 전으로 잡고 있다
당시 경기도 일대 인구를 어림잡으면 천 여명을 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또다시 4천년의 역사를 갖는 단군 조상론은 앞뒤가 안 맞는 가설이 된다
아다시피 단군은 국가의 형태를 띄니 못해도 청동기 시대는 되야 가능한 얘긴데, 천 여명의 인구 확보도 못한 신석기 시대에 어떻게 국가를 수립했겠는가?
4천년 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면 아마도 백성 모으기가 무척 힘들었을 거라고 저자는 일축한다

 

고인돌이 발견되는 청동기 시대가 족장사회였다는 점도 저자는 반대한다
이런 용어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 족장이란 강력한 지배 계급을 뜻하는데 전라남도에만 해도 확인된 고인돌 수가 2만이 넘으니 이것들이 죄다 족장들의 무덤이라면 대체 그 좁은 땅에 족장 세력이 얼마나 많았다는 얘긴가?
당시 인구로 미뤄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저자 생각으로는 고인돌이 강력한 권력을 지닌 자의 무덤이 아니라, 영국의 스톤헨지처럼 특정 사안에 대한 공동체의 기념물 같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인돌의 수는 아마도 사회집단의 가구수와 엇비슷 하지 않겠냐는 얘기다
(모든 고인돌을 전부 이렇게 설명하는 건 아니고 창원 덕산리에서 발견된 거대 고인돌 같은 경우는 권력 집단의 등장으로 본다 곧 이것은 삼한이나 가야와 같은 강력한 사회집단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는 너무 틀려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학계의 주장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이 분이 소수파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근거가 뒷받침 되지 않은 당위적인 주장은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주의해야 함은 분명하다

 

가끔 한국의 고대사를 읽으면서 놀라는 점은, 삼한이 성립된 시기가 초기 철기 시대인 기원전 100여년으로 잡고 있는데, 그 때 이미 로마는 지중해를 제패하고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 같은 위대한 기록을 남겼을 정도로 발달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시 이제 겨우 삼한이 세워질 무렵에 이미 한제국이 세워져 사마천은 사기를 쓰고 있었으니, 대체 우리의 고대사는 왜 이렇게 알려진 게 없다는 말인가?
심지어 신라는 예수님이 태어나던 무렵에 세워졌으니, 아무리 생각을 해도 박혁거세와 예수님의 탄생은 잘 매치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고대사는 먼먼 전설 속의 이야기 같다
한반도의 발전이 고대사에서 그만큼 처진다는 얘긴지, 아니면 기록문화의 부재 때문에 워낙 알려진 게 없다는 얘긴지 모르겠다

 

한나라의 낙랑군 설치를 아예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한반도에 철기가 보급된 것은 낙랑군 설치와 비슷한 연대인 기원전 1세기 무렵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철기가 사용된 시대가 기원전 2세기였고, 한나라가 평안도 부근에 낙랑군을 세운 기원전 108년을 전후해 한반도에 비로소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한반도의 낙랑군 설치를 지지하는 근거로 본다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설을 부정하는 이덕일 같은 사학자의 근거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여하튼 중요한 건 당위성이나 명분이 아니라 주장을 입증할 만한 근거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추가하자면, 저자는 인간의 중요한 특징을 직립보행, 도구 사용, 사회생활, 언어 사용 등으로 본다
각 특성의 배경을 살펴보자면,


1. 직립보행은 삼림에서 초원으로 변한 자연환경에 적응한 결과다
2. 도구는 인간 뿐 아니라 영장류도 사용하는데 차이점은 인간은 일회적인 사용에 그치는 게 아니라 반복적은 사용을 통해 지식을 축적해 더 나은 상태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3.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수명은 대략 12세 전후이고, 8세 이후 첫 임신을 했다면 자식이 성년이 되기 전에 이미 부모가 사망했을 것이므로 사회화를 통한 공동 양육이 아니었다면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4. 언어는 대략 20만년 전부터 사용됐을 것인데 근거는 예술활동이나 무덤, 정교한 도구 제작 등은 상징언어가 없다면 공유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인데 막상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모든 가설에는 나름대로이 합리적인 근거가 있음을 깨달았다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책이긴 하지만, 솔직히 상당히 산만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엮으려는 게 아니라, 매달 발행하는 월간지의 칼럼 형식으로 쓴 글들을 모은 것이라 어쩔 수 없이 통일성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문제지만 말이다
차라리 문화재 발굴의 어려움이나 정부의 대책 미비 같은 문제점을 하나의 장으로 묶고, 학술적인 얘기도 따로 묶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발표된 시대 순으로 죽 나열한 것 같은데 주제가 너무 왔다갔다 해서 읽을 때 슬그머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저자로서는 경주에 고속철도를 지나가게 한다거나, 조선총독부였던 중앙박물관을 일시에 헐고 유물을 다른 곳에 임시보관 하는 것과 같은 무지몽매한 정부 정책이 너무 어처구니 없어 열변을 토했던 것 같지만 하여튼 저자의 울분과 학문적인 얘기가 뒤섞여 일관성이 떨어지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다
물론 각각의 얘기들은 죄다 새겨들을 만한 문제다
나 역시 아직 새 박물관이 개장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8월 15일을 기해 기존의 박물관이었던 조선총독부를 헐어야 했는지 매우 의아해 했던 사람이고, 경주에 경마장을 짓는다거나 고속철 노선을 만든다는 것도 개발과 문화재 보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막연하게 고고학 하면 멋지게만 생각했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아마도 공룡과 관련된 그림책에서 모자를 쓰고 돋보기를 들이대는 서양 고고학자들의 사진을 보고 동경을 품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생각했던 고고학은 구석기 유물을 찾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 인간이 살기 이전의 고대 세계에 공룡과 같은 사라진 생물들의 화석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국에서 연구를 하는 저자와 같은 실제적인 고고학자는 무척 생소하게 느껴질 수 밖에
그러나 역시 고고학은 매력적인 학문임이 틀림없다
인간의 태고적 모습을 누구보다도 가장 근접하게 그려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앞으로 이런 고고학 관련 책들이 많이 출판됐으면 좋겠다
더불어 민족정통론 같은 이론에 맞서 실증사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책들도 많이 출판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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