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버지 - 21세기 인간의 진화론
칩 월터 지음, 이시은 옮김 / 어마마마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새해들어 좋은 책들을 많이 읽고 있어 정말 기쁘다.

좋은 책이 주는 정서적 만족감은 굉장히 큰데 비해 금전적인 노력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오직 약간의 집중력과 시간만 있으면 되는 셈이니, 독서는 마치 공짜로 얻는 삶의 큰 기쁨 같다,

인간의 기원이나 진화에 대한 문제는 흥미로우면서도 모호한 느낌이라 확실하게 정리가 잘 안 되는 분야다.

워낙 발굴되는 화석도 적고 계속 새로운 증거들이 추가되다 보니 역사 분야처럼 고정되지 않는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과 침팬지는 700만 년 전에 분기되어 그들과 함께 살던 열대 숲을 떠나 확 트인 초원으로 나가면서 서서 걷게 되고 무리를 지어 사냥하고 도구와 불을 사용하며 언어까지 발전시키는 뇌의 진화를 겪게 됐다.

자연환경 변화에 잘 맞춰 적응해 갔던 셈이다.

어려서 읽었던 책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시작해 (이게 그 유명한 루시였던 모양이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로 단선 진화했다는데, 요즘에는 심지어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에렉투스가 같이 공존했고 실제적인 조상 관계도 아니라고 한다. 

하긴 우리 인류에게 멸종된 네안테르탈인의 DNA가 5%까지 발견된다고 하니 책에 나온 상상처럼 히말라야의 거대한 설인은 마치 노아의 홍수 전설처럼 우리 조상들이 오래 간직한 사촌들에 대한 기억일까?

인류의 기원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자아에 관한 해설이 아주 흥미로웠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이 자의식일 것 같은데, 앞서 읽은 <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에서도 밝힌 바대로, 동물은 현재만을 의식하기 때문에 생존 이외의 고민이 없는 반면, 인간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고민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얻기 힘들다고 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는 "나" 즉 두뇌가 만들어낸 일종의 환영인 "나"를 자아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인간을 "상상하는" 생존 기계라고 표현할 정도로 인간의 두뇌가 만들어낸 자의식, 창의력이 언어 능력과 합해져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보통 인류학에 관한 책은 복잡하고 어려운 반면 이 책은 참 쉽게 잘 쓰여졌다 싶었는데 저자가 학자가 아닌 저술가여서 대중의 눈높이를 잘 맞춘 듯하다.

인간의 기원과 정신성에 관해 알게 된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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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주변 - 중국의 확대와 고대 중국인의 세계 인식
홍승현 지음 / 혜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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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계기로 이 책을 읽게 됐는지 기억이 안 난다.

오래 전부터 읽을 책 목록에 올려놓고 계속 미루다가 드디어 서고에 가 있는 오래 된 책을 읽게 됐다.

아, 정말 논문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건가?

언제나 모호하기만 했던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기원과 확장 과정에 대해 화이사상과 조공-책봉 제도를 중심으로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는 느낌이다. (좋은 책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 저렴한 표현일까?)

늘 궁금했던 부분이, 유럽은 로마 제국 멸망 이후 다시는 제국이 탄생하지 않았던 데 비해, 중국은 어떻게 이 거대한 나라를 5천 년 이상 유지해 왔는지였다.

중국 역시 로마가 게르만의 침략으로 무너졌듯, 5호 16국으로 대표되는 유목민족의 침략을 숱하게 받아 왔는데도 하나의 문화적 정치적 공동체로서 통일성을 이어온 게 너무 신기했다.

유럽에 기독교가 있다면 동아시아에는 유교와 한자문화권에 덧붙여 바로 이 화이사상과 조공-책봉 제도가 있지 않나 싶다.

중국의 시작은 황하 주변에서 유목민과 농경민이 잡거하던 시절부터 시작해 주나라가 성립되면서 왕이 다스리는 직할지가 예치라는 제도를 통해 점점 확대되어 나갔는데 높은 농경 생산력 덕분에 정치체제와 문화가 발달하면서 이른바 이적과는 분리가 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분리를 위한 구별이었으나 진시황으로 대표되는 황제권이 성장하면서 주변의 이족들을 문화적 포용을 넘어 직접 지배하는 세력권으로 포함시키기 위해 차별하는 화이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이 항상 군사적 우위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다원적인 권력체가 존재한다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조공-책봉제가 시행되었다.

중국으로서는 문화적 우월성을 내세워 이적들을 책봉하지만 내정은 자율에 맡겨 권위를 세우고 이적들 역시 중국의 책봉을 받음으로써 자국에서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윈윈 관계였던 셈이다.

물론 중국의 힘이 커지고 북중국의 혼란으로 점차 남하하게 되면서 주변국들은 중국의 직접 지배 체제로 편입되어 간다.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하면 그저 혼란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중국의 세력권이 매우 확장된 시기였고, 특히 북중국을 지배한 전진의 부견이 중국인 황제 모델을 실제적으로 구현하려 했다는 점이 신기하다.

정말 부견이 비수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동진을 멸망시켰다면 오늘날 한족의 중국은 없었을까? 흥미로운 대목이다.

책 전체가 다 재밌지만 특히 낙랑군에 대한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아직도 한4군은 중국 대륙에 있었고 평양의 낙랑군을 부정하는 이른바 재야 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낙랑군의 중국 지배를 보여 주고 있다.

이족 지배에 대한 열망이 컸던 한 무제가 거의 유일하게 성공적인 중국식 군현 체제를 이식시킨 곳이 바로 낙랑이라는 것이다.

한나라의 힘이 약해지면서 낙랑은 점차 간접지배 형식으로 바뀌었으나 조위가 등장하면서 요동을 안정화 시키는 과정에서 낙랑군에 다시 한 번 지배력을 강화시켜 낙랑은 무려 400년 동안이나 안정적인 중국의 군현으로 남았고 그 후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으나 그 유민들은 고구려에 복속하지 않고 요동으로 넘어가 모용외에게 투항하게 된다.

그들은 왜 연으로 망명했을까?

저자는 낙랑을 일종의 무역거점으로 이해해, 낙랑의 지배층들은 중국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유지하면서 얻는 무역 이득이 컸기 때문에 안정적인 중국식 통치가 가능했고 고구려가 들어오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중국 쪽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요동으로 망명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낙랑이라는 지명을 유지했던 걸 보면 확실히 중국의 낙랑 지배는 다른 이적들의 변군과는 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책인데 아주 만족스럽고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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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2-01-14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 전에 읽었던 책인데,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흥미롭게 읽었던 책들을 marine님도 재미읽으셨다 하면 기분이 좋네요. ㅎㅎ

올해에는 다시 책을 열심히 읽어 보려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arine 2022-01-17 14:31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생각해 보니 가넷님 리뷰를 보고 알게 된 책이네요.
늘 감사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 - 타인을 대상화하는 인간
존 M. 렉터 지음, 양미래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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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정말 의미있는 좋은 책을 읽었다.

별 4개 주는 강추하는 책.

400 페이지의 두께감이 꽤 있는 책이고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얘기들이 많이 나와 한번에 읽기가 다소 힘들었다.

그렇지만 읽을수록 저자의 논지 전개에 빠져들고 번역도 매끄러워 정말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다.

우리는 왜 잔인해지는가?

우리 안의 폭력성, 특히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이른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범죄, 오랜 역사를 가진 노예제 같은 비인간적 제도 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런 끔찍한 폭력성과 잔인함을 우리 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을까?

과연 없앨 수는 있는 것일까?

오래 전에 읽은 <빈곤의 종말>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옛 말도 있지만, 미국 교수인 제프리 삭스는 선진국이 지금보다 더 많은 원조를 하면 전 세계의 극빈층은 충분히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요즘처럼 곡물의 생산성이 극도로 높아진 시대라면, 또 고밀도 에너지, 이를테면 원자력 등을 이용한다면 유니세프 광고에 나오는 가엾은 아이들은 절대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겼다.

한국은 이미 절대 빈곤이 아닌 상대적 빈곤 (그래서 더더욱 서로를 미워하고 있지만) 상태라 어쩌면 영원히 가난은 존재하겠지만, 그 책의 저자가 말하는 "절대 빈곤"은 충분히 효율적인 원조와 정책을 통해 없어질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기분좋은 얘기인가.

이 책의 논지도 크게 보면 그렇다.

인간은 오랜 역사를 통해 플라톤의 동굴에서 벽면만 보다가 조금씩 빛이 들어오는 입구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과거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도덕적으로 진보했다는 것이다.

노예제가 없어진 것만 봐도 확실히 그렇다.

저자는 인간의 폭력성의 기원에 대해 인간을 대상화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안 보고 사물로 대상화 시키는 것이다.

이 대상화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가장 약한 단계인 일상적 무관심.

사실 주변에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대부분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 척 지나간다.

두 번째 단계는 유도체화.

사실 이 단어가 직관적으로 와 닿지가 않았다.

간단히 말해 내 맘대로 조정하고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끔찍한 비인간화.

이 단계에서는 이미 인간 취급을 안 하고 심지어는 박멸해야 하는 해충으로 간주해서 이른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범죄가 집단적으로 일어난다.

노예제도도 인간이 아닌 사고 파는 물건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가?

당연히 1단계는 타인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불우이웃돕기가 이런 경우일 것이다.

2단계는 타인이나 타민족이 나와 우리 집단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호의존성을 깨닫는 것이다.

당연히 타문화도 관대하게 수용하고 전쟁이 아닌 교류와 무역 등을 통해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올림픽 같은 지구촌 축제도 이런 경우에 해당될 것 같다.

가장 높은 3단계는 합일의식을 갖는 것이다.

저자는 이 합일의식에 이르는 방법으로 종교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알타미라 동굴에 들소를 그리고 죽은 동료를 매장하는 등의 행위는 예술적이면서도 종교적이다.

이런 종교적 속성이 넓게 보면 자기를 초월해 타인과 하나가 되는 합일의식의 발로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초월감, 혹은 자아가 사라지고 나와 타인이 경계가 없어지는 충만감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의 합일, 곧 구원,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플라톤의 동굴에서 빛을 찾아 입구로 나가기 위해 깨달음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우리는 좀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혹은 우리 사회는 과거보다 더 인간적이고 높은 수준의 정신적 각성을 가진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어쩐지 희망이 보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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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독서 - 내 삶의 기초를 다지는 근본적 읽기의 기술
에밀 파게 지음, 최성웅 옮김 / 유유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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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말할 수 없이 마음에 든다.

그냥 독서도 아니고 "단단한" 독서라니.

정말 이런 독서를 하고 싶다.

치열하게 열심히 읽는, 푹 빠져드는 열정적인 독서를 하고 싶다.

솔직히 내용은 좀 어렵고 사변적인 게 많아 다 공감하지는 못했다.

19세기라는 시대차도 그렇고 무엇보다 프랑스 문학에 대해 전혀 모르니 책에 나오는 경구나 등장인물들이 인용되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자가 1847년생이니 우리 식으로 하면 조선 철종 시대쯤 되는 인물이라 우리나라 책이어도 어렵긴 했을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두 가지 책읽기의 방식, 천천히 읽기와 다시 읽기, 결국은 같은 말인데 많이 공감했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확실히 한 번 가지고는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글자만 쓱 훑어 보는 나같은 남독 스타일로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듯하다.

책을 읽고 나면 분명한 관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그런 것 같다는 흐릿한 인상만 보이는 기분이다.

독서의 적은 무엇인가?

책에 너무나도 분명히 나와 있다.

바로 인생 그 자체라고.

출세하려는 욕구, 경쟁, 크고 작은 분쟁들, 감정을 소모하는 여러 관계들, 무엇보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세상살이에 치일 수밖에 없으니 온전히 독서에 마음을 바칠 수가 없다.

그래서 천국은 거대한 도서관이라고 했을까?

죽어서야 비로소 책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 수 있다는 뜻 같다.

내가 평소에 꿈꾸던 은퇴 생활자가 나온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파리 국립 도서관에 매일 출근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파리가 지적, 예술적 삶을 가장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가난한 자들의 도시라고 했다.

서울 집값이 전세계적으로도 비싸지만 그럼에도 대도시는 문화적 삶을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하는 최적의 거주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은퇴하면 국립중앙도서관에 날마다 가서 일하듯이 여덟 시간씩 책을 읽는 게 꿈이다.

그런 날이 올까?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아빠가 언젠가부터 눈이 피곤해 긴 책을 못 읽고 대신 짧은 시를 읽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나이 들고 은퇴하면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만 사실은 신체도 늙어서 노년이 반드시 책읽기에 적합한 시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40대인 지금부터라도 정말로 열심히 원없이 읽어 보려고 한다.

나이 들어서 눈이 침침해 책읽기가 힘들어지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읽기는 감미롭고 거듭 읽기는 더더 감미롭다는 저자의 표현에 깊이 공감이 간다.

좋은 책을 곱씹어 읽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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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과 성당 세계문화유산 1번지
김희욱 지음 / 동연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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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내용이 매칭이 잘 안 된다.

좀 더 임팩트 있는 제목이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기독교와 불교라는 두 종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양의 종교적 유산, 즉 사원과 성당을 비교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500 페이지가 넘는 책이라 약간 긴장했는데 도판도 많고 비교적 잘 읽힌다.

형이상학적인 관념들, 이를테면 사찰을 구성하는 여러 불교의 원리와 상징성에 대해서는 다 이해하지 못했고 지루해서 건너 뛰었다.

어려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적 교리는 익숙하지만 불교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 같은, 종교라기 보다는 문화적 시각으로 밖에는 보지 못해서인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절의 구조에 이렇게 많은 교리와 상징이 숨어 있는지 미처 몰랐다.

불교인으로서 예불을 목적으로 절에 가면 일반인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갖겠구나 싶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현학적인 분석들을 읽으면 정말로 당시 창건자들이 이렇게 복잡한 상징성을 부여하면서 절을 지었을까 의구심도 든다.

마치 현대미술 작품들에 온갖 미학적 의미 부여를 하는데도 정작 관람자 입장에서는 미학적인 감동으 크게 느껴지지 않고 평론가의 해설이 없으면 감상조차 불가능한 그런 경우처럼 말이다.

평소에 잘 몰랐던 동남아시아 불교 문화에 대해 알게 된 점은 소득이다.

앙코르 와트와 베트남에 가 봤는데 미얀마나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은 또다른 분위기 같다.

책에 소개된 보로부두르와 루오프라방 등에는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

동남아시아는 역사도 그렇고 문화 유산에 대해서도 생소한데, 휴양지인 푸켓에 갔다가 거기 사원에 들어가 보고 우리의 불교와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아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도판이 너무 작아 감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라 아쉽다.

책의 분량이 벌써 500 페이지가 넘어 큰 도판을 싣기도 어려웠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러고 보면 유홍준씨의 답사기 시리즈는 도판과 본문 글이 잘 어울어진 좋은 책 같다.

일본에 대해서도 큰 관심이 없다가 유홍준씨의 일본 답사기 네 권을 읽으면서 역사와 문화 유산에 대해 흥미가 생겼고 교토에 다녀온 후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면서도 항상 여기가 거긴가 헷갈렸는데 이 책에 나온 일본 불교 문화유산을 읽으면서 감이 좀 잡히는 느낌이다.

역시 같은 주제의 다양한 책들을 보면서 개념이 잡혀가는 것 같다.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던 점은, 식민지 고고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정치와 문화 혹은 학문은 분리되어야 하지 않을까?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아시아를 침략해 정체성을 짖밟고 왜곡시키려 한 점은 그대로 비판해야겠지만, 학자들이 동남아시아사를 연구하고 널리 알린 점은 다른 관점에서 평가해야지 않을까?

식민지 고고학이라는 단어로 학문적 노력을 평가절하 할 수 있을까?

인류의 보편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누가 연구를 하든 세계 각 지역의 다양한 인류의 문화사를 연구하는 것은 전부 다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식민지 지배 국가들의 원조와 배상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더 널리 세계적으로 알리고 학문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문화와 역사는 자국인의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과학처럼 국경이나 민족을 초월한 학문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다는 문구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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