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한 번 쯤은 기사로 흘러다니는 이야기로 접했을 주제를 페미니즘이라는 틀로 다시 들여다 본다.
메갈의 탄생과 과정 그리고 그들이 받는 사회적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언제나 페미니즘과 함께 이젠 짝꿍처럼 따라다니는 여자도 군대를 가야 진정한 평등아니야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데이트 폭력을 비롯한 친밀한 관계의 폭력이 있고
모든 일에 관여하는 진보논객들이 유일하게 침묵하고 스스로 조용하게 자성한다는 분야가 페미니즘이다.
정치도 빠질 수 없고 섹스에 대한 공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다양한 성지향성을 가진 소수자의 위치 성노동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그리고 남자나 여자나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속물적인 본성을 언제나 여자에게만 향하는 현 관점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그래서 과연 진짜 페미니즘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그중에 가장 흥미가 갔던 것은 폭력이라는 커다란 범주에서 볼 수 있는 데이트 폭력부분과 그와 연결해서 함께 생각해 볼 진보 논객의 입장과 성노동의 합법화의 주장의 당위성과 그 주장의 한계를 짚어본 두가지 꼭지였다.
언어가 만들어지면 피해는 발견되고 급증한다. 일상적이었던 것이 언어화되었을 때 그제야 특별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생성은 개인과 개인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한 관계 맺음과 무기력한 소통 과정으로 인해 피해의 심각성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터져나오는 폭발적 저항의 결과이다. 언어는 중립적인 듯 보이지만 그 언어에 연루된 사람 위치 이해관계에 따라 전혀 다르게 활용되는 매우 정치적인 속성을 품고 있다. 과거 가정 폭력과 데잍 폭력이 사랑과 로맨스의 연장선으로 이해되었음을 상기해본다면 언어야말로 문화 담론의 헤게모니를 함축하는 권력의 상징이다. 그러나 데이트 폭력과 같은 저항적 언어가 만들어지고 알려지는 것은 기존의 남성 중심적 관계에 대한 도전으로 진단되었기 때문에 '역차별' ' 꽃뱀' 그리고 무수한 '00맘' '00녀' 시리즈등 여성 혐오적인 공격으로 되돌아왔다. 문제는 현재까지 만들어진 저항의 언어가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많은 문제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극에 다다른 또 다른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명명되지 않고 재개념화되지 않은 성차별적 문제들은 차고 넘치지만 그것이 언어화되는 만큼 사적인 공간에서 여성혐오와 폭력은 저항에 대한 효과적인 제압 방식으로 개념화 되면서 폭력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치정과 멜로 그 경계에서 데이트 폭력을 묻다.
남성성은 가족과 학교에서 남자다워야 한다고 주입되는 성역할 포르노그라피등을 통해 전달되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스포츠 군대를 경험하는 동안 조직적 위계적 관계등을 습득하면서 연습된다. 연습돤 남성다움은 일정한 때가 되면 이성애 연애 관계에서 비로소 실천 되는데 돈을 더 쓰고 가방을 들어주고 어두운 밤길을 데려다 주면서 보호자의 권한을 확보한다. 더군다나 여성은 성적으로 무지하거나 자신의 성적 욕망에 둔감하다는 믿음 아래 여성의 No는 Yes 를 의미할 뿐으로 여성은 성적으로 가르쳐주고 리드해야할 대상이 된다. 이런 남성성은 훗날 이성애 가족에서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밀봉해지는데 자녀와 아내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과 더불어 그들을 통제할 권리와 결합되며 완성된다.
남성성은 저절로 생성된 것이 아니며 위계적 남성성을 추구하도록 독려하는 구조 속에서 순환된다. 여성학자 벨 훅스는 직장등의 공적인 세계에서 권력적 관계로 인해 굴욕감을 느끼고 심리적 학대를 받은 남성들이 폭력을 억누르고 있다가 통제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여성을 학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면서 순환된다고 말한다. 더우기 경쟁속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 아래 실업이 증가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한 분노읙 ㅏㅁ정이 친밀한 관계에서 해고나 보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에게 분출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남성성이란 타고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이 수행 과정에서 데이트 폭력은 특별한 사건이라기보다 남성다움의 전형적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강한 남성이 미인을 얻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약한 여자를 보호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자만은 결국 의사소통의 거부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데이트 폭력이란 살짝 밀친 장난이거나 타이름이거나 터프한 성적 관계이거나 오빠가 생각하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정당화 된다. 따라서 데이트 관계에서 성폭력이라는 명명은 더더욱 성관계를 동의한 여성의 변심과 모함에서 비롯된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폭력 연구자들이 재차 말해왔듯이 폭력은 악이 아니다. 폭력은 악이 아니라 구조다. 연애와 사랑등 아름다운 이름으로 회자되고 성역할이라는 이름으로 착취의 흔적을 지우려 하겠지만 비대칭적인 젠더 구조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호명으로 만나는 이성연애가 착취적이지 않으려면 각고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자연스러운 연애는 성별화된 연애의 수행이기 쉽다. (중략)
데이트 폭력 담론에서 폭력을 예외적인 악으로 구정하고 가해자를 '가해자'로 굳히는 일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폭력을 구조로서 이해하고 구조안에서 자신이 예외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면 가해자의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가해자의 성찰이 곧 구조의 변화이고 균열일 수 있는 건 이때문이다.
남성진보논객과 담론 헤게모니
폭력 폭력 누구나 말하고 알고 있지만 그 폭력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그저 물리적으로 힘으로 누군가를 제압하고 누군가에게 보이는 상처를 입히는 것 맞고 때리고 꼬집어서 상처가 생기고 벌겋게 자국이 남는 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상대를 사랑해서 가르치는 것 바꾸려고 하는 것 도와주려고 하는 일들 그리고 내가 예의있게 하기 위해 모른 척 하거나 내가 나서면 안될거 같아서 눈을 감았던 일들
순간적인 감정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냈던 일들 그리고 나서 나는 다 잊었으니 나는 뒤끝이 없는 깔끔한 인간이라는 근거없는 믿음
사랑하니까 아끼니까 보호하기 위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거 아니냐는 일방적인 믿음과 신념들
그 모든 것은 폭력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 입장에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그래서 계속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연습해야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은 하고 있다고도 믿는다.
나는 알잖아.. 그런데 행동은 다르다.
나는 사랑을 주었는데 상대는 공포를 억압을 폭력을 받기도 하는 걸 모른다.
그리고 그 폭력을 목도했을 때 눈을 감는 것 역시 폭력이라는 것을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폭력을 옹호하며 피해자의 맞은 편에 자기가 위치한다는 것을 모른다.
폭력을 행한 사람이 악이고 특별한 경우라고 믿으며 그 특별한 행위때문에 모든 다른 이들이 함께 뭉뚱거려 같은 집단이라고 명명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 것도 때로는 폭력이 된다.
내게 이익이 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페미니즘으로 인정되고 내가 불편하고 힘든건 너무 막 나가는 이기적 행동이라고 구분짓는 것 역시 그렇다.
내가 아프지 않으니까 폭력이 아니야.. 라고 믿는 어린 아이들이 많다.
나는 아무렇지 않아서 나는 잘 못 느끼니까 그런 건 없다고 믿는 것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고 그 신념하에 행한 행동이니 당연히 상대도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
세상엔 다양하고 소소한 폭력이 여전히 많이 있다.
절대 폭력의 얼굴을 하지 않은 채로..
페미니즘을 넘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폭력이 얼마나 다양하고 일반적이고 때로는 찌질해보이는 것까지 있는지 생각해본다.
성매매 문제를 성 노동이라고 봐야 한다는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 문제를 국가가 관리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 다만 비합법적이라는 것만 없다면 개개인의 자율하에 하나의 노동으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꼭지인 성노동 비범죄화 안될 일이다 를 읽으며 생각이 복잡해졌다.
성매매 (성 노동)이라는 것이 깔끔하게 성을 구입하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있고 그들이 금전적으로 혹은 관계적으로 동의만 있다면 성을 사고 판후 깔끔하게 돌아서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배가 고픈 사람이 편의점에서 원하는 삼각김밥을 골라서 돈을 지부하고 그것을 먹고 나오면 되는 일과 성매매는 또다른 형태의 활동이다.
성 매매에는 포주라는 또다른 기생적 관계가 붙어 있다.
그리고 집창촌의 성매매가 아니라 단란주점이나 그 외 아가씨가 나올 수 있는 여러형태의 업수들이 존재하고 매매라고 한다면 일차 술자리가 아니라 이차 함께 외출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라 일차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여러일들을 성매매로 볼 것인가. 아니 볼 수 없다면 그 때 일어나는 여러가지 폭력적이고 불합리하며 갑질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생긴다.결국 성매매의 문제도 존중이 존재하지 않은 폭력의 문제가 연결된다.
내가 돈을 주 고 산건 매매자와 매수자의 깔끔한 성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내가 돈을 지불했으니 그 만큼 나는 원하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사심이 들어있고
관계까지 안 갔으니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떳떳하다는 이중적인 심리가 들어있을 수 있다.
결국 성 매매는 성만 매매 되는 것이 아니라 인권과 폭력과 가학적이고 치욕적인 모든 행위를 포함하고 있는 일이다.
다만 성매매 (혹은 성노동) 단순한 하나의 경제생활을 수반하는 노동으로 본다는 것은 그 일부만 보는 것이다.
어렵다.
결국 읽다보면 늘 느끼지만 페미니즘이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다 함께 소외된 사람없이 잘 살아보자는 이야기다.
세상은 내가 경험하고 본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내가 편하고 정의롭다고 믿는다고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말해준다. 어딘가 불평등이 있고 소외가 있고 폭력이 있다
내가 알고 고의로 행한 것도 있고 나도 모르고 행하고 그게 당연하다고 믿는 신념때문일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말...
하기는 쉽지만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쉽고 편하고 익숙한 걸 택하는 존재다.
그제 본 영화에서 그랬다.
달은 늘 그저 같은 달일 뿐인데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시간에 따라 자꾸 변한다고 한다.
변하는 건 달일까 달을 보는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