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진짜"를 정의하고 선택하는 권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진짜 여성 진짜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어야 할 진짜 자리 진정한 여성의 삶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의 충고는 나는 사양한다. "진짜'는 모르겠으나 내 삶과  길, 나의 자리, 나의 역할, 나의 욕망, 나의 사랑은 각각의 '나'들이 찾아야 한다. 이 '나'들은 문화와 관습이 정해주는 자리가 아닌 충분히 다른 세계를 갈망할 권리가 있다

남성적'나;들이 보편적인 인간을 대표하는 세계에서 묵살당한'나'들의 재현과 목소리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 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상대적으로 차단당한 존재들이'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확장하길 갈망한다. 자신의 쾌/불쾌가 사회적 옳음 /그름과 일치해온 사람일수록 제 기분에 의지해 사안을 판단한다 여자들이 감정적이라고? 여자의 감정이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과 자리를 벗어나면 부정적인 의미로 감정적이라는 오명을 덧씌운다. 여자의 감정은 정치화 되지 못하고 해석당한다.여성의 연대와 목소리를정치행위로 보지 않는 게 문제다 기존의 가부장-여성착취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진보'는 '반동'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정치와 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들은 기존에 폭력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문제를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하며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p10 <들어가는 말: 보편의 제구성>

 

 

 

칭찬은 일종의 권력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이다.나는 너에게 칭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며 너는 나에게 칭찬을 '받는'사람이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칭찬하지 않는다. 칭찬은 아랫사람을 인정하는 행위로 구축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칭찬을 받으려는 아이. 주인의 칭찬을 받으려는 반려견,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려는 칭찬은 아랫사람이 갈구하는 당근의 역할을 한다. 뒷사람은 칭찬을 통해 계속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하라는 압력을 넣는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평소에 좋게 봤는데'와 같은 말을 덧붙여 비난한다.

칭찬은 평가의 다른 방식이다

                                                p26 < '진짜'는 없다> 

 

 

 

'진짜' 페미니스트를 강조하지만 때로'진짜'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언어다. 넌 늘 화가 나 있는 '진짜'페미니스트 같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이다.불편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를 선호하는 이들은 사회 개혁보다는 페미니스트 재교육에 관심이 많다.페미니스트 감별사가 되어 페미니스트를 얌전하게 길들이려 한다. 태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내용을 무시할 수 있어서다. 나에게공손하기만 하다면 너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너의 말을 교양있게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p28 <진짜는 없다> 

 

진짜(좋은)와 가짜(나쁜)에 대한 구별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이는 순수와 비순수 곧 순수와 오염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며 그것은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참된'민족과 '참된' 문화와 '참된' 공동체 그리고 폄하하고 공격해도 문제되지 않는 '참되지 않은'타자들이라는 대립구도를 구축하는 전략을 나는 곰곰히 들여다 보았다. 순수, 진짜 참됨을 향한 숭배는 극우의 정신에서뿐 아니라 많은 운동 진영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짜인 우리와 극단주의자들이라는 저들을 만들어 저 타자들을 축출의 대상으로 삼는다. 진짜 페미니즘에 대한 점검은 꾸준히 헛수고가 될 것이다. 동시대 페미니즘은 꾸준히 남성혐오로 번역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성정은 죽어야 증명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란 자신의 현재를 방해하지 않는 페미니스트이다.

                                       p49 < 진짜는 없다>  

 

완벽한 진짜만 허락된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과 충돌을 통한 성장을 억압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진짜 길만 있는 사회보다는 여러 종류의 다른 길이 있는 사회가 옳다. 물론 '잘못된' 길에 이르거나 위험한 길에 다다를 수 있으며 길을 더럽힐 수도 있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반복하며 길을 알아갈 권리가 있다.누구도 그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실패를 쌓아 균형을 만들 권리가 있다. 실패조차 하지 못하면 영영 고립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정당할 필요는 없다.

                                                          p42

 

 

지금 여기에는 항상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이 있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권력이 지배자다. 나중은 실체가 없다. 나중이라는 시간은 결국 영원히 나중이 된다. 그렇게 저항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서 점령당한다. 역사가 조금이라도 진보하는 순간은 나중으로 밀려나는 목소리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들리도록 만드는 그 순간이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장소를 박탈당한 이들이 바로 사회의 약자다. 소수자들의 저항축제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일시적 해방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현재는 그토록 귀하며 여기의 안전은 언제나 불안하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 지금보이는 몸짓을 막지 말아야 한다.재발견의 번거로움을 남기지 말고 지금 여기의 존재를 억압하지 않으며 그 목소리를 묵살시키지않는 것이 최선의 진보다. 우리는말하고 움직여야 한다.

                                   p52 

 

 

여성다움은 대부분 무시당해도 가만히 있는 성질이다. 이를 '다소곳한''참한' '청순한'  '얌전한'  '순한'   조용한' 등의 형용사가 대체 하고 있다. 성희롱앞에서도 여성들은 가해자를기분 나쁘지 않게 해야한다 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남자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인간으로 길러졌다. 여성의 일상에서 '남자에 대한 무시;라고 규정되는상황은 셀 수 없이많다. 자기 생각을 말하면 '기가 세고 설치고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 여자가 된다. 가해자의 무시해서라는말은 많은 여성들에게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여성의 행동에는 토를 넘는 이나. 지나친 이라는 말이 곧잘 붙어다닌다.그렇기에 공개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는 툭하면 페미나치라는 소리를 듣는다. 페미나티는 저항의 언어를 뒤집어서 저항하는 자를 도리어 가해자로 만드는 대표적인 언어이다.진보정당의 계시판에서페미나티라는말이 여성들을 공격하기위해 등장해도  이는 사회적 문제가 되지 못했다. 다른 큰 일도 많은데 여자들이 너무 설치기 때문이다 저항은 조롱당하고 무시와 무지 속에서 목소리 자체가소거당하고 있는대도 올바른 목소리만 허락하겠다는 올바른 사람들의 진보는 대부분 여성의 삶과 무관한 진보다.

 

                                          p64 

 

존중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이 기본적인 태도가 당연하지 않다보니 여성을 존종할 줄만 알아도 특별한 남성이 된다. '남성다움'에 는 여성에 대한 지배가 포함되어 있기에 여성에 대한 남성의 존중은 종종 사회적으로 무시당한다. 남성은 여성을 존중하지 않도록 부추긴다. 아내를 존중하는 남성을 남자답지 못한 인간으로 보고 남성연대에서 탈락시키려 한다. 남성이여성을 존중하기 어렵고 또 존중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걸레는 여성의 경험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언어다.걸레는 낡고 냄새나는 더러움의 상징이다.걸레, 곧 경험있는 여자는더럽다는 낙인이 찍힌다. 처녀성에 대한 집착은 여성에 대한 소유욕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의 경험이 남성의 기능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p 71 <몸이된여성들> 

 

여성의 다양한표현과 다양한 모습의 재현은 기존의 체제를 위협한다. 여성을 단지 '자궁으로 여기는 것은  여성의 생각과 인격을 무시할 수 있는 흔한 방법이다. 돌아다니고 말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자궁~ 남성의 시각에서 자궁은 생각이 없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곳은 힘들고 외로울 때 돌아갈 수 있는 장소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가두는 공포로 탈바꿈 해 억압할 수 있다. '이빨 달린 질'은 오래된 신화다.

 

어머니= 대지 라는 공식에 따라 한국의 민중미술에서도 여성은 대지로 표현되었다. 대표적인 민중미술가 임옥상의 <대지의 어머니>는 가슴이 축 늘어진 나이든 여성이 상반신이 땅에서 올라온 모습이다. 땅과 여성이 한 몸이되어있다. 이 여성의 몸에서는 고단한 세월이 느껴진다.작가는 이 작품을 '위안부'피해 여성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 기증했다. 이 작품을 본  '위안부'피해 여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작가는 땅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을 의도했으나 그들의 입장에서 나체의 상반신을 드러낸늙은 여자의 형상은 생명력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불러들였다. 어머니= 대지= 생명력의 공식은 그 대지에 씨를 뿌리는 사람으로 감정 이입하는 사람의 시각일 뿐이며  대지와 동일시되는 사람의 시각은 아니다. 나의 땅은 생명력있는 대지이지만 남의 땅은 빼앗아야 할 장소가 되고 주인 없는 땅은 정복의 대상이 된다.

                                  p 91 

 

여학생 휴게실이나 여직원 휴게실이 있는 이유는 여성을 위한 특혜가 아니다.여성이나 성소수자가 보편적인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적 장소를 이용하는데 불편함을 겪기 때문이다.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 폭력을 방지하는 대인일뿐 특혜와는 전혀 무관하다 여성의 장소는 자꾸만 제약을 받고 침범 당한다. 화장실 몰카라는 성폭력은 바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침략행위이다.남성은 여성의 몸(공간)을 침범해그공간을 채우고 장소를 점령하려 한다. 그래서전쟁은 반드시 강간을 동반한다.

                         p123 

 

 

근대 도시는 공공장소와 집을 공과 사의 영역으로 구별했다.정숙한 여성들은 사적인 집 안에 있어야 했고 남성들은 거리와 바에서 시선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밤에 거리를 걷는 독신 여성은 성매매 여성으로 오해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여성이 체면을 유지한다는 것은 공공장소에 함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편안할 안은집에 있는 여성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집에 여자가 있어야 남자가 편하다는 의미다.

                                    p 143

 

 

여성은 집사람이다. 집은 돌아다니지 않는다.과거의 쓰개치마, 전족, 남자를 동반하지 않는 해외여행 금지 등에는  모두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일부 나라에서 부르카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집은 과연 여성에게 안전한가 밖에서 여성이 보이지 않길 바라는 사회일수록 여성에게 집이란 공간은 많은 차별과 폭력을 은폐하는 장소가 된다.

 

                         p 208 <같은 공간 다른 자리>  

 

 

이주는 제 주변을 구성하는 인간관계와 환경, 기후, 음식, 때에 따라 언어까지 바뀌는 일상의 자각 대변동을 몰고 온다. 상실로 채워지는 이주는 한편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꾸준히 되묻는다. 인간의 정체성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스튜어트 홀의 주장대로 특정한 역사  곧 장소와시대속에서 자리매김되어  형성된다

특히 여성에게 이주는 인정과 젠더의 정체성을 둘러싼 질문의 무게를 가중시킨다. 나의 젠더와 국적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환경은 나의 기원에 나를 꾸준히 묶으려 한다

 

 

 

부모가 그러면 안되지 않아?

엄마가 그러면 안되는거지. 친엄마라면 그러지 않았을거야. 자격이 없지

무슨 엄마가 그래?

여자가  그러는  거 말이 안되지.

그래도 여잔데 그건 아니지 않아?

말이?

행동이?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 있고 그 이유로 마땅히 그러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자꾸 생겨난다.

뭔지 모르지만 기대하고 있는 기준에 맞지 않다는 말이겠지

상식이고 보편이라고  기대하는 것들을 뒤집어 보면 그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고 편견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문제는 차처하고 가장 궁금한 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기준은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라는 거다.

누군가가 누군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들'은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는 조항이며 동시에 '누군가'가 아닌 ' 또 다른 누군가'의 불편과 차별을 바탕으로 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명제는 옳을까 그를까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는 건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성별의 문제이고  취향의 문제이며 내게 기대되는 역할의 문제도 다 포함하고 있다.

다수의 편의를 위한 마땅함들은 누군가 보이지 않는 이들의 희생과 무시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를 두고 있지 않을까? 그들은 주로 소수자일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일

세상이 기대한다고 말하는 진짜는 누가 정해놓았을까?

고백하자면  그렇게 누군가가  누군가 (분명 전체를 위한다고 믿으면서도  일부만 편한) 를 위해 만들었다는 규칙에 맡기는 일은 참 편리하기도 하지

내게 거슬리는 건 그건 상식이 아니라고  맞지 않는 일이라고 탓해버리면 되거든

왜 그러느냐고 한다면  원래 그런 거잖아. 라는 말이면 누구든 입을 닫게할 수 있거든

 

학생답지 않잖아.

그것도 여학생이 그렇게 앉으면 안되지.그렇게 말하면 안되지.남들이 어떻게  보겠니?

그 말을 뒤집으면 너가 그렇게 하는 게 나는 거슬리고 너의 거슬리는 행동으로 내가  욕 먹는건 딱 싫다. 이런거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라면그냥 욕하거나 모른 척 하면서  적당히 무시할테고

나랑 상관있는 사람이라면  너를  위한 말이야라고 하면서 위하는 척  생각해주는 척 하며 니가 몹시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마음을 감추기 딱 좋은  세상의 기준들

 

진짜 감별사들은 세상에 너무 많아

점점 세분화 됨면서 개인 자격이라도 있는것 처럼 진짜 다운 걸 가려내는  사람들

자식답게

학생답게

신입직원답게

아르바이트답게

후배답게

주로 이렇게 엄격한 기준은 나보다  약하고 만만한 사람에게 향하기 마련이고

간혹 위를 향하는  기준은 그들의 꽉 막힘이  꼰대같은 행위들을 이해해주라는듯  마땅하다는 걸 말하는 기준으로 쓰이곤 하지  (물론 모두가 그렇진않지만...)

 

페미니즘을 알든 모르든  누구나 조심스럽게

"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

"내가 꼭 페미니즘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덧붙여 의견을 말하는 것이 예의고 동시에 자기를 보호하는 막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차별은 싫고  삶에서 여러가지 억울한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그래도  튀고 싶지 않은 마음

누군가에게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결국  누군가 타인에게 기준을 맡기게 되는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믿고 있더라도  그래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그렇게 행동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입을 다물고있어도 될까   예쁘게 화장하고 샬라라 옷을 입고 누군가에게 얘교있고 사랑스러워 보이고 싶고 적당히 보호 받고 싶고 모른 척 하고싶은 마음을 가져도 될까?

누가 하는 말처럼  내가 필요할때 필요한 카드를 적당히 뽑아 쓰고 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자꾸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당당하고 솔직한 타인이 나랑 상관없을 땐 멋지다고 하면서

내 가까운 곳에서 그렇게 나랑 비교될것 처럼  보이면 그냥 이유없이 미워지고 너무 나대고 설친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밉상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터무니 없이 화가 나는 부분은  주로 이런 것이다.

내가 살면서 너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점이 지금 이 시간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

그땐 사람들이 좀 무지했고 생각이 짧았고 너무 오랫 관습때문에 잘못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정보에도 접근이 가능하며 한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빠르게 의도와는 상관없이도 전파되는 세상에서 그리고 누구나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어쩌면 시끄럽고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여전히 누군가는 불공정함과 공포와 내가 책임 질 수도 없고 질 필요도 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형태는 조금씩 진보하고 변할 뿐이다.

그저 치한이나 변태들이 어두운 골목을 돌아다니던 시절에서 이제는 내가  당연히 이용해야하는 공공시절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지울수도 없고 쉬지도 않는 사이버 공간이라는 곳에서 나는 영원히 누군가에게 노출될 수도 있다는 것

공포의 불안은 진화하는데

그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여전히 없다.

차라리 그 시절의 변태나 치한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이 이렇게 여전할 줄 알았다면 이렇게 더 치밀하게 치사해질 줄 알았다면 후손을 남기지 말고 그냥 삶의 흔적도 남기지 말고 사라지는 것을 택했어야 헸는데...

조심하며 살아온 내 시간만큼 내 아이들도 조심해야 하고 더 조심해야 할 목록이 늘어나고 있다면 이건 도데체 뭐라고 해야할까?

 

 너는 진짜냐? 고 묻는 이에게 나도 묻고 싶다.

니가 생각하는 진짜는 도데체 뭐지?

그 진짜가 진짜로 진짜라고 믿는 너는 진짜니?

이 무슨 말장난같은.....

 

이제 무얼 읽어도 시원해지는 건 점점 줄어든다.

세상은 점점 엉망이고 막장을 향해 달려가는 아침 드라마같고

그러에도 희망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나의 무능일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아프고 먹먹한 이야기에서 그래도 실날같은 무언가를 잡아야 하는데

그냥 사는게 두렵고 이런 세상에서 살아보라고  아이들을 채근하는 내가 무섭고

그렇게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뭐.... 복잡한 마음 뿐이다.

 

올 여름이 너무 덥지도 않았는데

이제 갱년기에 접어들어서일까?

무얼 읽어도 다 깝깝하고 쉬이 지친다.

이건 책의 문제오 아니고 날씨의 문제도 아니고 그저 아직도 막막한 이 세상의 문제 8할에 개인적인 호르몬의 문제가 2할인거라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