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기 위해 매일 하는 일

그러나 누구도 쉽게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일

매일 먹거리를 기르고 만들고 먹고 치우고 고민하는 일등등

그 사소한 일상도 사실 정치적인 일이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 밥상에 주인처럼 느리게 나와 앉아도 괜찮은 사람

밥상을 타박하는 사람 밥상을 걱정하는 사람

차리는 사람 뒤집어 엎는 사람 치우는 사람  모두가 가진 위치가 다르고 힘이 다르다.

밥상에서 말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수저가 들어갈 때만 입을 열어야마나 하는 사람도 있다.

오죽하면 입닫고 밥이나 먹어... 라는 모순된 말도 있을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성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다른 입장이다,

내가 땀을 흘리고 몸을 써서 그 상을 차리는  사람은 정작 그 상 앞에서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저 냉큼 와서 앉아 한마디 하고 나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권리뿐 아니라 힘도 있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은 것처럼 후다다가 밥을 우겨넣어야 하는 게 마땅하고

누군가는 혼밥자체가 애처럽고  안타까워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는 캠페인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먹는 이야기에서 펼쳐지는 관계의 이야기 관계에 응당 따르는 권력의 문제 차별과 혐오의 문제, 아무렇지 않게 구별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다시 돌아본다. 모두 정치적인 문제다.

정치는 저 높은 곳에서 제  할일을 하지 않고 힘겨루기만 하면서도 따박따박  고액의 월급을 쳐잡수시는 분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둘 이상 모인 사람 사이에 오가는 관계들 힘의 줄다리기 힐끔거리는 견제와 함꼐 손을 잡는 행위 모두가 정치가 된다.

함께 상을 차리고 먹고 치우는 일  역시 정치의 일부다.

 

 

 

페미니즘은 관계의 학문이다. 살아가면서 점점 다짐하게 되는 삶의 태도는 "남의 입에 밥 넣기를 주저하지 말고 내 입으로 죄 짓지 말자"이다. 관계를 위한 기본이다. 우리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말을 섞으며 연결된다.

 

 

여성이라는 집단이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자연스러운 취향은 없다. 치향은 온전히 자연발생적인 성질이라기 보다는 습관의 축적, 환경, 교육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여성에게 주로 맡겨진 노동과 역할을 수행하면서 여성 일반의 취향이 남성 일반의 취향과 차이를 보일 수는 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 사회화의 결과다. 또한 여성 일반의 취향이 열등한 성질로 평가받을 이유가 없다. 나아가 여성 집단 내부는 각각 취향의 종류가 다양하고 차이가 있다.

 

취향의 젠더화는 여성화된 취향을 업신여기도록 이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한 수 아래의 뭔가로 취급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책, 여자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여자들이 좋아하는 분위기, 여자들이 좋아하는 영화 등 입맛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라고 할 때는 진짜 맛이 아닌 가벼운 맛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취향이란 진정한 예술도 진정한 맛도 진정한 지식도 아닌 세계다. 여성 문제는 진정한 사회 문제가 아니듯이.  

 

 

가부장제란 어머니이 밥으로 아버지의 법을 굴러가게 하는 제도다.

 

성적 대상화, 대상화란 무엇일까 느낄 줄 알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다. 다른 주체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태도를 대상화라고 한다. 성적 대상화란 이 대상을 성적인 목적/도구로만 여긴다는 뜻이다. 대상화란 다른 말로 하면 '사물화'다. 생각하고 느끼는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화(化)는 되다라는 의미다. 여성을 사물이 되게 해 의식이 없도록 만드는 상태가 바로 성적대상화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여기기에 여성을 식재료나 음식으로 보고 먹는다. 강간을 위해 강간 약물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성을 의식이 없는 사물로 만들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홀로 성 관계라는 강간을 한다. 여성을 사물화하는 방식 중 하나가 상납이다. 성 상납에서 성을 남성이라고 생각할 리는 없다, 여성을 남성에게 상납한다.

 

 

매일 똑같은 식단을 구성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게 먹어도 되는 사람'인 건 아니다,

 

가난하고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해서 욕망마저 가난해질 의무는 없다. 오직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서만 입을 벌리는 1차원적인 입은 언제나 지배권력이 원하는 입이다. 취향 따위는 아예 형성할 수 없는 그런 입, 욕망 할 줄 모르는 입 배고픔에 길들여진 입

그러나 가난한 입도 욕망할 줄 알고 기분이라는 게 있다.

 

 

인간은 기억 때문에 버티고 때로는 그 기억이 고통을 유발한다 해방의 세게인 동시에 영원한 감옥인 기억 기억의 정치화는 바로 기록과 재현이다. 고통스러운 배고픔과 죽음의 행진마저 인간이 기록하고 재현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어떤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향과 맛이 있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었을 때의 기억, 함께 한 사람들 그 순간의 온도와 빛과 분위기 냄새가 함께 뭉실 떠오른다.

음식은 이성적으로 딱 딱 구격 맞게 정리된 기억이 아니다

그 맛이 주는 감정이 서글픔일 때도 있었고 들떠서 한 없이 몽실거리던 기분이거나 배꼽 아래가 간질간질한 설레임일 수도 있다. 그냥 꾸역구역 참고 밀어넣는 국에 만 밥같은 기억도 있다.

오래 되어 낡은 후라이 팬에서 기름이 보글거리고 그 안에서 조잡하게  모양을 낸 도나츠가 둥실 떠오르는 순간 고소한 기름냄새 끈적거리던 설탕 느낌 그리고 내가 눈독을 들여놓은 가장 동그랗고 에쁜 도나츠를 향햔 욕망까지 그렇게 맛은 몸에 새겨지고 남겨진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할머니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고 추억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한없이 따뜻하고 행복한 거라고만 믿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따듯하고 정감어린 할머니와 어머가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고 물어온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 얼굴과 함께 떠오르는 많은 음식이 있다

배추전과 연근전이 있고  타래과와 수제 도넛이 있고 겨울날 웃풍으로 코끝은 시려도 지글지글 끓는 구들장덕분에 뜨끈해진 엉덩이를 느끼며 넘기는 팥죽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그 음식을 좋아했을까?

김치 꽁지를 먹고 콩나물 대가리만 남은 찬거릇을 긁어 먹거나 밥알과 고축가루가 둥둥 떠오르는 밥그릇에 그냥 커피랑 프림이랑 설탕을 적당히 섞어 지금으로치면 믹스커피를 타서 마시던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이쁜 그릇에 정성껏 담은 음식은 당신 차례가 아니었고 남아서 버리면 죄받을지도 모를 죄책감에 남김없이 먹어치우던 음식들 그리고 설겆이 거리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그냥 먹던 그릇에 타서 사치스럽게 마셔보던 커피까지... 그걸 정말 좋아했을 리 없다.

세상 어떤 정의도 용기도  정치도 먹지 않고 이루어 질 수 없다.

먹어야 삶이 이어지고 살아야 정의도 용기도 민주도 투쟁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러게 드러내기 좋아하는 추상명사를 추구하는 동안 또 누군가는그들의 입에 들어갈 구체적인 명사들을 다듬고 삶고 끓이며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곳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그게 당연하고 그게 살아가는 이치라고 힘을 가진 자들은 정의를 내리고 그렇게 규칙을 만든다.

먹는 일 먹이는 일 만들어 내는 일... 모든 일이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당연함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앗을 뿐이다.

거기 그들이 있고 우리가 있고 내가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 스며드는 가장 익숙한 권력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에서 당연하다며 만들어 낸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본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란다.

내 가족이 나를 맛과 냄새로 기억하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익숙하고 좋아하는 맛을 만들엇던 내가 누구인지도 관심을 함께 가지길 바란다.

그 뿐이다.

그건 단순하지만 어렵다. 늘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쉽게 잊히고 쉽게 없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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