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의 인기 작가 토르디스 엘바와 호주에서 청소년지도사로 살아가는 톰 스트레인저가 아이슬란드와 호주의 중간 지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일주일간 만나 과거의 시간을 돌아본 이 책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전례 없는 책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하고도 영구적인 폭력으로서 강간이 일상화된 오늘의 현실을 아프게 일깨우면서, 남녀 모두가 깨어 있는 의식으로 이 문제에 동참할 것을 뜨거운 체험의 언어로 설득한다.
“나는 너를 강간범이라고 적어도 나를 강간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돼. 그렇지만 그 말이 곧 너를 말하는 건 아니야. 절대 아니지. 그 말로는 네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십 분의 일도 나타낼 수가 없어. 난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있어. 하지만 그게 날 알콜 중독자로 만들 수는 없어. 난 가끔 거짓말을 하지만 그게 날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난 강간을 당한 적이 있지만 그게 날 희생자로 만들진 않아. 사람은 평생 살면서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해. 요지는 나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딱지표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이 그 날 밤 일어났던 일로 축소될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p178
“먼저 사회에 여성 혐오가 얼마나 광범하고도 일상적으로 펴져 있는지 알게 해주는 사례들을 열거했어. 성폭력 강간에 관한 농담 여성의 대상화따위 말이야. 그리고 나서 네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어. 음. 가부장제가 너에게 일어났어. 그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났어. 그래, 네 말이 맞아 너는 그날 밤 선택의 여지가 있었어. 아무도 너에게 그러라고 강요하진 않았잖아. 성범죄자는 타고난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아. 그게 만일 남성이 타고나는 본능이라면 세상 모든 남자가 잠재적 강간범이거나 성희롱자라는 말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도 남성들에게 가하는 모욕이라고 생각해. 나는 내 아들이 성범죄 성향을 타고났다고 절대로 믿고 싶지 않아 반대로. 난 그 애가 가치관이나 믿음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그걸 잘 정립시켜주는 것이 부모로서 나의 가장 큰 의무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 애는 외부의 영향도 받게 되겠지. 남자가 왜 여자를 범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회구조.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 안에서 찾을 수 있어. 너는 그날 밤 그래도 되는 권리가 네게 있다고 느꼈겠지. 이건 네가 직접했던 말이야.‘ 179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용서할 수 있으려면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걸.
”아닌 척해 봐야 소용없어. 그런 멍청한 작전은 효과가 없어. 긴장될 때 통하는 유일한 방법은 소리 내서 말하고 웃어 넘기고 그리고 그냥 다시 살아가는 거야.“
”네가 왜 나를 고소하지 않았는지 가끔 궁금해“
”글쎄 난 그때 열여섯 살짜리 애였고 머리엔 강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가득했어. 그런 건 으슥한 골목에서 칼을 든 미치광이나 저지르는 짓이라고 알고 있었어. 내 방에서 강간이 일어나리라곤, 특히 내 남자친구에게 당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지. 몇 년이 지나 내가 당한 게 강간이었다는 사실에 눈뜨게 됐을 무렵에는 딱 너처럼 나도 진실을 외면했어.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에게 그런 일을 당하게 됐다고 믿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나는 내가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랐어. 건강한 연애 관계를 맺기 바랐고 육체적으로 교감하는 순간에 애인에게 거리를 두거나 무시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어. 교미를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나누길 바랐어. 게다가 내가 너한테 미쳐 있는 걸 세상이 다 알고 있었어. 너한테 내 동정을 줬잖아. 우리 부모님한테 널 인사도 시켰잖아. 그날 밤 난 짧은 드레스를 입었어. 술도 많이 마셨고 그랬으니 넌 그런 짓을 안했다고 말만 하면 됐을 거야.“ 228
”사람이 사람에게 왜 해를 입히는지 오랫동안 열심히 들여다봤더니 몇 가지 촉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첫 번째는 분노야. 예를 들자면 네가 나를 애먹였으니 내가 너를 엿 먹일 거야. 그 다음에는 두려움이야. 네가 나한테 위험한 사람이니까 너를 엿 먹여야겠어. 무지도 해당돼. 너를 엿 먹이면 내 병이 나을 거야. 욕심도 내가 원하는 걸 네가 가지고 있으니 널 엿 먹여야겠다. 위급함. 너를 엿 먹이지 않으면 내 일이 꼬일 거야. 마지막으로 정신병이나 중독이 해당돼. 내 머릿속에서 널 엿 먹이라는 소리가 들려. 톰, 네가 그날 밤 어떤 이유로 날 강간해는지 나는 몰라. 내 생각에는 욕심과 무지 때문이었던 것 같아. 너는 네가 원하는 걸 취해버렸어. 그게 나한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관하지 않고 말이야. 그런데, 나도 그랬어. 나도 욕심을 부려서 내 필요를 그 무엇보다 우선으로 삼은 적이 있어. 내가 다른 사람을 강간한 건 아니지만 내 중심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 것을 취하는 게 어떤 건지 나도 해봐서 잘 알아. 네가 나한테서 가져간 건 나한테 정말 가치 있는 거였어.
그래서 분한 나머지 온 힘을 기울여 네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값진 걸 부숴버리려고 했어. 네 마음 말이야. 내 말 오해하지마. 우리 각자의 행동이 같은 무게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지난 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나한테 다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야. 다만 내가 그 어느 때보다 이해의 영역에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아.
복수로 내가 얻는 건 하나도 없어.
“내가 여자라서 강간했잖아. 그렇게 다뤄도 되는 권리를 네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여자라서, 넌 어디선가 배웠을 거야. 네 즐거움이 내 동의보다 더 중요하다고 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아무것에도 동의할 수 없을 때였어도 말이야. 네가 왜 그랬는지 몰라. 하지만 난 이문제가 남자들이 사회 모든 층위에서 더 많은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고 봐. 몇백 년 동안 그래왔잖아. 아마도 오래된 이런 전통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남자가 여자보다 중요하다는 의식을 갖게 됐겠지. 너와 너의 욕망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그날 밤 네가 느낀 건 아마도 이런 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내가 아는 한 너는 사람들이 보통 남자라고 부를 그런 사람이었거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사건이 좀 더 큰 그림의 일부분 그러니까 여자가 남자보다 가치가 없다는 생각의 일환이었을 거라고 믿어. 네가 불편하게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생각을 걸러버릴 순 없어.” 282
톰 같은 사람이, 즉 규범으로 보이는 것에 잘 순응해서 조사와 감시에서 제외되는 사회그룹에 속하는 사람. 안정된 배경과 각종 특혜를 누려온 사람이 강간을 저질렀고 그래서 후회한다는 고백을 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이 오래 기다렸던 성폭력의 근원적 이유에 대한 토론의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유형의 강간을 더 잘 이해하려면 가해자를 2차원적 스테레오타입으로 봐서는 안되고 3차원적으로 봐야 했다. 그렇게만 되면 파급 효과가 클 것이고 가능성은 끝도 없었다. 진정 큰 그림이었다. 290
“그러니 선례를 세우는 게 더욱 중요해지지.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는 거야. 이 저울의 양쪽 끝에 선 사람들은 성범죄의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영혼 없는 괴물도 아니고 파손된 물품도 아니라고, 그냥 사람이라고 불완전하고 흠이 있더라도 너나 나처럼 온갖 종류의 생각을 하고 직업과 배경과 생활 방식과 신념을 가진 그런 인간이라고, 세금도 내고 가족도 사랑하고 실수도 저지르는 바로 우리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변에서 쓰레기도 줍고 말이야. 293
”나는 깨달았지. 내가 그 범행을 저질렀고 내가 그 책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이며. 넌 그날 밤에 대해 네 마음대로 말할 권리가 있다는 걸 말이야. 그리고 내가 그걸 읽고 생생하게 되살려보고 인정해야 하고 그것에 대해 미안해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야. 네가 그걸 공개하는 데 따르는 어떤 결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이런 경지에 이르고 나니 새로운 감정이 생기더라. 그건 일종의 안도였어. 내가 너를 끌어들인 지옥에 대해 네가 말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느낌, 너처럼 강인한 사람이 자기와 자기 시련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강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열한 짓인지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느낌, 진실이 바깥 세상 어딘가에 나와 있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진실을 덮을 수 없으니 다행이라는 느낌 너를 범한 사람으로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느낌, 그런가 하면 내가 계속해서 익명으로 남아있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드는 것도 다행이었어. 네가 말했다시피 오랫동안 두려움에 갇혀 사는 건 건강하지 않잖아.
내가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포괄적인 답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만 유별나고 독특해서 그랬던 건 아니라고 확신하니까. 난 수많은 경우 가운데 하나였어.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다들 아무 말을 안 해. 아마 더 깊이 들어가는 게 무섭겠지. 나는 뭔가 말을 하고 싶어. 네가 책으로 했듯이 말이야. 나도 목청 높여 세상에 알려서 우리 같은 사연이 되풀이 될 가능성을 줄이고 싶어. 402
*오랫동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었다. 누구를 미워하는 일이 너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고 세상이 모두 내 편을 들지 그 상대를 변명하거나 변호할 리 없다고 하더라도 미움은 너무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미워하는 사람을 이제 영영 보지 않는다면 차라리 나을까
늘 일상에서 부딪쳐야 하고 만나야 하는 사람을 미워해야하는 일은 너무 힘이 들었다.
이렇게 미워하기만 하는 내가 옹졸한 사람인가 나를 들여다 보는 일이 꼭 피해자가 나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처럼 느껴져서 절대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절반이상을 차지하지만 한 구석에서는 내가 그냥 미워하는 걸 포기하면 모든게 편안해질텐데 내가 문제가 아닐까 하는마음이 또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 분명 상대의 잘못과 폭력성으로 내가 상처를 입고 내가 피해를 당했음에도 절대 변하지 않는 상대를 보면서 계속 미워하고 저주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건 결국 나의 속좁음이 아닐까 하는 자책만 남겼다. 그러나 나의 미움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사과와 반성이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될 수 없다.
이 모든 일이 제자리를 맴돌기만 하는 건 먼저 시작해야 할 그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살고 있다는 그것 때문이다. 내 잘못이 아니다.
이러이러한 잘못을 하지 않았느냐고 몇 번을 묻고 대화를 청해도 묵묵부답이거나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걸 보면 용서따위는 개나 줘버려랴 할 일이었다.
나는 절대 잘못하지 않았다. 그 일에는 이유가 있고 상황이 있고 맥락이 있다고 모든 걸 상황탓으로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탓으로 돌리는 말에 어떤 용서도 화해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일 없듯이 하하호호 할 수 있는 표정은 가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얼어있었고 점점 나는 속내와 겉모습이 다른 두 인격을 태연하게 지니는 이상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용서는 사과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과는 반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반성은 진심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무수한 반성과 사과가 남발되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도리어 돌을 맞고 편협한 사람이 되고 예민하고 상황파악이 안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얼마나 소금밭인지 타인은 모른다.
좋은게 좋지 않냐고... 계속 볼 사이지 않냐고 ... 가족이지 않냐고...
그래서 더 용서가 쉽지 않다. 계속봐야하고 가족이고 친밀한 사이여서 좋은게 다 좋지는 않더라고
책을 읽으면서 내내 저자가 부러웠다. 그렇게 자기 상처를 드러내고 사과를 요구했을떼 이렇게 솔직하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상대가 있다는 게 진심 부러웠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는 말처럼
내가 용감하고 좋은 사람이면 비록 내게 상처를 주고 절망을 주었던 상대여도 이렇게 인간적이고 예의있을 수 있구나 하는 마음에 질투가 생겼다.
폭력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만연한 가부장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책이며
동시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쉽게 털어낼 기회를 가진 저자에 대해 두고두고 부러워미칠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