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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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였다.

아랍인 아프리카인 유태인등 어느 한쪽도 프랑스 부모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산다.

창녀와 그녀들의 아이들 이주민과 가난한 노동자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살고 있다

그 동네 한 구석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7층에 로자 아줌마와 모모가 살고 있었다,

유태인 아줌마와 아랍인 소년은 가족이다.

아니 남남이다. 그러나 가족이다.

 

내가 그렇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과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서로 어깨를 부비고 서로 욕을 하고 미워하면서도 함께 살고 있는 것은 그렇게 자기를 바라봐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손을 잡아주는 그 사람의 존재때문이다. 그가 있어서 내가 있다

그들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어떤 즐거움도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달걀을 훔쳐서 따귀를 맞는 행위로 존재를 증명받고 싶은 모모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창녀노릇을 하며 호텔을 드나들고 남자에게 돈을 모조리 털린 일로 기억하는 로자아줌마의 삶이 단순하지않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당신은 아마 도데체 왜 그런 삶을 살아가는거냐고 부끄럽지 않으냐고 묻고 싶겠지만

적어도 자기 앞에 놓인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이 있을 이유가 없다,

아무 보잘 것없는 사람들끼리 사랑해야하고 살아내야하는 삶

그것으로 가치있다고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묻고 또 묻지는 말아야 한다,

 

순간 나는 울기 시작했다. 나 역시 아무일도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공공연하게 그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p 34

 

아줌마 혼자 배를 곪아가며 빠듯하게 지낸다해도 하루 십오프랑을 필요했다. 그녀에게 덜 먹어려면 살을 빼는 수 밖에 없다고 아주 솔직하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세상에 혼자 뿐인 노친네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붘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아무도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

 

아줌마도 뚱뚱한 몸매와 하루에도 여러번 터져나오는 욕지거리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런 자기를 누군가 봐주고 사랑해주길  바란다,

모모역시 그렇다  아닌 척해도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으나 방법을 알지 못할 뿐이다,

관심을 받은 경험이 꾸중이나 혼난 기억밖에 없는 아이는 매질이나 욕지꺼리조차 관심으로 생각한다. 암사자를 상상하고 땨귀를 기다리는 일들은 모모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 본 말 중에서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두렵고 무섭다. 가난이 두렵고  질병이 두렵고 잊혀지는 것이 두렵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두렵고 곧 죽는다는 것이 두렵고 앞으로 살아가야한다는 것도  두렵다,.

두려움에 떠는 로자 아줌마를 모모는 끝까지 지켜준다,

지하 은신처에서 로자아줌마에게 향수를 뿌리고 화장을 시켜주며 지켜낸다, 냄새로 사람들이 참지못하도 찾아낼때까지  지켜준다,

미운정이 쌓이고 그리움이 쌓이고 사랑이 된다.

그 사랑은 허술하지만 강하다 살아가는 힘이기도 하다.

 

모모는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모모의 성장이 아닌 읽는 이의 성장소설이다,

어느 한 시절이 지날때는 모른다, 그러나 한 참 지내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 일로 인해 나는 다시 그 이전으로 갈 수 없음을 아는 순간 내가 성장했음을 알게 된다. 나는 다시 예전으로 갈 수 없고 그 순간이 이제 아프지도 않고 그리워질 때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는 걸 알게 된다. 더 이상 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자유를 가지지 못하고 삶의 우울질을 앓게 되고 알게 되고  세상의 모든 문제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 우리는 어른이 된다.

모모도 그렇게  14살에 어른이 되었다,

모모를 읽으며 꾸역꾸역 살아내야하는 아이의 삶을 읽으며 나도 조금 어른이 되었다,

원치 않는 삶이지만 살아내야 하지 않겠냐고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표정을 한 모모가 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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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사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9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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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1. 미나토 가나에는 여러시점에서 보여지는 사건을 서술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다.

       <고백>부터 이어지는 그녀의 작품은 거의가 여러 사람의 시선에서 사건을 보고 시간이

      해체되고 다시 연결된다.

     그녀가 시간순대로 이어진 사건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쓴다면?

    성급한 결론일지모르나 잘 쓰지 못할 거 같다,

소감2 늘 드라마화 되는 것은 글이 영상적이어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드라마부터 시작한 작가라서 일까

        혹은 늘 드라마를 염두에 두고 써서일까?

       꽤 시각적이고 드라마같기는 하다

소감3  이번엔 자극적이지 않다. 잔잔하고 담백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어긋나고 삐걱거린다.

         여인 삼대의 이야기 그 사이에 이어진 꽃사슬이라고 이름지어지는 운명

         한편의 일본드라마같다.

 

몰입도 있게 보고 훅~ 읽었지만 밋밋하긴 하다.

과정도 결론도 큰 흐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뭐 결국은 잘될 놈은 뒤로 자빠져도 잘 되고 못될 놈은 꽃밭에 구르다가도 돌부리에 머리가 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 훅 하고 눈물이 터질 뻔 했다.

분명히 터질 뻔 했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르고 내 엄마가 떠오르고 그리고 내가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가 마구마구 뒤섞이면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이럴만한 건 아닌데

미유키의 헌신적이고 절절한 사랑도

사쓰키의 쓸쓸하고 단단한 태도도

리카의  밝고 단순하지만 단호한 태도도 다 마음에 든다.

읽으면서 나는  미유키는 힘들고 사쓰키같은 엄마가 되고 싶고 내 딸도 사쓰키같은 딸이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지고지순한 사랑이나 밝고 당돌한 태도보다는 쓸쓸하지만 단단하고 곧은 마음이 마음에 더 든다고 할까 내 이상향이라고 할까

내가 어떤 자녀를 갖고 싶은가는 내가 어떤 엄마이며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에 달린거라는

진부한 충고가 역시 진리라는걸 다시 생각케 한다,

어떤 인연의 연결고리나  <고백>을 뛰어넘고 싶다는 작가의 바램이나 다양한 꽃들 보다

나는 엄마와 딸의 관계가 더 관심이 간다

나는 어떤 엄마를 가졌는가

내 딸들은 어떤 엄마를 가질 것인가

결국 나를 보게 된다,

드라마에서 소설에서 내가 부러워하는 엄마의 유형은 그렇다,

강한 엄마

언제나 씩식하고 밝은 엄마

설령 그것이 자기에게만 향하는 이기심이라 하더라도  엄마가 강하고 단단해서 적어도 자식이 나중에 걱정하고 죄스러워하지 않을 힘을 가진 엄마였다,

돈이 많고 권력을 가진 엄마가 아니라 스스로 단단하게 서 있는 엄마는 나중에 부담스럽지 않고 언제나 지랄을 떨고 가서 짜증을 내도 괜찮다는 믿음을 주는 엄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 엄마를 생각하면  단단하고 강하다고 믿었던 엄마가 나중에 작고 연약하고 쉽게 부서러질 수 있다는 건 무엇보다 큰 배신감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약하고 보잘것 없는 없던 엄마라면 기대치라도 낮았을 텐데 강하다고 믿었고 그래서 조금 무심해도 괜찮다고 믿은 엄마가 무너지는 건  충격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사쓰키에게 마음이 갔었나 보다.

젊은 사쓰키도 단단하지만 나중에 리카의 기억에 간간히 보여지는 엄마 사쓰키도 무심한듯 하면서 강한 사람이었다. 리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연하고 쓰러질 듯한  마유키의 강해지는 모습을 보며 단단한 엄마의 지지를 받은 사쓰키는 그 힘을 다시 리카에게 전해준다.

 

사실 세대를 통해 이어지는 인연이라든가  권선징악이라든가 꽃은 별 관심이 없었다. 다소 막장드라마적인 요소도 심하고 억지도 있었다. 꽃 부분은 좋았지만 내가 워낙 식물에 문외한이라 아~ 좋구나 이상은 아니었으니... 그저 딸에서 딸로 전수되는 그 새대 전수만 눈에 들어왔다,

내 어머니를 생각하며 내 딸들을 생각하며 나를 생각할 뿐이다,

 

책읽고 쓰는 리뷰가 기승전내푸념으로 끝나는 건 정말 싫지만

그렇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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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리언이 말했다.

" 내가 원하는 건 둘 다야, 난 다른 시간의 다른 사람을 원해............나는 가운데 끼여서 매일    

  매일 짓눌리고 있어 상처 입을 사람은 바로 나야"

스튜어트가 말했다.

" 남편은 항상 제일 먼저 의심하지만 제일 늦게 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처 입을 사람은 바로 나다"

올리버도 말했다.

" 왜 항상 내가 비난을 받아야 하지? 애정 파괴자 올리 결혼 파괴자 올리...............

  나는 빌어먹을 창문에 머리를 박아대는 빌어먹을 나방이다. 쳐 쳐 세게 쳐  상처를 입을

  사람은 바로 나다"

 

스튜어트와 올리버는 오랜 친구다. 고지식하고 답답하고 매력없는 스튜어트와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이지만  무책임하기도한 올리버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그리고 자기가 상대에 비해 조금은 낫지 않을까하는 속내를 숨기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이

어느날 스튜어트가 질리언을 만나 결혼하기로 하자 올리버는 다소놀란다, 어찌하여 스튜어트에게 이런 행운이.... 그리고 결혼식 날 올리버는 질리언에게 반해버리고 이후 노골적으로 때때로는 은근하게 구애를 하고 우여곡절을 지나고 마침내 질리언은 스튜어트와 헤어시지고 올리버와 다시 결혼한다.. 그리고...............

 

세사람과 간혹 등장하는 질리언의 엄마 그리고 몇몇 주변 인물이 돌아가며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며 이야기는 진행된다,.세 사람의 발언이 번갈아 나오며 이야기는 진행되는데 같은 상황이 제각각의 입장에 따라 달리 보인다. 스튜어트는 감정에 둔하고 그저 고지식하게 사실을 나열할 뿐이고 올리버는 화려한 언변으로 감정과잉이고 질리언는 자기의 입장만 이야기한다, 누구나 자기의 틀 안에서 상황을 보고 사건을 파악하고 이야기 할 뿐이다,

이야기를 가만  보자니 서로는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상대가 내가 아는 것을 알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어버리거나 혹은 상대는 정말 나를 모른다고 오해하거나 할 뿐이다, 독자? 혹은 누군가에게 자기를 하소연하고 방어할 시간은 내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책을 읽다보면 서로 이야기를 하고 논쟁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해야할 말은 하지 않으면서 서로서로 자기 말 좀 들어달라고 한다,

그래도 이야기는 진행되고 사건은 일어나서 마무리가 되고 끝나지만 왠지 개운하지 않다.

결국은 귀먹어리개가 차에 치여 죽어버린 것처럼 들리지 않고 듣지 않은 사람들의 비극이 자꾸 걱정될 뿐이다,

 

사실 누구나 그렇다.

내 입장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고 내 생각과 감정이 우선시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다,.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말하지 않았음에도 서로서로 대화를 하고 이해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서로가 나는 충분히 표현했고 정당하며 때떄로 가장 아픈 건 나라고 여기고 자기의 상처만 들여다 보고 동동거린다,

나도 그렇다.

남편과 이야기하다가 혹은 아이들과 이야기 하다가 놀란다,

아니 왜이렇게 말귀를 못알아듣지? 같은 한국말을 하는데 이렇게 이해가 안되나?

그저 상대방을 나무라기에 급급하다,

사람은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제각각 자기방식의 표현을 한다,

급한 성격의 나는 모든 것을 생략하고 "이거" "그거" 하면 딱딱 알아듣기를 바란다,

성격이 느긋한 아이는 천천히 모든 것을 이야기하다가 정작 해야할 말을 빠뜨리고 이야기를 마치기도 한다. 남편은 자기가 듣고 싶은대로 듣고 받아들인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같은 언어를 쓰면서 우리는 제각각 이야기를 하면서도 제발 내 말을 들어달라고  아우성칠 뿐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안 들을 수가 있지?

서로를 나무란다,

초등 국어가 "듣. 말.쓰"

그러니까 듣고 말하고 쓰기 순서이다,

일단 들어라,. 그리고 말해라... 그리고 난 후 써라

여기서 우리는 듣기도 말하기도 제대로 안된 셈이다,

서로 자기 말을 하며 상대방의 언어를 내 언어로 통역해서 오역한다,

내 말이 오역되고 오해되는 건 전혀 예상할 수없다,

세로운 바벨탑이 여기저기 세워진다,

다시 우리는 듣기를 배우고 말하기를 배우고 나아가 공감과 경청이라는 새로운 풍조를 배워야 한다, 어렵다,

 

키득키득이며 세사람의  막장 드라마같은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괜히 뜨끔해진다,

질리언에 스튜어트에 그리고 올리버에 나와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바꾸어도 상관없다,

뭐 내가 질리언처럼 매력적이지 않아 두 남자의 구애를 받은 상황은 안 생기겠지만 두 타인 사이에서 오해받고 이해시키지 못해 동동거리며 결국 나 자신의 연민에 빠지드는 일은 종종 있어왔으니까,...

그래서 몹시 외로웠었나보다.

 

 

즐리언 반스가 정말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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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2015-05-07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얼마전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재밌게 읽었는데,
줄리언 반스 매력적인 작가인 것 같아요 (^o^)b

푸른희망 2015-05-07 16:43   좋아요 1 | URL
저도 ˝예감은~˝을 읽고 줄리언 반스의 매력에 빠졌지요. 이 책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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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에게 무진이란 무의식 아래 숨겨둔 "내"가 있는 곳이다,

전쟁중에 나를 보호했던 어머니. 그때 이유없이 나를 떠난 여인 현재 나를 만든 아내

그 모두는 지금의 나를 있게한 은인이면서 동시에 나를 억압하는 존재들이다,

나는 역앞에서 본 미친 여자처럼 그렇게 정신을 놓고 싶고 도랑에서 죽은 창부처럼 그렇게 명을 놓아버리고도 싶었다,

무진은 그렇게 내가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는 곳이면서 내가 외면한 내 본성을 마주하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무진의 안개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서 존재감을 나타내는  그런 모든 타자들을 떨쳐버리고 싶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의 속물을 보여주는 조와 나의 잃어버린 순수성을 보여주는 박

그들 역시 마뜩치 않고  불편하다

그 중 인숙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곳을 끊임없이 떠나고 싶어하는 그녀의 안달을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안다.

누군가는 순수하다고 여기지만 또 누군가는 가장 추악하고 속물스럽다고 보는 그 인숙이 나다

나는 보여지는 내가 전부가 아니다, 그저 무진의 안개뒤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존재이고 몇개의 가면뒤에서 불안하게 떨고 있는 어린 아이다,

나는 지금 무진에서 내 민낯과 마주하지만 이곳을 떠난 순간 그 모든 것을 다 잊을 것이다,

잊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럽다, 나의 반성과 성찰이 가뭄 속의 논바닥처럼 얕고 쩍쩍 갈라지는 불온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나를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내 뒤꽁무니에 붙언 그 부끄러움을 나는 결고 마주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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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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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안 하는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타자는 불가해한 존재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바틀비 그는 우리에게 타자였다.

그의 소극적인 저항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고자 하는 몸짓이다,

바틀비는 모든 것을 안하는 것으로 선택함으로서 노동과 생존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것을 선택한다, 그 행동은 어떤 큰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세상에 질문을 하나 던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자주의 구조에 대한 저항.

누군가 만들어 놓아 이젠 익숙해진 사회 구조에 대한 저항

나아가 생존에 대한 저항까지

무엇이라고 이름 불리든 바틀비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일상을 한 번 뒤집어 주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낯설고 두려운 타자가 된다,

우리와 다른 사람을 볼 때 우리는 화자인 변호사 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가고 동정하고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그 범위 이상은 절대 넘지 않는다,

타인을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가,

우리는 주위의 바틀비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나는 누군가에게 바틀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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