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사 2 - 일본이 말하는 일본 현대사, 1945-1989 전후편戰後篇
한도 가즈토시 지음, 박현미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맥아더: 전쟁 책임을 질 것인가?
천황: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할 이야기가 있다.
맥: 좋다. 말해라.
천: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하건 상관없다. 나는 모든 책임을 지겟다. 당신이 대표하는 연합국의 결정에 나를 맡기기 위해 찾아왔다. 나를 교수형에 처해도 상관없다(You may hang me).

그러나 나는 전쟁을 바란 적은 없다. 왜냐면 나는 전쟁에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군부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으며 일본 국민의 리더로서 신민이 취한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질 생각이다.

“맥아더는 이때 매우 놀랐으며 감동했다. 전쟁에 패한 나라의 원수가 직접 찾아와 ‘나에게 책임이 있으니 처분을 받겠다’고 말한 것이니까. 역사를 살펴보면 대개 망명이나 목숨을 구걸하거나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버티지 스스로 ‘You may hang me’라고 말한 예는 없는 것 같다. 맥아더는 천황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록’에도 적었고 자기 입으로도 자주 이야기했다.”

천황에 대해 감동한 것은 맥아더 뿐만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연합국에 통보했다. 단 연합국이 요구하는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건다: 천황제의 보호를 보증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전보를 받은 미국은 무척 곤란해한 것 같앗다. 육군장관인 스팀슨은 ‘일본인은 어찌 되었든 끝까지 천황을 좋아하는구나’라며 말할 수 없이 감동했다고 나중에 글을 남겼다.”

천황과 첫만남에서 “맥아더는 처음에 아주 거만하게도 천황을 맞으러 나오지도 않았지만 돌아갈 때는 현관 입구까지 배웅을 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후 맥아더는 천황을 목 매달라는 연합국들의 여론에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맥아더가 보호한 것은 ‘천황’이지 ‘천황제’는 아니었다. 미국의 일본점령 정책의 목표는 군국주의의 해체였고 다시는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않도록 일본의 체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군국주의의 해체에는 천황제도 포함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천황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인간선언을 한다. 이후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신앙처럼 일본인을 지탱해왔던 정신구조는 전부 다 날아가 버렸다. 그러면 그 대신에 무엇이 일본인의 정신을 지탱해 온 것일까? 그것은 미국식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때부터 일본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의해 재건되어야만 했다.”

이후 미국이 만든 소위 ‘평화헌법’에서도 여전히 천황은 국가원수였다. 그러나 메이지 헌법과 달리 국가의 주권은 천황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었고 천황은 정치에 관여할 권한이 없는 상징에 불과하게 되었다.

천황이 국가의 상징이라는 것은 미국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다. 이후 1958년 미치코가 황태자비로 간택되었을 때의 ‘미치붐’과 국가적 행사로 성대하게 치뤄진 황태자의 결혼식 때 천황의 지위에 대한 문제는 사실상 결론이 난다. 천황제를 상징으로 만들고 그를 계속 중요한 존재로 떠받든다는 것이 결혼식을 둘러싼 열광으로 사실상 합의된 것이다.

천황은 상징으로 군림할 뿐 지배하지 않는 국민주권의 원칙이 만들어지면서 민주주의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군국주의의 기둥들을 없애야 햇다.

GHQ는 가장 먼저 군대를 해체했다. 그리고 재벌도 해체되었다. “GHQ의 주장은 ‘일본의 산업은 일본의 지지를 받았고 그 덕분에 소수의 강화된 재벌의 지배하에 있었다. 산업지배권의 집중은 독립 기업가의 창업을 방해하고 일본의 중산계급의 진흥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려면 경제도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지주들도 없어져야 햇다. “이 농지개혁이 성공한 덕분에 일본의 농촌이 어느 정도 빈곤에서 해방이 되었고 그 덕분에 지금의 일본이 만들어졋다.”

그리고 자본가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 노조를 만들었다.

전전 일본의 시스템은 국가의 주권을 가진 천황을 정점으로 군부와 재벌, (정치 엘리트를 배출하는) 지주계급이 떠받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천황은 허수아비가 되고 군부와 재벌 그리고 지주계급이 거세되었으며 전전의 정치인들 역시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정치권이 진공상태가 된 것이다.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천황의 ‘관료’들이었다. 그리고 그 관료들을 이끈 것은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었다. 전직 외교관 요시다 시게루는 전전에 태평양전쟁을 반대한 것이 훈장이 되어 공직추방에서 제외되었다. 전전의 거물 정치가들이 공직추방을 당해 진공상태가 된 정치권을 장악한 요시다 수상은 관료출신들을 문하생으로 키워 후에 자민당 ‘보수본류’를 만들었고 전후 일본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의 비전을 보통 ‘요시다 독트린’이라 부른다.

전후 일본의 원형을 결정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방침은 비군사화, 민주화였고 미국이 떠난 후에도 ‘평화와 민주주의’란 원칙으로 일본의 방향이 된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는 슬로건일 뿐이다. 슬로건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 해석에 따라 일본이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는 4가지 견해가 있었다고 저자는 정리한다.

“첫째는 전쟁 전과 같이 천황을 제일 윗자리에 앉혀 육해군을 정비한 이른바 ‘보통 국가’가 되는 것이다. 두번째는 좌익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세번째는 경무장을 한 통상무역국가이다. 경제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풍요로운 국가를 만든다는 선택지이다. 그리고 네번째는 소일본이다. 분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문화국가로 동양의 스위가 되는 것이다.”

요시다 독트린은 세번째를 말한다. 그러나 1949년 공직추방이 해제되면서 복귀한 전전의 정치가들은 요시다 독트린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보통국가였다. 이후 요시다 독트린과 보통국가론이 자민당 내에서 충돌한다.

요시다 독트린은 ‘군비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를 다시 부흥시켜 무역국가로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상적인 국가인가? 국가도 사람처럼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어야 한다. 군대도 없이 집 지키는 일을 다른 나라에 맡기고 하라는 대로 뭐든 하는 자존심도 긍지도 없는 나라가 제대로 된 국가인가? 보통국가론자들의 질문이다.

같은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 1970년 자위대 건물에서 할복자살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이다. “경제는 부흥했을지 몰라도 패전으로 상실한 일본인의 전통적인 문화와 정신은 전혀 부흥하지 않았다. 돈을 버는 것에만 만족하겠는가? 모두 그렇게 얼빠져 있어도 좋은가?”

“’나는 코를 막고 전후를 살아왔다.’고 말하며 이런 전후는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던 미시마 유키오는 자위대의 이치가야 주둔지에서 연설을 한다. 11월 25일의 일이다. ‘자위대 제군들이여, 한심한 정부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켜라. 일본의 정신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라고 외치고 헌법개정, 천황친정의 부활을 큰소리로 호소랬지만 아무도 박수를 보내는 이가 없고 단지 어안이 벙벙해져서 바라만 볼 뿐이엇다. 미시마는 처음부터 예상을 하고 있었고 죽을 생각으로 들어왔으니 자기가 할 말을 다 하고 할복자살을 하고 만다. 이것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 일본에 중계되었다.”

후의 미시마처럼 국가의 자존심을 외치는 보통국가주의자들이 권력투쟁에서 이긴 후 50년대 후반은 보통국가론자들이 정치를 장악한다. 요시다 내각을 무너트리고 수상이 된 (전전의 거물) 하토야마는 선거에서 ‘헌법개정, 재군비, 공산권과의 외교’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지금까지처럼 미국이 시키는 대로 공산권 국가와는 외교를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는 독립국이므로 일본의 자주적인 외교정책으로 공산권과도 외교 관계를 맺자는 말이었다.”

문제는 보통국가론이 전후의 대원칙인 평화와 민주주의에서 평화를 깨는 것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아직 그때만 해도 일본인들에게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15년 전쟁’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었다. 그런데 전전에 그 전쟁을 일으켰던 정치가들이 주장하는 보통국가론은 다시 그때로 돌아가자는 말로 들렸다. 이후 평화란 슬로건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아 총대를 맨 것이 사회당이다. 전쟁포기를 명기한 ‘평화헌법’ 수호 단 한가지가 사회당의 존재이유가 된다. 사회당의 존재는 헌법개정을 불가능하게 했고 하토야마 내각 출범한 3쇼와 30년부터 쇼와 31년(1956)까지 평화운동을 명분으로 한 유혈사태가 종종 일어난다.

헌법개정과 재군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토야마에게 남은 것은 자주외교 한 가지였다. 그는 소련과의 국교정상화에 매달린다. 소련과 국교가 회복된 후 일본은 UN 가맹국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하토야마는 할 일을 다했다며 물러난다.

하토야마의 퇴진 후 역시 기시가 수상이 된다(1957). 그 역시 하토야마 이상으로 강경한 헌법개정과 재군비론자였다. 그러나 평화주의가 강력한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기시는 안보조약 개정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 그가 말하는 안보조약 개정은 미국과 일본이 대등해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기지를 빌려간 이상 미국은 제대로 일본의 방위를 할 의무가 있고 대신에 일본도 전면적으로 협력을 하겠다는 것이다.” 반대할 것이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극동의 국제평화 및 안전 유지를 위해 일본은 협력한다’는 부분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일본을 반공의 성채에 지나지 않았던 단계에서 이제는 공산주의에 맞서는 유력한 동맹으로 인정해달라는 말이다. 일본은 미국과 하나가 되어 열심히 싸울 테니 미국은 일본을 제대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지켜주어야 한다는 계약을” 하자는 말이다.

미국으로선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의 악몽을 떠올렸다. “전후 일본에서는 미국이 강요한 것라고는 하지만 신헌법에서 정해놓은 대로 평화주의적인 국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때 나온 안보개정이 개헌, 재군비로 이어지지 않을까 의심햇고 국내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시는 강행돌파했다.

“이후 약 1개월은 정말로 끊임없이 데모가 벌어졌으니 매일매일 데모와 함께 시작해 데모로 끝났다. 경찰과의 싸움도 더욱 험악해졌다. 절정은 (1960년) 6월 15일 밤이엇다. 데모대가 의사당 문을 부수고 안으로 돌입했다. 그리고 경찰들이 데모대를 습격하였으니 수만 명의 대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날 오후 7시 도쿄대생이었던 간바 미치코가 사람들에게 짓밟혀 사망했다. 사망 후에도 불을 피우고 라이트가 비춰져 하룻밤 내내 전쟁과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후에 소방청이 발표하길 중상 43명을 포함하여 589명이 부상했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좀 더 많았을 것같다.”

그러나 기시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임시각료회의에서 치안을 이유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을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데모는 계속 이어져 조약 개정이 자동으로 성립하는 6월 19일이 왔다. 시각이 12시를 지나자 그 순간 국회를 둘러싼 35만명의 데모대의 마음속에서 커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고 한다.

기시는 그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관을 덮으면 모든 일이 가라앉을 것이다.’ 자신이 죽고 나면 이해해줄 것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출처는 중국의 ‘진서’라고 한다. 그런 말을 남기고 관저를 나와 사저로 돌아갔다. 이렇게 기시 내각의 사명이엇던 안보조약 개정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백지상태에서 전전의 군국주의, 대일본제국시대에 대한 혐오감과 반발심을 계속 주입받으면서 자랐다. 그러니 그토록 혐오스러운 도조 내각의 각료였고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던 기시가 군사화 노선으로 달려가는 법안을 강행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보파동은 군사대국 일본에 대한 결별이자 평화국가 일본에 대한 강한 기원을 의미했다.

소동은 기시가 퇴진하는 순간에 놀랍게도 뚝 끝나고 말앗다. 쇼와 3년에는 ‘더 이상 전쟁이 아니다’가 유행어가 되었다. 일본이 정말로 전후 기분을 졸업한 것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안보소동은 전후의 불만을 전부 날려버린 이른바 가스 빼기라고 할 수 있으며 ‘전후 일본의 장례식(다나카 미치타로가 한 말)이었다.”

그 후 자민당은 다시 요시다 독트린으로 복귀했고 요시다 문하생들이 연이어 수상이 되었다.이후 보통국가론은 쇼와 연간에 다시는 제기되지 않았다. 저자는 안보파동 이후를 요약하는 말로 당시 유행했던 ‘데모는 끝났다. 이제 취직이다’를 내세운다.

기시의 뒤를 이은 요시다의 우등생 이케다 수상은 “일본 국민의 소득은 미국인의 1/8, 서독의 1/3입니다. 이 소득을 두 배로 만들겠습니다. 즉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월급을 두 배로 만들겠습니다.”고 선언한다. 소득배증운동 또는 ‘월급 두배론’이다.

“실제 쇼와 30년부터 35년까지 5년간 GNP 연평균 성장률은 8.8%를 상회하여 연간 10.4%로 성장하였으니 한 사람당 급료가 2.7배가 될 정도였다. 일본인의 생활면에서는 쇼화 20년대의 전후사가 여기서 일단 마무리되고 쇼와 30년대 이후의 진정한 전후사가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이때부터 일본의 고도성장이 개막되었고 국민들은 이때를 출발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고 본다.

쇼와 39년(1964)엔 신칸센이 개통되었다.

“지금도 때때로 도쿄역에서 도카이도 신칸센을 탈 때 18번과 19번 선 계단 밑의 막다른 벽에 구리판으로 새겨진 문구를 읽곤 한다.

도카이도 신칸센
이 철도는 일본 국민의 지혜와 노력에 의해 완성되었다.
도쿄와 신 오사카 간 515킬로미터
기공 1959년 4월 20일
운행개시 1964년 10월 1일

허황됨이나 교만함, 흥분을 배제한 산뜻하고 깔끔한 문장이다. 운송대신이나 국철총재의 이름 따윈 없다. 일본 국민 모두가 만들었다고 적혀있을 뿐이다.”

그리고 도쿄 올림픽이 그해에 있었다. “당시 일본인이 마음속으로 느낀 것은 ‘이걸로 겨우 패전국에서 빠져나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선진국의 일원이 되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올림픽은 일본인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햇다.

올림픽은 전후 국가건설 과정에서 커다란 변화를 이룬 중간지점이 되엇다. 점령으로 한번 전환이 찾아왔었고 안보소동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이제 다시 올림픽으로 한 획을 긋게 되었으니 여기서 다시 한 번 또 다른 전후가 시작되었다.”

올림픽 폐막식이 치러진 후 암으로 투병하던 이케다는 은퇴하고 역시 요시다 우등생인 (그리고 기시의 동생인) 사토내각이 성립한다.

“이케다는 드골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세일즈맨’이라고 비웃을 정도로 경제성장에 전력을 다햇지만 정치적 외교적 문제에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사토는 정치적 문제에도 맞대응할 각오를 한다.” 사토는 “오키나와가 조국으로 복귀하지 않는 한 전후는 끝난 것이 아니다’며 오키나와 문제를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

“생각해보면 전후 일본의 내각은 각각 자신이 수상이 되기만 하면 ‘이것만은 반드시 이루어내겠다’라는 커다란 명제를 안고서 그걸 달성하는 형태를 계승했다. 요시다 시게루는 (재군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었지만) 강화조약을 맺엇고 하토야마는 소련과의 국교를 회복했다. 기시는 맹렬한 반대에도 미일이 비교적 평등한 입장에 설 수 있는 안보조약의 개정을 이뤄냈다. 이케다는 고도성장을 실현시켰다. 그러므로 사토는 자신이 이룰 대사업으로 오키나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한 것같다.”

요시다 독트린이 부활한 이 시절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전체적으로 살기 좋은 시절이엇다. 이 시절을 에도 중기의 번영기에 빗대어 ‘쇼와 겐로쿠’리 한다.

그러나 풍요와 함께 체제가 굳어졌고 “아직 사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사람들은 그 굳어져 버린 체제의 어디에도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같다. 혼돈의 시기는 매우 먼 옛날 이야기가 되었고 빈부의 차가 뚜렷해졌으며 세상은 완성되어 버렸다. 남은 것은 폐쇄감뿐이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반역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68세대의 시작이엇다. “의기소침해 있었던 일본의 학생들이 쇼와 43년 가을 무렵부터 힘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이 힘의 중심을 이룬 것은 단카이 세대이다. 쇼와 22-25년 사이에 태어난 약 7백만의 베이비부머들이다.

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늘 경쟁을 해야 했다. 이들보다 조금 전인 쇼와 21년(1946)에 태어난 마쓰모토 겐이치는 자신이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1학년이 4개였는데 다음 해는 8개가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10개반이 되었다고 했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 한 명 한 명의 개인은 소홀하게 취급받았다. 모두 평등하게 그런 취급을 받았다면 몰라도 차별을 받게 되었으니 차별은 바로 불만이나 갈등으로 이어지고 반발심이 생겨 금방 화를 내는 성격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이 대학생이 된 것이다. 마침 그때 수업료 인상 문제로 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는 쇼와 겐로쿠로 만사태평하게 지내온 교수들이 빛바랜 30년 전의 노트로 강의를 하고 잇었다. 몇 년전의 노트를 빌렸는데 ‘여기서 교수가 농담을 했다’는 메모가 적힌 곳에서 그대로 농담을 들여주는 강의도 있었다. 그런 일을 포함해 이 상황을 용서할 수 엇다는 생각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를 굳이 들자면 단카이 세대는 고도성장기에 철이 들었을 테니 치열한 경쟁을 겪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다. 지그시 뭘 참은 적이 없었다. 자신들의 생활이 풍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부족한 건 참을 수 없다는 의식이 근저에 깔여 있었다.

한편으로는 단카이 세대의 아버지들은 정말로 열심히 일했고 게다가 조직에 소속되어 관리를 받고 잇었다. 회사중심의 회사 봉건 시대라 할 수 있다. 당시 자주 하던 말 중에 쇼와의 전쟁 때는 군국 봉건주의 시대였고 전후는 회사 봉건주의 시대라는 말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그런 관리 사회에 대한 불만을 터트린 것이다. 그리고 대학수업은 지겹기만 했다. 공해나 환경문제, 세계각지의 혁명과 학생운동, 그런 것이 겹쳐져 세상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이 증대되어 반역이 시작되엇다.”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한 학생은 전체의 2할 정도엿다고 한다. 6할은 무관심햇다. 그러나 베이비부머의 2할이면 상당한 숫자엿다.

경찰 기동대와 학생 시위대의 난투가 일상이 되어가는 와중에 클라이막스인 도쿄대 야스다 강당 점거사건이 일어난다. 야스다 강당이 전쟁터가 된 후 “묘하게도 수많은 일반 학생이 투입되었던 대대적인 학생운동은 마치 자취를 감춘 것처럼 조용해졋다.” 이후 요도호 납치사건, 아사마 산장 농성, 텔아비브 공항 난사사건이 있었지만 신좌익은 고립되고 갈수록 소수가 되엇다.

1972년 오키나와가 반환된다. 저자는 오키나와 반환으로 일본의 전후는 일단 끝났다고 말하며 이책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1989년 쇼와 천황이 죽기까지의 나머지 쇼와사를 간략하게 돌아보면 이렇게 결론으르내린다.

“쇼와 천황이 사망한 그해의 12월29일 경제대국 일본은 최고로 빛나는 날을 맞이했다. 도쿄 증권 거래소의 평균주가가 3만 8915엔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니 영원히 나올 것같지 않은 사상 최대의 기록이었다. 이 기록이 나온 때가 쇼와 천황이 사망한 해였다는 점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지지만 전후 일본이 만들어온 경무장 경제제일의 통상국가가 이때 완성되었고 최고로 빛났던 순간이엇다.

그리고 쇼와 시대가 막을 닫는 것을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세계정세가 격변했다. 냉전의 종결은 일본의 버블을 터트렷다. 큰 번영도 일장춘몽이 되어 버렸다. 정말로 허망한 거품이엇다.

40년마다 일본이란 국가는 변해왔다. 전후 일본은 쇼와 27년(1952)에 독립국으로 발족한지 40년이라면 1992년인데 이 전년에 버블이 붕괴되었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 놓은 전후 일본은 40년 후에 주가가 최고치를 기록하고 세계 2위를 자랑할 정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열심이엇던 일본이 러일전쟁에 이겨(1905) 국가건설에 성공하자 우쭐해진 나머지 점점 국제사회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결국에는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국가를 멸망시킨 것이 40년 후의 일이었다. 이것과 똑같았다. 전후 일본도 독립해서 국가건설을 시작한 후 40년 만에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커다란 번영을 구가하여 다시 의기양양해 하더니 버블이 붕괴되어 우스운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 이후의 일본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 어떤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조차 없이 부유ㅗ하고 있으니 다시 멸망의 40년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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