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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 윈스턴 처칠, 그 불굴의 초상
제프리 베스트 지음, 김태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이책의 제목은 처칠의 말을 약간 변형한 것이다(원서의 제목은 그냥 건조하게 ‘위대함에 대한 연구’이다). 원래 처칠이 한 말은 ‘절대 포기하지 마라(You, never give up!)’는 15초짜리 졸업축사였다.
처질이 그 말을 했을 때는 2차대전 중인 1941년 10월29일이었다. 처칠은 단상에 올라 해로우 스쿨 졸업생을 응시하면서 나직이 말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잠시 뜸을 들인 후 좀더 큰 소리로 말햇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다시 잠깐 졸업생들을 둘러보고 더 큰 소리로 말햇다.
“너희들, 절대 포기하지 마라!”
그리고는 단상을 내려왔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린 뒤 환호성과 함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흐느껴 우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연설일 것이다. 물론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그 연설은 위에서 말한 전설보다는 조금 길었고 조금 말이 달랐다. 짧은 연설에서 사람들은 다음 부분만 기억해 전설로 남게 된 것이다.
“지난 10개월간 제가 얻은 교훈은 단 한가지입니다: never give in, never give in, never never never never-in nothing, great or small, large or pretty-never give in except to convictions of honoour and good sense, Never yield to force; never yeild to the apparently overwhelming might of the enemy.
짧은 연설이다. 그 짧은 연설에서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것은 반복된 ‘never give in, never, never’였고 그것이 더 단순하게 정리되어 ‘never give up’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 연설이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전설이 된 것은 사람들이 ‘포기하지 말자’는 처칠의 메시지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을 포기하지 말자는 말이었나?
2차대전의 종전이 가까웠을 때 그는 영국이 “승전은 우리의 눈에 승리라기보다는 구원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는 1940년대에 영국인을 이끌고 영국이 ‘홀로 맞서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도박이었고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살아남을 가능성조차 아주 낮았다.
처칠은 후에 전쟁 초기를 회상하며 이때처럼 “연이어 쏟아지는 뉴스를 보며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공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던 때는 없었다”고 썼다.
그러나 더 문제는 영국인들의 태도엿다. 전쟁 초기 그가 싸운 대상은 (암울한 전황으로 인한) “패배주의가 아니라 혼란과 싫증 그리고 태만이엇다. 그가 계몽에 나선 대상은 ‘유럽 역사에서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자란 최초의 세대’였다.
“당시 정치계에는 (전임 수상인) 체임벌린을 풍자하는 이런 시가 유행했다.
통풍에 걸린 늙은 정치가는
전쟁의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나와 나의 동료들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소’라고
답장을 썼다.”
체임벌린을 대신해 수상이 된 첫해 처칠은 다른 무엇보다도 싸워야 할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프랑스가 항복한 사실을 전하면서 처칠은 “이제 우리는 전 세계를 위해 정의를 지키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인류를 덮친 히틀러의 저주가 사라질 때까지 싸울 것입닌다.”
“독일에 맞선 이 전쟁이 어떻게 진행될지, 얼마나 멀리 퍼질지,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과 슬픔이 우리의 여정을 따라다닐 것이고 고난은 우리의 옷이 될 것이며 끈기와 용기는 우리의 방패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업적은 진정한 구원의 횃불로 타오를 때까지 유럽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투쟁의 핵심은 문명과 자유, 관용, 그리고 법치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햇다. “만약 우리가 히틀러의 공격을 막아 낸다면 전 유럽이 해방될 것이고 인류의 삶은 밝고 넓은 고원으로 올라설 것입니다.”
그의 연설을 들은 영국인들은 책임감과 자부심을 느꼈고 위대한 드라마에 동참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성한 의무를 맡은 것이었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싸울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사이아 베를린의 회상이다. “수상은 국민에게 상상력과 의지를 불어넣었다. 실제보다 더 거대하고 고귀한 인물처럼 보였던 그는 위기에 처한 국민의 정신을 크게 고양시켰다.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원하지 않앗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그러한 삶을 위대한 투쟁으로 묘사하고 국민에게 역사적 순간을 살아가는 영웅이라는 인식을 심어 줌으로써 국민이 일상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덕분에 겁쟁이엿던 사람들은 용사가 되어 빛나는 갑옷을 걸치고 목표를 달성햇다.” 베를린은 거기에 덧붙여 이렇게 썼다. “그의 말은 매우 마술적이었고 그의 신념은 매우 강했다. 그는 뛰어난 웅변력으로 국민이 실제로 마음 속에 용기를 지녔다고 믿게 만들었다.”
“처칠의 연설을 듣는 일은 거대한 종교 행사와 같았다. 처칠은 국민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불어넣엇다. 처칠의 연설을 들으면 영국인들은 용맹하고 가치있는 국민과 국가(그리고 지금은 쓸 수 없는 단어인 인종)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영국의 생존은 단지 한 국가만이 아닌 문명과 자유의 생존을 의미햇다.”
처칠은 “완전히 합리적이진 않지만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원대한 비전 덕분에 그는 1940년 5월에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이 지도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처칠이 보여준 비전은 대영제국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이었고 대영제국의 운명은 세계의 운명이라는 신념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국민들과 공유햇던 것이다. 처칠은 수상직에 적임자이고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신념은 시대에 뒤진 유물이었고 전쟁이 끝난 후 그 신념의 대가는 비참햇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나치와 싸워야 한다는 처칠의 생각은 옳았다. 그러나 “승리를 위해 국력을 소진하는 바람에 대영제국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영국의 자주성은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반사회주의에 대한 처칠의 비전도 무너졌다.”
처칠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자유주의자 및 제국주의자, 그리고 에드워드 시대의 인도주의자 및 국가 효율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다.” 그가 가진 열정과 원칙은 자유라는 문명의 가치와 (그 문명을 대표하는) 대영 제국의 위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그가 정치경력을 시작했을 때부터 낡은 것이었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기울기 시작한 제국은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다.
1차대전이 끝났을 때 영국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다. 그러나 영국의 최고위층은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광대한 제국을 지킬 수 있을지 근심하고 있었다. 제국은 밖에서도 안에서도 파열음을 내고 잇었다. 처칠은 자신의 손으로 아일랜드를 사실상 독립시켜야 했다. 그러나 인도의 자치를 인정해야만 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1930년 초 처칠은 인도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밀어붙이다가 당 지도부와 5년 동안 마찰을
빚었다. 이 마찰은 “황야에서 보낸 시기’라고 자평할 정도로 오랜 정치적 고립으로 이어졌다.
처칠은 평생 인도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것에는 시간과 함께 입장을 바꾸던 그로서는 특이한 일이엇다.”
왜냐하면 인도의 자치는 정치가 인생이었던 그의 모든 것인 제국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35년 제정된 인도 정부법에서 제국의 종말의 시작되었음을 감지했고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인도 독립을 지휘한 애틀리 수상은 처칠이 인도에 대하여 아직도 빅토리아 시대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처칠은 사적인 자리에서 마치 자신의 물건을 뺐긴 것처럼 영국의 왕관에 박힌 보석을 잃어버렷다고 한탄하면서 인도인들은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보기에 처칠의 태도는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현대의 모든 정치적 변화를 보지 못하고 제국의 권위와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낡은 인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배본능을 제국에 적용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갓습니다. 그런 제국 개념은 이미 끝났습니다.’인도 총독의 말이다.”
처칠의 태도는 분명 반동적이었다. 처칠의 견해는 식민 지배가 원주민들에게 혜택을 주며 원주민들이 자립할 역량을 갖출 때까지만 지속한다는 영국의 식민이론에 기초한 것이엇다. 문제는 더 이상 그런 제국은 존재할 수 없고 그런 이론은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쟁 중에 처칠은 ‘대영제국의 해체를 관장하려고 수상이 된 것은 아니다’고 선언했지만 필연적인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종전 무렵 미국인들이 ‘중국을 잃었다’고 아쉬워한 것처럼 처칠은 ‘인도를 잃었다’고 인정해야 햇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시아에서 제국의 권리를 유지할 수단이 너무 제한적이엇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영국은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는 강대국의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해졌다. 내각의 회의에선 대개 재무성의 의견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햇다. 영국은 자신이 가치있는 동맹이라는 것을 미국에게 증명하기 위해 과감하게 재무장 정책을 추진했지만 그다지 크지 앟은 국방투자 조차도 허약해진 경제에는 무리엿다. 결국 처칠은 재무장 정책을 포기해야 했다.
“영국과 함께 독일에 맞서는 일에 뛰어들었을 때 미국의 전쟁 목표는 전후에 미국이 안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엇다. 그 세계는 당연히 나치즘이 없어야 햇고 (대영제국을 포함한) 제국주의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햇다.”
미국은 대영제국이 무너지도록 방관했고 오히려 조장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인들은 대영제국 또는 영연방과 연합하는 일에 처칠만큼 열성적이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백인 사촌’인 미국인들이 영국의 통치라는 ‘축복’을 거부하는 인도인들과 아랍인들을 돕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햇다. 처칠은 그가 주문처럼 되풀이햇던 영어권 국민 사이의 애정에 대한 믿음을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 믿음이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착각이라는 결론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젊은 시절에 앵글로색슨족이 지배자로서 장점을 타고낫다는 당시의 보편적 믿음을 공유햇다. 영어권 국민 사이의 단결은 그러한 믿음을 국제사뢰가 받아들이기 적절한 형태로 바꾼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처칠은 ‘철의 장막’이란 슬로건을 만들어 냉전을 공식화했고 EU의 기본개념을 만들고 그 초석이 될 프랑스와 독일이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으며 ‘공포의 균형’이란 핵시대의 전략을 마련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세계를 움직이는 정치가로 군림햇다.
그러나 “그는 세계의 미래와 제국의 존립 그리고 유럽의 상황에 대한 깊은 불안을 갖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더 이상 글래드스턴이나 솔즈베리 같은 위인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위인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며 갈수록 진부해지는 세계에서 길을 잃은 구식 ‘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것이 암울하던 1940년 “지금이 국민에게 최고의 시간”이라고 말햇다. 그때는 그에게도 최고의 시간이엇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대영제국이 서시히 그러나 확실하게 먼지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젠 다 귀찮아.” 처칠의 마지막 말이었다. 1965년 여왕은 처칠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겠다고 발표햇다. 원래 국장은 왕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특별한 대우였다. 1월의 추운 날씨에 30만명이 참가한 그의 장례식은 거의 전 유럽에 방송되었고 라디오로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유럽에서만 약 3억5천만명이 그의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추모한 것은 단지 위인이자 국가의 영웅이었던 사람이 아니라 그가 이끌었던 제국과시대였다. 처칠의 죽음은 영국사의 한 시대가 마감되었음을 말해주는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