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밥상 - 밥상으로 본 조선왕조사
함규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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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
장지문이 드르륵 열린다. 사옹원 제조가 두 팔로 음식상을 받들어 들어오고 내관들이 종종걸음으로 따른다. 장지문이 스르르 닫힌다.
“젓수시옵소서”
“요즘 계속 비가 없소.”
“그러하옵니다.”
사옹원 제조와 왕은 날씨 이야기부터 정치문제까지 두루두루 화제에 올린다. 왕의 표정이 보일락 말락 굳어진다. 엄선된 식재료만 썼을텐데 음식의 일부가 물이 좋지 않다. 식재료를 진상한 지역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제주도의 비바람 피해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 아니오?”
“황공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쯧쯧. 농사지을 땅도 변변치 않아 물고기나 조개를 잡아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어제 휼전(재해를 당한 고을에 왕이 특별히 위로금이나 먹을 거리를 내리는 일)을 베풀라고 분부했지만 오늘 조회에서 더 근본적인 대책을 논의해야겠소. 진상도 당분간 그만두라 이르고.”
“아무래도 감선(왕이 자연재해나 인위적인 재난을 만나 반찬의 가짓수를 줄여 하늘과 백셩에게 반성하는 뜻을 보이는 일)에 들어가야겠소.”
“감선 말씀이옵니까? 황공하오나 대행대비마마의 1주기로 철선(상과 같은 이유로 고기반찬을 먹지 않는 것)을 하신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사온데…”
“아니, 아직 본격적인 가뭄은 아니라도 산과 들의 채소가 시들해질 정도라면 과인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오. 제주도의 피해도 있고 하니, 감선을 실시하여 천지신명과 백성들 앞에 과인의 부덕함을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야겠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아침수라가 끝났다. 사옹원 제조는 들고 나온 수라상을 내관들에게 넘긴다.
사옹원 제조: 어흠, 그러니까, 뭐 다들 알겠지만, 요즘 주상께서 입맛이 통 없으시니 큰일이오. 찬을 불과 몇 가지만 집으시고, 그대로 물리고 계시오.
상선: 날씨가 하도 더우니 그렇기도 하시겠지만… 그러다 보니 얼마 전까지 시고 찬 음식을 자주 찾으셨지요. 입맛이 없으신 중에 동치미만은 싹싹 비우실 정도로. 그 때문에 비위가 손상되신 게 아닐는지?
상식: 확실히 중궁전에 납시셨을 때도 참외와 화채를 매번 드셨지요. 그러고 보니 중전께서 최근 주상 전하의 기가 많이 약해졌다고 걱정하고 계십니다.
상선: 선대께서도 여름이면 찬 것을 지나치게 드시고 탈이 여러 번 나시더니만… 약방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사옹원 제조: 아직은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닌가 보오. 그래서 약을 쓰기보다는 기력을 돋울 뭔가를 젓수실 필요가 있는 게요.
제거: 매운 맛으로 기혈의 운행을 돕고, 비위를 따뜻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드시는 찬에 후추와 생강 양념을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옹원 제조: 좋소. 하지만 지나치지 않도록! 그리고 효과가 빨리 나야 합니다. 입맛과 기운이 없으시니 짜증도 느신 것 같고, 경연장에서도 신하들에게 말이 곱지 않다고 해요! 양념도 좋지만 기력을 회복하실 찬품을 생각해 보시오.

이책의 저자가 재구성한 장면이다. 저자는 이책에서 이 장면의 의미를 밥상을 통해 왕과 왕조의 ‘양생’을 도모한 것이라 해석한다.

“조선 왕들의 밥상에 올랐던 음식은 유별나게 희귀한 식재료를 쓴 것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교묘한 조리 기술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나라의 왕실에서 즐기던 요리에 비해 맛이라는 면에서 특별히 열등하지도 않다. 그러나 곰발바닥이나 제비집 같은 재료는 조선 왕 정도의 힘이라면 못 구할 것도 없었을 텐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외국에서 구입해 들여온 진기한 식재료나 국내에서 나지만 워낙 귀해 왕이나 먹을 수 있는 재료는 없었다. 나라가 가난해서 그랫다고도 볼 수 없다. 민간에서는 진귀한 식재료, 사치스러운 요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궁중요리가 특별한 점은 재료나 정교한 요리 기법에 있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써서 무척 많이 손을 대어 만든다는 데 있다. 이른바 정성의 요리다. 한 사람을 위해 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서 음식을 만든다. 그러한 정성의 요리가 궁중요리의 특징인 것이다.

그것은 음식에서 사치스러움보다 정성을 추구하고 양생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음식에서도 여러 계통의 재료가 골고루 섞여 음양오행이 조화되도록 배려하는 독특한 음식 철학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런 왕의 몸을 생각하는 식단은 효과가 있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리 효과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7.07세, 비슷한 시기 영국이 51.76세, 프랑스가 48.11세, 그리고 중국이 47.03세이니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건강과 수명을 좌우하는 것은 식사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문제, 과로와 운동의 문제도 크기 때문이다. “성인의 수준에까지 학문과 품행을 수련해야 참다운 왕이 도리 수 있다는 성리학적 군주상을 강요당했으며 신하들과의 권력투쟁으로 좀처럼 마음을 편안히 가질 수 없었던 조선의 군주들은 음식을 잘 먹는 것 말고 달리 양생 수단을 쓸 수도 없었고 적당한 오락으로 심신을 편안히 할 여유도 없이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격구나 사냥 등으로 운동과 오락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나, 중기 이후 성리학적 정치 문화가 고착화됨녀서 왕은 하루 세번이 넘는 경연과 여러 예식 절차 등에 얽매이며 궁궐 안의 포로처럼 고단하고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무예를 익히거나 음주 가무에 빠져든 왕이나 세자들, 즉 연산군, 효종, 사도세자 등은 모두 ‘임금 자격이 없는 자’로 매도되었으며 끝내 마지막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왕의 밥상은 왕 개인의 밥상이 아닌 나라의 주인의 밥상으로서 정치적 의미가 있었고 그 정치적 의미를 살린 밥상이었기에 조선왕조가 5백년이란 장수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왕의 밥상에는 왕 개인의 양생은 물론 왕조의 양생까지 담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진상의 예를 든다. 공납이 대동미로 일원화된 뒤에도 진상은 없어지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끝까지 진상 제도를 버리지 않았던 까닭은 왕이 밥상머리에 앉아 방방곡곡에서 올라온 식재로를 대함으로써 ‘영남이 흉년이라더니 정말이로군’ ‘호남에서 올라온 고초로 담근 장맛이 점점 좋아지는군. 농법을 개량한 모양이야’ 등 구중궁궐에 낮아서 지방의 실태와 백성들의 살림을 살필 수 있었다. 상소문이나 보고서 등 글로만 알기보다 자신의 혀와 코와 목구멍으로 백성들의 참모습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분명 진상은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그런데도 진상 제도를 유지한 참뜻은 왕과 백성의 소통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진상 제도의 철학적 배경은 “천하가 한 사람을 봉양한다 以天下奉一人”이란 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만민의 어버이로서 왕은 만민의 봉양의 받는다는 것이다.

“진상은 세금이 아니라 어버이인 군주의 밥상을 차리기 위해 백성들이 모으는 정성이요.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왕에게 차리는 예의다.”

물론 그 예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어버이도 자식에게 보여야할 예의가 있다. “천인감응론적 이념 말고도 감선은 백선의 어버이인 왕이 자식과 같은 백성들과 함께 굶고 고통을 나누자는 의미가 있었다. 힘이 모자라서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주지는 못하지만 함께 울어주는 정치 그것은 전근대 사회로 통칭되는 19세기 이전 사회에서 달리 찾아보기 어려운 정치였다.”

“밥상머리에 앉아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는 지극히 사적인 시간에조차도 정치를 생각하고 즐거움의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싶고 그들이 느끼는 괴로움의 조금이라도 나눠 갖고 싶어하는 자세, 그것이 어쩌면 많은 어려움과 약점 속에서도 왕주과 500년 동안 ‘장수’할 수 있었던 ‘양생’의 비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공과 사가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 조선의 정치는 그것대로 많은 폐단을 낳았다. 위선, 실용성을 잊은 공론, 도덕주의와 형식주의가 배태되었다.” 저자는 음양오행의 법칙에 따라 양생 위주의 식단을 짜도록 한 것은 태종에서 시작하여 세조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의 경직화와 함께 그러한 식단의 균형도, 양생의 정신이 약화되고 형식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현실정치에서 식단의 양생은 정치는 어떠했는가? 저자는 영조를 조선 왕의 (현실적) 밥상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군주라 말한다.

“영조는 누구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임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유롭게 사는 사람이 몸매나 성인병을 걱정해서 시도하는 자기 관리가 아니라 마치 운동선수의 자기 관리처럼 끊이지 않는 싸움에 대비해서 힘을 비축하고 건강을 잃지 않으려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자기 관리였다.

영조는 신하들의 분쟁을 잠재우고 모두들 자신 앞에 무릎 꿇리기 위해 여러 수단을 쓰는데 그중 하나가 감선이엇다. 보통 오아들의 두 배 이상으로 자주 감선했다. 그런데 영조는 정작 감선의 실효에 대해 별로 믿지 않았다. ‘어찌 감선으로 천재에 응답할 수 있겠는가? 감선이란 단지 하늘을 모독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권력투쟁에서 감선이 갖는 효과를 노렸다. 왕이 반찬 가짓수를 줄이며 반성하고 있는데 감히 신하들이 푸짐한 밥상을 차리거나 음주가무를 즐길 수는 없다. 임금이 반성하는데 신하들도 반성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당론을 제기하며 조정을 시끄럽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한목소리로 “그만 감선을 거두시고 평상시대로 드소서’라는 주청을 드려야 한다.

영조는 심지어 삼선을 넘어 각선, 즉 단식도 십여 차례는 실시했다. 이래도 안되면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양위 선언도 다섯 번 있었다. 그외에도 자잘한 ‘자해 시위’를 벌여 신하들을 난처하게 햇다.

신하들은 영조의 ‘자해 시위’가 끝없이 이어지자 피곤하게 여기면서 어쩔 수 없이 따를 뿐 충심으로 영조를 위하거나 존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주는 사랑받는 자가 되기보다 두려워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란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영조는 속 보이는 감선과 자해로 신하들이 겉으로는 복종하도록 햇다. 속으로는 싫어하더라도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를 정착시켯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자주 자해 시위를 하면서 영조는 어떻게 장수할 수 있었을까? 영조는 감선을 자주 했지만 날짜로는 그리 길게 하지 않았다. 또한 계획적으로 햇다. 감선을 하더라도 사흘간, 열흘간 식으로 기한을 정해 놓고 햇다. 오랜 감선이 건강에 좋지 않은 점은 골고루 먹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진다는 점도 잇지만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가 없어 식사가 즐겁지 않고 사실상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요인에 따라 식사가 정해지므로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조는 날짜를 스스로 통제햇다.

영조는 자신의 밥상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원래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밥을 고봉으로 담아 올리는 관례를 폐하고 적당히 담도록 햇다. 이렇게 되면 평소의 밥상이나 감선한 밥상이나 큰 차이가 없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검약을 실천하는 임금’이라는 인상을 주고 개인 건강 차원에서는 과식을 삼가면서도 치우치지 않는 식사를 추구한 셈이다. 그리고 영조는 식사 시간을 일정하게 햇다. 일을 하다가도 식사 시간은 반드시 지켰다.

그리고 과도한 스트레스는 건강을 해치지만 납득할만한 스트레스는 기력을 돋우고 면역력을 키워준다. 영조는 언제나 신하들과의 싸움에 골몰했으며 날마다 전장에 나가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조회에 나갔다. 스스로 ‘체력을 지켜야 한다. 건강이 무너지면 지고 만다’란 의식이 있었다.

뚜렷한 목적의식, 그에 따른 적당한 스트레스, 적절한 음식 조절이 ‘투사’ 영조를 오해 싸울 수 있게 햇다. 조선의 왕이라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스스로는 보람을 나라와 백성에게는 혜택을 줄 수 잇는지 영조는 모범을 보여주엇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왕의 밥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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