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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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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특별한 이유 없이 못 읽게 되는 책들이 있다. '당신들의 천국'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단지 이 소설이 장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 길이가 만만치는 않지만 박경리의 '토지'나 황석영의 '장길산' 같이 대단한 결심 없이는 못 읽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분량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지 어언 십 년을 넘겨 버렸다. 못 읽고 있었던 이유가 특별한 것이 없으니 읽기 시작한 것 역시 특별한 이유는 없다. 아마도 주인공 신분이 군인이라는 것과 현재 군의관인 내 신분이 약간의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오랫동안 못 읽었던 이 책과의 인연을 연결시켜 준 것 같다.

이 작품의 배경은 문둥이들만이 사는 소록도이다. 소록도에 새로 취임한 병원장 조백헌 대령은 문둥이들을 위해 간척사업을 시작하고 이것이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이 간척사업을 중심으로 조백헌과 섬의 장로들, 섬사람들과 육지사람들, 병원 내부의 인물들이 서로 대립한다. 간척사업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의 여부는 이 소설의 주제와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간척사업을 두고 벌어지는 인물들의 동상이몽과 간척사업을 통해 드러나는 개인적, 집단적 욕망이 빚어내는 갈등과 그 해결이 소설을 이해하는 큰 줄기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모든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환자와 건강인의 결혼을 통해 화해의 가능성만을 약간 보여줄 뿐이다.

초판의 서문을 보니 이 책이 나온 지도 거의 삼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삼 십 년이면 강산이 세 번 정도 바뀌는 꽤 긴 세월이다. 난 이 소설에 대해 몇 가지 불만이 있다. 행동은 없고 고민만 많은 햄릿형의 인물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고, 인물들의 대화 속에 나타나는 끊임없는 동어반복도 영 마음에 걸린다. 이 소설에 대한 이러저러한 불만으로부터 얻은 결론은 한 소설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변치 않는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소설에도 유통기간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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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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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이 책을 읽어 볼 생각을 했는 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날 문득. 글쎄, 그 날이 언제였더라, 여느 날들과 똑같은 평범한 날이었거나, 훈련소에 가기 전 머리를 깎고 온 나를 보며 아내가 울먹거리던 날이었거나, 또는 훈련소에 입소하기 전날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상상과 관계없이 소설 첫머리에 인용된 브레히트의 시(詩)처럼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었을 뿐인 지도 모른다. 기대하지 않은 날, 거기 있었던 장미처럼, 오래된 정원은 이미 거기, 책장 구석에 브레히트의 장미처럼 피어 있었을 것이다.

'오래된 정원'이란 책제목 속의 '오래된'이란 수식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중 하나는 본래의 뜻인 시간적인 의미의 '낡음'이다. 반세기 동안 지속된 분단의 역사와 군사독재의 어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또는 민주와 반민주. 이런 가치의 잣대들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아니, 아직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 이를 지도 모르고 지나친 속단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회주의 국가들은 사라졌고, 민주를 외치는 목소리는 예전과 같이 가슴을 진하게 울리지 않는다. 흘러간 유행가처럼, 철지난 과일처럼 이 모든 것들은 시들시들해졌다. 작가가 글머리에서 밝힌 것처럼 이십세기가 끝나는 무렵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오래된 이분법의 이데올로기도, 그 이분법이 지배하던 세계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비록 한반도에서는 앞의 모든 것들이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낡은 가치와 낡은 세계는 대부분의 현실의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낡은 것이 지나간 캄캄한 자리에는 새 것이 찬란하게 찾아오는 법이라고 작가는 조용하게 얘기한다, 들릴 듯 말 듯, 차분한 목소리로. 윤희가 말한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 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것은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오래된'의 두 번째 의미는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숨겨짐' 또는 '소중함'이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오래된'의 두 번째 의미 속에 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비록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역사는 자본주의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계절의 변화처럼 역사가 갖고 있는 필연적인 절차일 뿐이고 하나의 전환점일 뿐이다. 그리고 '오래된 정원'은 베를린 장벽과 함께 무너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진 벽의 틈 안에서 빛나고 있다.
윤희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다시 속삭인다.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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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우스 - 범우희곡선 6 범우희곡선 6
피터 셰퍼 지음, 신정옥 옮김 / 범우사 / 199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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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사람들은 누구나 성장이라는 홍역을 치룬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가정과 사회가 요구하는 정신적, 육체적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신화를 거세당하게 된다. 신화는 사라지고 일상만 남는 것이다. 글머리치고는 좀 거창했지만 피터 셰퍼가 '에쿠우스'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신화가 거세된 일상이다.

연극이 생소한 일반인은 익숙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연극에 관심이 있었거나 젊은 날 연극을 만들어 보았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작품이다. 그냥 '에쿠우스'라고 하지 않고 실험 극단의 간판 연극 (연우무대의 '한씨연대기'나 산울림 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에쿠우스'라고 하면 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이것으로 부족하다면 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자.

작품 속의 주인공 '알런'을 맡았던 배우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이 좀 더 접근하기 쉬울 지도 모르겠다. '쉬리', '취화선'으로 영화판의 흥행보증 수표로 떠오른 최민식과 영화 '나쁜 남자'와 드라마 '피아노'로 한층 주가를 올리고 있는 조재현이 이미 오래 전에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인 '알랭' 역으로 연기를 인정받았다고 해도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한 걸까. 그래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이 작품을 읽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혹 약간의 관심이라도 생긴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말의 눈을 찌른 소년 알런과 그의 정신분석과 치료를 의뢰 받은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스릴러와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공식 같은 이야기 전개를 상상할 지도 모른다. 굳이 예를 들자면, 다이사트는 알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말들의 죽음과 관련된 거대한 음모를 밝혀낸다 또는 다이사트는 알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지만 사실은 알랭이 모두 저지른 것임이 맨 마지막에 드러난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예상했던 기막힌 반전도 추리를 하는 정신과 의사도 없다.

이 작품의 큰 줄기는 의사인 다이사트가 환자 알런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반복적인 꿈을 통해 다이사트는 자신의 일이 인간이 갖고 있는 신성함에 대한 욕망을 거세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신화의 거세를 거부한 알런을 과연 치료해야 하는 것인가이다. 물론 작가의 편에서 답을 말한다면 '아니오' 이다. 쓰다보니 '에쿠우스'가 굉장히 어려운 작품인 것처럼 되어 버렸지만 막상 읽으면 전혀 어렵지 않다. 모호한 주제를 재미있게 바꿔 놓는 피터 셰퍼의 탁월한 재능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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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우스 - 범우희곡선 10 범우희곡선 10
피터 셰퍼 지음, 신정옥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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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셰퍼의 영원한 주제인 천재(혹은 초인)와 범인의 대결구도가 절정을 이룬 장막극. '요나답'의 유다와 예수. '에쿠우스'의 다이사트와 알랭.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이들은 이름과 시대를 달리 하지만 피터 셰퍼의 작품 속에서는 결국은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인물들이다. 한국에서는 연극으로 처음 소개된 것이 아니라 영화로 소개되었다. 톰 헐스가 모차르트를 맡았고 네빌 마리너의 지휘로 영화음악의 대부분이 연주되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알려져 있는 반면 이 영화의 원작이 희곡이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희곡이라면 덮어놓고 지겨울 것이라는 사람들을 위해 한마디 보탠다면 '아마데우스'는 다른 희곡들과는 달리 읽어서 재미있는 몇 안 되는 희곡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만을 놓고 보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로는 봤지만 희곡을 읽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고전 희곡은 희곡이라는 형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굉장히 길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좀 보태면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데 책 한 바닥이 온전히 소요되는데 누가 그걸 재미있다고 읽겠는가.

예전에 BBC에서 제작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적이 있는데 무려 5시간 정도가 걸렸다. 아마 그 시대의 사람들은 굉장히 인내심이 강했었나 보다. 하지만 피터 셰퍼가 쓴 연극 대본들은 그렇지 않다. 마치 영화를 만들 것을 예상하고 쓴 대본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매끄럽다. 물론 소설처럼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일단 집중해서 읽기 시작하면 어지간한 소설을 읽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 '아마데우스'는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그의 재능이 가장 빛나는 작품이다. 희곡을 읽는 동안 이야기의 흐름뿐만 아니라 음악과 무대장치를 상상해가며 읽으면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다. 하나 더 추가하면 지문에 쓰인 웅장한 모차르트의 음악들과 화려한 조명들이 빛나는 것을 상상하는 것 역시 이 작품을 재미있게 읽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피터 셰퍼가 대단한 작가라는 것과 함께 그가 쓴 작품마다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셰익스피어나 아서 밀러와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다루는 주제의 무게와 전달방식이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이 작품의 아쉬운 점이라면 아쉬운 점이다. 사실 이것은 개인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말이 나왔으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가 설정한 주제의 알맹이는 단순한데 포장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아마데우스'만 하더라도 그렇다. 피터 셰퍼는 자신이 얘기하려는 것을 신(神)과 클래식 음악으로 우아하게 포장했지만 결국 알맹이는 '질투심'이다. 잘 난 사람을 질투하는 것. 이것은 범인(凡人)들의 인지상정이다. 근데 이걸 얘기하는데 신에 대한 도전이니, 복수니 하는 거창한 주석을 달아야 하는 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작가에 대한 일종의 '질투'일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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