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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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 한홍구, 홍세화의 이름만 보고 샀던 '21세기를 바꾸는 교양'이란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 자체의 내용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지만 나오는 내용들이 대부분 저자의 다른 저서(하필이면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릿속에 많이 남아있던 탓에)에서 다뤘던 내용들이라 뭐랄까. 김빠진 맥주같이, 불꽃이 팍팍 튀는 찌릿함이 없어 술술 넘겼더랬다. 그 기억때문인지 여러 저자를 인터뷰한 책은 잘 읽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이 별게 없다기 보다는 나 스스로가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었다는것이 더 정확한 이유일 거다. 신문이나 주간지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보였으니까) 최근엔 주간지도 거의 안읽고 신문도 대충 읽어 넘기는지라 무언가 자극이 필요했다. 현 사태에 대한 새롭고 날카로운 시각이 주는 찌릿함. 하여 역시 '박노자, 홍세화, 한홍구, 진중권'의 이름만 보고 덥석 집어든 책이다.

오호, 솔직히 말하면 난 '전문 인터뷰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내가 접하는 인터뷰라고 해봤자 신문이나 주간지에서 나오는 짧고 형식적인 인터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기자의 질문에 청산유수로 대답하는 인터뷰 기사를 볼 때면 '예상되는 질문에 적절한 준비를 했구나'라고, 대답준비의 수고로움을 생각했을 뿐. 그런데 이 책은 거짓말 조금 더 보태면 'interviewee'보다 'interviewer'가 더 많이 준비한 것 같다. 대부분의 질문이 어떤 구체적 현안과 관련해서 했던 말이나 저서의 특정 부분에 관한 구체적인 것들이라 대답 역시 지극히 구체적이다. 멜기세덱님의 리뷰를 보니 'inter-view' 즉 '서로-보기'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확한 지적이다. 일방적 묻고 답함이 아닌, 현안에 대한 의견교류 혹은 주고받음. 비약하면 '말하기 위해 듣는'게 아니라 '듣기 위해 말하는 것'같은 느낌. 하긴 한번 실리고 마는 기사가 아니라 책으로 엮을 것이기에 당연히 많은 준비가 뒤따랐을거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읽는 내내 책 표지를 가득 채운 7개의 이름 가운데 '지승호'라는 이름을 끼워넣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오버하는건가?

7토막의 인터뷰는 각기 색깔을 갖지만, 전체적으로 '대한민국의 현재'를 그린다. (2006년 초반에 한 인터뷰가 현재와 견주어 전혀 '시대감각이 떨어지지 않는'것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 오히려 악화된 - 현실을 반영하는 걸까) 특히 인상깊은 건 진중권씨 인터뷰. '디 워 논쟁' 한참 전에 한 인터뷰지만, 마치 '디 워'에서의 시니컬함을 예고하는 듯 하다. 하긴 진중권씨도 많이 지쳤겠지. 이젠 미학에 치중하겠다는 '선언'이 아쉽기도 하고. 어쨌거나 조롱하는 듯한 오만함 - 누군가는 80년대 운동권식 글쓰기/말하기의 특징이라던데, 레닌 어법이었나? 모르겠다 -_-;; - 이 기분나쁘지 않은 건 지승호씨 말을 빌리면 '일관성과 실력'탓일게다. '써봐야 별로 알아듣지도 않고, 심각하기 듣는 사람도 없는 대중매체 글쓰기를 접고 학술적 이야기에 매진할까'한다는 박노자씨의 말에서도 일정한 '체념'이 느껴진다. 반면 심상정, 김규항, 손석춘 씨 인터뷰에선 - 현재 무언가 하고있는 지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 새로운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희망이 두드러진다. '한겨레'에 대한 비판은 좋지만, 비판이 더 잘하라는 '격려'가 되게끔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홍세화씨 역시. 이런저런 관점을 두루 둘러보고 드는 느낌은 딱 '불편함'이다. 글은 '불편해야 한다'는 박노자씨의 의도가 적중한건지. 잊고 있었던, 혹은 보고싶지 않았던 얼룩들을 정면으로 마주친 당황스러움 이랄까. 빠져들 듯 휘리릭 읽어내렸지만. 무언가가 덜커덕 걸리는 느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자괴감일까.

  거의 사람마다 다른 질문들을 던지지만, 공통으로 던지는 질문 중 하나가 (이제는 사그라 든 '황빠', '박빠', '노빠'와 더불어) FTA다. 인터뷰 시점만 해도 한미 FTA는, 당연히 막아내야 하고-막아낼 수 있는 '허위'였지만, 그것이 '실체'로 다가올수록 점점 더 허상만 보이는 듯 하다. 요즘은 대선관련 기사때문에 크게 공론화되지도 못하는 듯 하고. FTA 반대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또 내세우는 논리가 전부 비약된 것도 아닌데 왜 달라지는게 없는건지. 절반이 넘는 국민들은 FTA에 찬성하지만, 또 절반이 넘는 국민들은 FTA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말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한 선생님이 농담처럼  두 가지 해석 -  “미국의 국익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찬성한다.”면 "자신을 미국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니 정신분열증(통합실조증)이거나 적어도 이인성 해리장애로, “미국의 국익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찬성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의존장애형 우울증이거나 수치심(자기모멸)형 우울증이다. - 을 내렸다. 웃어넘기기엔, 너무도 현실적인 문제인데. 일정한 군사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파시즘을 넘어 이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자본파시즘'의 위력이 이런것일까. 손석춘씨 말처럼 '언론개혁'도 필요하고, 아예 초중고등학교 교육제도부터 싹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비현실적 소망'이 든다. (어느 중학교 교과서에는 '흑인'을 '니그로'라고 한다는 '용어설명'이 버젓이 실려있던데...길은 멀고도 멀다) 

 하여간, 해결책은 '불편함'에서 그치지 않고 무언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어서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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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
리처드 G.윌킨스 지음, 정연복 옮김 / 당대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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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 - 처음 책 제목을 보고 "죽이는가"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능동성'과 '잔인함'에 이끌렸었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보다 병이 많거나 건강하지 못하다는 정도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인데 "건강하지 못함"정도가 아니라 "죽음"이라니! 물론 직접 '죽이는' 말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왜 '죽다'라는 단어를 쓴건지 내내 궁금했었다. 사실 '건강하다'는 상태는 상당히 주관적 측면이 강하다. 실제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현대의학적 측면에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본인은 몸이 안좋다고 생각하지만 의학적 검사상으론 '정상'으로 나올수도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헌장에는 “건강이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 측면까지 포괄하기에 특정 기준으로 수치화하기 어렵다. 이 책은 그런 난점을 피해가기 위해 평균 기대수명 및 사망율을 근거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 개인적으로는 '오래사는 것'보다 '짧게 살아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건강한 삶'이라고 믿기 때문에 '수명'을 중심으로 건강을 논의하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여태 읽어왔던 의료행위의 공공성이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책들은 대개 윤리적 측면에서 '당위성'을 근거로 독자를 설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은 그런 윤리적 당위성보다는 '통계자료'를 통해 설득하고자 한다. - 솔직히 말하면 통계 혹은 그래프 해석능력이 떨어지는 나는 책에 등장하는 많은 그래프들이 조금 짜증스럽기도했다 - 책의 주요 논지는 개인의 기대수명은 사회의 절대적 풍요로움보다는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상태를 벗어난 선진국에선) 소득격차로 인한 상대적 빈곤/풍요에 더 영향받기에 소득격차가 적고 최빈곤층의 삶이 어느정도 안정된 사회일수록 더 '건강(오래 삶)'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소위 말하는 "분배중심"적 성격이 짙은데, 저자는 분배가 잘 된 나라일수록, 혹은 사회적 불평등의 정도가 적을수록 성장이 더욱 촉진된다는 것을 (역시 통계자료를 통해)보여주며 사회적 자본을 구축하는것이 결과적으로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문구 하나. "부자는, 자기 동서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이다" 각종 재테크 서적이 쏟아져나오고 너나할것없이 주식에 뛰어들 정도로 "돈 벌기"가 중요해진 요즘, 사람들은 왜 돈을 벌려고 할까. 정말 "생계를 위한 돈"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다른사람들만큼 벌기 위해' 혹은 '다른사람보다 조금 더 벌기 위해'서이다. 하긴 계속 집값은 오르고 고정 수입은 늘지않는데 가끔 주식해서 '떼돈'을 벌었다는 사람이나 부동산 재테크로 앉은자리에서 몇억씩 벌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배아플만 하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 교육비도 만만치않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그리 잘 사는 집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종합학원이나 다른과목 개인지도를 병행해서, 평균 1인당 월 100만원 이상씩 든다.) 남들 다 하는거 돈 때문에 못한다면, 혹은 돈이 없어서 더 큰돈을 벌 기회를 놓친다면 그 자체로 상당한 스트레스다. 저자는 '금전적 스트레스'를 주로 하위소득그룹에 한정짓지만 생각해보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돈'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다. 만성스트레스로 인해 생기는 온갖 질병들....굳이 신경-내분비-면역 체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건강하지 못한 삶과 연결된다는 건 자명한 이치다.

아쉬운것은, 소득격차가 큰 나라일수록 사망률이 높고 기대수명이 낮다는, 즉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여러 자료를 활용하여 잘 보여주지만 정작 대안은 어물어물 피상적 제시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간의 신뢰를 높이고 소득격차를 줄여 사회응집력을 키우자는 논조인데 구체적인 방안은 없다. 처음부터 객관적 자료 중심으로 주장을 펴 나가기에 윤리적 당위성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사회문제에 대한 공정한 분석도 중요하지만, 정작 대안이 없다면 무엇을 위한 분석이란 말인가.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 읽었던 "서로주체성의 이념"이 너무 강하게 각인된 탓인지, 책을 읽으며 내내 근본적인 대안은 '서로주체성의 확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구성원간의 신뢰' 혹은 '사회응집력'이라는 건, 통계자료를 통한 논리적 설득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치관부터 바꾸어야 하는건 아닌지. 그런면에선 차라리 개인의 도덕심에 호소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차피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이성적 설득보다는 감성적 충격으로 인한 경우가 더 많으므로.)

'의료의 공공성'보다는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성격이 강하다. '의료'분야에 국한시킨다면,  한울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의 의료"가 더 나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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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9-13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관련 분야의 이야기라 그런지 글에서 불꽃이 튀네요.. 추천 2개를 해드리고 싶은 글입니다^^ V

Jade 2007-09-14 01:13   좋아요 0 | URL
앗 이런 ^^;; 고마워요 승주나무님 ^^

2007-09-17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7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학벌사회 -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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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2004년에 한의대에 입학한 - 지금은 다행히(!) 한의대 커트라인이 많이 낮아지는 추세지만 04년만해도 상당수가 '서울공대 가느니 지방의대/한의대를 가겠다'는 분위기였다. - 한의대생이다. 고3때 다니던 학원 같은반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대/연세대/고려대를 갔고 현재 내가 다니는 학교엔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다시 수능봐서 입학하신 분들이 많다. 사회경험이 없는 나는 서울대 출신, 혹은 명문대 출신이 누리는 사회적 특권을 몸소 경험해보지 못했고, 사회가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탓인지 명문대 친구들은 암울한 공대생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고  명문대 출신 동기분들은 하던 일이 맘에 안들어서, 혹은 돈을 더 벌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한의대에 들어왔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다. 즉, 내 주변의 '명문대 출신'들은 별로 '특권'을 누리는 것 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여 이 책에서 알게된 '서울대 출신'의 특권은 - 따지고 보면 나와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 처음엔 그리 와닿지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몰랐던'게 아니라 '모르고 싶었던'것일 게다. 애초에 한의대 아니면 안가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서울대'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고 - 학교 선생님은 '서울대 합격자'가 되길 바랬지만 - 원서도 넣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서울대'에 한의대가 없었기 때문이지 내가 '특정 학벌'이 되길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의 나는, 근소한 점수차로 한의대를 대표하는 "K"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리라는것에 세상이 끝난것처럼 슬퍼하던, 소위 "주류 한의학계"에 들어가길 소망하던, "K"대학에 합격한 아이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끼던, 그런 아이였다. 당시 서울대에 합격한 내 친구들은 - 적어도 나의 주관적인 판단에서는 - 흔히 포장되는 것처럼 "똑똑하고 우수한" 아이들이 아니라 단지 연/고대 혹은 다른 학교에 입학한 친구들보다 수능에서 몇 점 더 받은 "운 좋은"경우에 속했고 솔직히 말하건데 지적/창의적 능력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해가 지나면서 연/고대 혹은 다른 대학 친구들은 (분명 '명문대학'임에도!) 왠지 모르게 의기소침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몇몇 아이들은 다시 수능보겠다며 잠적하기도 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의대에 합격한 친구들 중에도 "명문 의대"에 가겠다며 몇몇 그런 경우가 있었다. '대학 서열'이 미치는 영향력을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적극 말리지 않았다. 그저 친구가 잘 되길 응원해주는 정도. 학교가 어디든 자기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말해주기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지레 겁을 먹었던 건지도.

저자가 말하듯, 서울대생들이 연/고대 생들보다 두세배로  뛰어나다면, 혹은 명문대생들이 보통 대학생보다 지적 능력이 현저하게 뛰어나다면 그만한 보상을 받는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분명 상위권 대학으로 갈수록, 특히 서울대에는 '우수하고 뛰어난' 학생들 비율이 높은건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어느대학'출신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특권을 받는 경우가 훨씬 많다. 문제는 그 특권 때문에 누군가는 피해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단지 특정대학이 아니란 이유로. 부당한 특권을 누리기 위해, 혹은 부당한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모두들 특정대학으로 몰리고, 소수의 선택받은 학생이 되기 위해 지금의 치열한 '입시전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타율적 노예'를 양성하는 현 교육체제, 더 나아가 사회체제를 바꾸기 위해선 서울대를 (자체 신입생을 받지 않고) 다른 국/공립대에 개방하여'서울대 학벌'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체다. 독일식이라는 대학통합방안은 개인적으로 생소한지라 선뜻 동의할 순 없지만 책에서 제시하는 학벌의 사회적 역기능 - 불공정한 권력독점, 노예화 교육 등 - 은 대체로 수긍이 간다. 책을 보며 분노하는 나를 보고 어느 서울대 졸업생은 '정말 분노해야 한다'며 분노를 격려할 정도였으니! 서울대 졸업생들 중에도 서울대를 다른 국/공립대에 개방/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사실 나도 "한의대생"이라는 특권으로 고수입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분노'만 할 입장은 아니라는 것. (하긴, '서울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약간의 차별(!)을 받긴 한다. 그래도 뭐. 이것도 특권인건 맞다.) 둘째. 과외하면서 점점 느끼는 거지만, 아이들이 점점  의문을 가질 줄 모른다. 대부분을 암기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공부의 방법을 모른다거나. 그런데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자기 관리도 잘 안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혹은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건, 일대일 지도로도 쉽지 않은,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이런것들을 공교육에서 담당하려면 정말 많은 개혁이 필요할텐데.

여담으로, 저자의 책 중 내가 읽은 것은 이것 포함 세 권이다 - 도덕 교육의 파시즘, 서로주체성의 이념 - 세 권이 모두 주제가 다르지만 모두를 꿰뚫는 화두는 '서로주체성'이다. 타인과 더불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화두다. 이 책을 읽는 다면 그 두 권을 꼭 같이 읽어보길 권한다.

아무래도 난, '김상봉'이라는 사람에게 반해버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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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거 벌써 다 읽었어? :) 빠르네. 이제 김상봉 씨 책은 더 이상 추천할게 없네. 내가 더 이상 읽은게 없으니까. 이것도 읽다 만거 추천한건데. 다른 저자들에게도 관심을 나눠줘. :)

Jade 2007-09-10 11:25   좋아요 0 | URL
ㅎㅎ 주말에 할일이 없어 내리 읽었어요 ^^ 근데 김상봉씨 책을 읽으려면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밑바탕에 깔고 읽어야 할듯...^^

시비돌이 2007-09-27 06:4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다른 저자들에게도 관심을 나눠주세염. ㅋㅋ

Jade 2007-09-29 03:09   좋아요 0 | URL
어머 시비돌이님 "하나의 대한민국 두개의 현실" 리스트에 있는데 넘 기대되요~ 박노자, 진중권, 홍세화 등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루룩이라 - 9월 지출이 커서 10월 첫 수입이 들어오길 고대하고 있답니다. ^^

비로그인 2007-09-1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이드님도 나만큼이나 속독인가보다~ ㅎㅎ
근데 난 어려운 책은 빨리 못읽는다는 거 ~

Jade 2007-09-10 11:2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는 속도는 빠른 편이예요..저도 어려운 책은 끙끙대다 덮어두는 경우가 많은데....^^

cplesas 2007-09-2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김상봉이란 이름을 쫓다가 이까지 왔네요. 여러 가지 페이퍼 잘 보고 갑니다-

Jade 2007-09-26 21:3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소나무 2020-05-3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년이 지난 오늘 글을 봤습니다. 전문서평가는 아니지만 글을 쓰는 직업을 둔 사람으로서 좋은 글에 감명 받고 갑니다.
 
서로주체성의 이념 - 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 인문정신의 탐구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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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고 하면 왠지 현실세계와는 동떨어진, 어떤 현학적 학문일거라는 편견이 있다. 사실 살아가며 던지는 모든 의문들의 바탕이 되는것이 철학이지만, 소위 5지선다형의 '수능형'에 길들여진 사고방식 때문에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 보는것이 낯설기도 하거니와 삶이 힘들다는 이유로 고매한 '진리'보다는 현실에서 통용되는 보다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지식'이 더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 역시 철학에는 거의 문외한이고 확실히 이 책은 나 같은 '교양이 부족한'사람이 읽기에 어려운 책인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끙끙거리며 읽고 난 지금은 오히려 '교양서적'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대체 왜?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1부에선 - 저자가 '홀로주체성'이라 부르는 - '나르시시즘'에 근원을 둔 서양철학사에 대해 살피고 2부에선 - 끊임없는 수난과 지배를 겪어 온 우리 민족의 특수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 저자가 정립하고자 하는 우리 스스로의 철학, '서로주체성'의 이념에 대해 말한다. 고백하자면 1부를 읽다 - 아는것이 별로 없는 통에 - 제 풀에 지쳐 몇달동안을 그대로 덮어두고 있다 며칠전에야 다시 읽기 시작했다. 2부는 결코 쉽진 않지만 1부에 비해서는 훨씬 수월하게 읽힌다. 친숙한 시 - 이상, 윤동주, 김춘수 등의 잘 알려진 시 - 와 익숙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설명하기 때문에 기본적 이해도가 높아지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곳곳에 드러나는 저자의 통찰력때문에 새로운 시각을 만나는 '희열'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철학사에 익숙치 않은 독자라면 2부를 먼저 읽을것을 권한다.

감히 이 책에 대해 나름의 평가를 내린다면, 나는 '보는것'에서 '듣는것'으로의 전환이 이 책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보는 것'이 주체가 어떤 수동적 '대상'을 '관찰'하는 일방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듣는 것' 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는 '상호성'을 내포한다. 화자와 청자는 각자 자신의 행위를 위해 반드시 상대방의 존재를 전제로 하지만 그것은 어떤 의존이나 종속이 아닌 '만남'이다. 저자가 말하는 '서로주체성'이란  '나와 너의 인격적 만남'으로 일어나는 '관계'다.

좋은 책은, 읽는 독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의학을 공부하는 내게 '보는 것'과 '듣는 것'의 문제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의학에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서 부터 과연 질병을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지 - '구조적 변화를 수반하는 조직의 이상상태'에서부터 구조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기능 이상' 까지 - 에 대한 논란과 더불어 의학이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질병'을 치료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질병이 어떤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보는 것'에 익숙해진 필연적 결과다. 질병의 진단 과정에서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은 주관적이고 신체적으로 드러나는 '징후'들은 객관적 근거가 된다. 소위 말하는 "3분진료"는 환자가 '대상'이 되는 극단적 사례다. 한의학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한눈에 "척 보고"아는, 혹은 맥만 잡고 척 알아내는 의사가 명의로 대접받고 환자에게 꼬치꼬치 묻는 의사는 "B급 의사"가 되어버린다. (물론, 오랜 경험에 의한 노하우에서 척 보고 알 수 있는 '진짜'명의들도 많지만, 많은 경우에 '척 보고 아는' 진단방식은 의사의 카리스마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최근 한국여성들은  정신과적 상담의 필요성이 있을 때 의사를 찾지 않고 점집으로 간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이런 글을 쓰셨다.

‘무당’은 말을 “들어주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거니와 정신과 상담 치료 받으러 갈 때 정신과 의사가 말을 “들어주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나 하고 기대하지만 나올 때는 역시나 취조 당한 기분이 됩니다. 의사는 전문 지식으로 분석하고 진단해서 해답을 제시하는 존재라고 자리 매겨졌기 때문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의사와 환자의 만남은 대등한 상호 주체로서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 관계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체는 객체를 제압합니다. 객체는 ‘사물’이기 때문이지요. 대상적 사물은 주체의 시선에 장악되게 마련입니다. 이 관계는 자기 완결적인 홀로 주체성-철학자 김상봉의 어법-에 길들여진 서구 모형입니다.

자신을 세상 중심에 놓고 자기 동일성으로 대상을 제압해 나아가는 나르시시즘의 그림자가 정신의학이나 상담학이라고 해서 비껴갔겠습니까? 세상의 중심에 선 존재가 자신 이외의 존재에게 자신을 “버리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질 리 만무하지요. 그래서 이 땅의 아낙네들은 말을 “들어주는” 존재로서 ‘무당’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의 소지 하나를 없애고 가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무당’은 샤머니즘적 영매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전통문화 속에서 기층민의 상담자 노릇을 수행해 왔던 사회 기능적 존재로서 ‘무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에는 이미 이런 저런 부정적 의미 군이 형성되어 있지만 일단 이렇게 조정해서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담자로서 ‘무당’은 어떻게 해서 말을 “들어주는” 존재일 수 있었을까요? 연유는 간단명료합니다. 그들이 버려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하염없이 가장자리로 밀려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장자리에 선 자에게 은총으로 주어지는 인식론적 특권이 바로 맞은 편 가장자리를 제대로 통찰하는 것입니다.

맞은 편 가장자리에 대한 통찰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맞은 편 가장자리에 선 존재에게 귀를 열어 “듣는” 데서 옵니다. 뜻밖의 낯선 존재-자신을 버리게 하는 존재와 단도직입으로 만나 그의 말을 “듣는” 데서 참된 의미의 융합이 일어납니다. 서로의 삶에 깃들어 갑니다. 주체로서 치료자와 객체로서 환자의 수직적 구분이 무너집니다.

이렇게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이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과 마주하는 곳이 점집입니다. 자기 상실의 아픔이 공유되는 시공간에서 “속이 다 후련한” 소통이 일어기 때문에 이른바 전문가가 보기에는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님에도 ‘무당’과 상담하는 일은 현대의학의 거대 헤게모니를 밀치고 서울 한 복판에서도 당당히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는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이 마주하는 가장자리에서 핀 상처의 꽃입니다. 두 세력은 끊임없이 우리를 침탈했습니다. 중국, 일본, 미국에 차례로 자기 정체성을 내맡기며 우리는 피와 눈물로 생명을 지켜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가장자리 삶에서 형성된 마음이고 아픔이기 때문에 우리는 저 중심세계와 다른 상담 문화를 빚어내야 합니다.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점집으로 가는 아낙네의 발길을 막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한사코 그리로 끌리는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으려면 이른바 전문가 집단 자체가 교만한 ‘중심’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밀려나고 버려진 사람의 슬픔을, 밀어내고 버린 사람의 세계 인식이 구성한 전문지식으로 달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의자(醫者)가 ‘무당’이어야 한다는 우리 생각은 바로 이런 깨달음에 닻을 내린 것입니다. 의자가 겸허히 자기의 중심을 버리고 가장자리로 나서서 그 또한 가장자리로 밀려나 고통스러운 사람과 만나야 진정한 소통이 일어납니다. 환자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 합니다. 그 말을 온 영혼으로 “들어야” 의자(醫者)입니다. 그가 바로 참 ‘무당’입니다.

환자가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설 때 ‘의사한테 뭔가 해답을 얻어 빨리 병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중 일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헤아려 주는 사람과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먼저입니다. 자신의 말을 들을 귀를 가진 이를 찾으려는 안타까움이 먼저입니다. 말할 입 잠시 닫으면 이내 침묵보다 위대한 상담이 없다는 사실을 깨치게 됩니다.

가장자리 삶에서 빚어진 “들음” 무의식은 우리의 오랜 숙명입니다. 서로의 아픔을 엮어 소통의 지평선을 넓혀가는 일은 본디 우리 삶 자체였습니다. 이런 기층 정서를 단도직입으로 만날 수 있는 옛 가요 하나를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참으로 평범한, 아니 범속한 노랫말 속에 “들음” 무의식이 함초롬히 꽃피어 있습니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방랑의 길은 먼데
충청도 아줌마가 한사코 길을 막네.
주안상 하나 놓고 마주앉은 사람아.
술이나 따르면서, 따르면서 네 설움 내 설움을 엮어나 보자.

서울이고 부산이고 갈 곳은 있지만은
투술한 사투리가 너무도 정답고나.
눈물을 흘리면서 밤을 새운 사람아.
과거를 털어놓고, 털어놓고 새로운 아침 길을 걸어가 보자.

오기택의 <충청도 아줌마>

(http://www.esparoma.com/space/space01.htm)

 

솔직히 이 책에서 말하는 '서로주체성'을 내가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만남의 내면적 깊이는 타자를 위한 자기상실 - 나 자신에 대한 집착, 스스로에게 부여한 타당성의 유보 - 의 깊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삶을 대하는 따뜻함이 묻어나와 오래도록 책을 붙잡고 있었다. '인격의 온전한 만남'으로 형성되는 주체성에서, 인간 혹은 생명에 대한 경건함을 느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끙끙거리며 힘들게 읽었지만 누구에게 좋을지 알 수 없는 FTA를 위해 "뼈 쇠고기"까지 수입해야 하는 반 식민지 대한민국의 현재에서 '노예근성의 비판'에 그치지 않고 '주체적 대안'까지 제시하는 고마운 책을 만난 기분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을 필두로 '서로주체성'이 앞으로 한국인들의 화두가 되길, 하여 현 상황의 문제점을 풀어나갈 수많은 연구와 방법론들이 쏟아져 나오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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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8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9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김선우 지음 / 새움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김선우의 글은, 한입 베어물면 달큰한 물이 줄줄 흐를것 같은, 팔딱팔딱 뛰는, 싱싱하고 탱탱한, "생명"이 느껴진다. (아직도) 차마 놓아주지 못하는 사랑 때문에 그녀를 알게되었고, 그녀의 글에서 참 많은 위로를 받았었다. 그녀의 산문집과 시집은, 때로는 정처없이 떠난 여행길의 동반자가 되기도 하고, 가끔은 멍하니 앉아 울고있는 나를 다독여주는 친구가 되기도 했다. 때문에 나는, '김선우'란 이름에서 이유없는 정감과 사랑을 느끼곤 한다.

노오란 책표지가, 그 흔한 비닐코팅도 되어있지 않은 종이질감의 투박함이, 불현듯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렇게나 가방에 넣어다니는 통에 어느새 군데군데 얼룩이 져버린것이, 은연중에 상처받기 쉬운 시인의 감수성을 나타내는것 같아서. 혹은 순간순간 이는 마음의 결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나를 보는것 같아서. 이 책은 상당부분이 주간지 등에 연재했던 칼럼들을 묶어놓은 것이라 곳곳에 시인의 "분노"가 많이 보인다. 천상 시인의 글인지라 분노가 촉발되는 계기나 그것을 풀어놓는 방식 역시 너무나 '싱싱'하고 '천연색'이라 오히려 마음에 날카롭게 꽂히는 구절이 많다. 엄청난 수재민을 남긴 태풍 루사의 흔적에서 어머니 대지에게 기도드리는 글, 2006 월드컵 첫 승리를 안겨준 토고를 보며 제국주의의 흔적을 발견하는 슬픔.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해괴한 신조어를 만들어낸 현 정부에 대한 호소 등. "아름다움을 이해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정치가 인민을 구원한 적은 없다"는 구절에, - 그녀의 어느 산문집에 수록되었던 -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미학적으로도 옳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책의 제목은, 그녀의 첫 시집에 수록된, 같은 이름의 시에서 따 온것이라 한다.

 

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이 집 한채는

쥐들의 밥그릇

바퀴벌레들의 밥그릇

이 방을 관 삼아 누운

오래 전 죽은자의 밥그릇

추억의, 욕창을 앓는 세월의 밥그릇

맵고 짠 눈물 찐득찐득 흘러대던

병든 복숭아나무의 밥그릇

멍든 구름의 밥그릇 

상처들의,

이 집 한 그릇

밥그릇 텅텅 비면 배고플까봐

그대와 나 밥그릇 속에 눕네

그대에게서 아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눈물 많은 밥냄새 나네.

 

첫장은, '인디고 서원'이라는, 참고서가 없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부산의 한 공간에서 시인과 아이들 및 몇몇 어른들의 대화다. 소위 입시에 찌달리는 대다수의 아이들과 달리 자신의 '진정한' 꿈에 대해  말하고, 루시드 폴의 노래 -'물이 되는 꿈' 를 같이 읇조리고, 시와 문학에 대해 자유롭게 나누는 이야기들이, 참 아름다우면서도 안타깝다. 두번째 장은 칼럼등을 모은것이고 세번째 장은 문학잡지에 기고했던 글인데 '비평 역할을 하지 못하는 비평'에 대한 '비평'이라 문외한인 내게는 생소했다.

벌써 9월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덜컥 결정한 휴학에 한껏 웅크렸던 마음이, 김선우의 글을 읽으며 슬슬 풀어진 듯 하다. 시인은 말한다.

"저는 시인은 일상에서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시인의 몫인 거 같아요. 일상생활이란 게 일상의 면면이 모두 소중한 거면서도, 또 일상의 속도에 매몰되기가 쉽지요. 사회생활의 속도에 따라가주기도 바쁜 일상 속에서 잠깐 멈추어 서서 뭔가에 대해 골똘히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시인이라는 존재들은 요구되는 속도에 반기를 들며 일상의 사소한 결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어떤 의미들을 발견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아주 적극적으로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일종의 의무가 부여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저는 하거든요. 그게 시인이 대단한 무엇이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시인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가장 예민하게 깨어있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일상의 결을 살려주는, 시인의 감수성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보단 다른 산문집 - 물 밑에 달이 열릴때, 김선우의 사물들, 내 입에 들어 온 설탕같은 키스들 등 - 을 추천한다. 분노해야 할 때 제대로 분노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아직 난 시인의 '분노'보다는 '위로'가 필요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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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05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오르는 책들마다...

Jade 2007-09-05 01:27   좋아요 0 | URL
ㅋㅋ 저 지금 "서로주체성의 이념"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ㅎㅎ 술마시면선 루시드폴 노래를..ㅎㅎ

마늘빵 2007-09-05 19:50   좋아요 0 | URL
서로주체성은 시간이 좀 걸릴텐데 그래도 읽고나면 뿌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