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살로메 - 자유로운 여자 이야기 삶과 전설 7
프랑수아즈 지루 지음, 함유선 옮김 / 해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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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살로메. 김선우 시인 산문집에서 처음 알았고, "니체가 눈물을 흘릴때"에서 니체를 쥐락펴락 했던 그녀의 당당함이 조금은 낯설었다. 알고보니 니체 뿐 아니라 프로이트, 릴케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천재적 지성을 자극했던 "대단한 여인"이랜다. '자유로운 여자', '한시대를 풍미했던 여자',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 살로메 앞에 붙는 수식어는 화려하기만 하다. 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당당함과 날카로운 지성으로 한순간에 사람을 매혹시키곤, 잡힐 듯 말 듯 줄다리기를 하다 어느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몰차게 돌아서곤 했던 루. 당대의 사회적 통념을 깨고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성적인 접근도 허용하지 않으며 오직 지적 충만감만 허락했던, '까칠했던' 여인. - 서른다섯에 비로소 "여자"로서 남자와 "관계"맺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어떤 연유로 돌변한건지 전기 작가들사이에 논란이 많은가보다. 남들에겐 "당연한" 일상들이, 그녀에겐 "특별"했던 까닭은 뭘까. - 전기 작가는 조심스럽게 근친상간의 가능성을 꺼내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책을 가득 채운 파란만장한, 화려한 그녀의 경력과 재능엔 왠지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돌연 열등감, 혹은 컴플렉스에 관한 짧은 생각을 해본다. 연인을 쉽게 떠나는 그녀의 행동은, "또다시"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의 방어기제였을거란 나름의 추측에 빠져.

어떻게 자신에 목매다는 - 심지어 실제 자살했던 사람들도 있다 - 사람들을 매몰차게 떠날 수 있었을까 라는, 케케묵은 도덕적 잣대로 그녀를 평가하고 싶진 않다. "사람이기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고, 그녀가 떠나지 못할 아무 이유도 없었다. 내가 궁금한건, 왜 그녀는 그들처럼, 그네들을 사랑할 수 "없었"을까다. 사랑은 엄연히 동사고, 사랑"받음"보다 사랑"함"이 훨씬 더 충만한 마음의 기쁨을 준다는 것 - 모든것을 쏟아부었던 사랑이 떠나고 나면 열병처럼 무섭게 앓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지 못하느니보다 열렬히 사랑하고 버림받는쪽을 택하겠노라, 김선우 시인은 말한다. - 이, 수천년에 걸쳐 경험자들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진리며 전부다. 적어도 이 책 속의 루는, 많은 연인들과 더불어 사랑받음을 즐기고 지적 유희로 충만하지만, 사랑의 안타까움으로 눈물짓거나 가슴앓는 '인간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쿨"한 여인일 뿐.

적어도 의학적 관점으로는, 일체의 섹슈얼한 접촉을 거부했던 루는, 강박증 환자거나 신체이상자다. 인간, 특히 여성은 다달이 변하는 정교하고 복잡한 호르몬체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흔히 말하는 노처녀 히스테리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공급되지 못하는 호르몬불균형인 경우가 많다. - 히포크라테스시절엔 히스테리 치료 처방으로 임신이 내려지기도 했다나! -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빌헬름 라이히는 오르가슴을 통한 오르곤에너지의 방출이 생명의 원천이라고도 주장했는데, 루의 성에 대한 '강박관념'은 평범하다고 보기엔 도가 지나치다. 하긴 전에 어딘가에서 고승들이나 고매한 수행자들이 느끼는, 정신적 깨달음에서 얻는 엄청난 희열을 "non-sexual orgasm"이라고 표현한것을 본적이 있긴 하다. 지성이 너무 뛰어났던 나머지, 천재들과 지적 유희를 즐기는 것으로도 이미 충분했던건지. 흠.

글쎄. 왠지 그녀가 행복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분명 책엔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행복한 그녀의 모습이 가득하지만, 평전임에도 불구하고 루의 심리묘사는 거의 없다. 루는, 자신이 쓴 편지나 자신에 대한 글 - 릴케가 쓴 에로틱한 시 등 - 을 상당수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녀의 일기에도 소소한 일상 - 지적 자극을 주지않는 관계, 예를들어 남편, 평범한 의사였던 체메크 등 - 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심지어 고의적으로 추정되는 두번의 유산에 관해서도 언급조차 없댄다. 그녀는, 스스로에게도 페르소나가 너무 강했던것은 아닐까. 혹은 스스로 고매한 영혼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일종의 '분열증' 상태였거나. 똑똑하고 섬세한 사람들이 우울증에 잘 걸리는 이유는 바로 "평범함의 부재"란다. 자신이 평범하다는 걸 인정하지 못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비현실성"에 갇혀버리기 때문에. 혹 루의 강박관념도 그런 경우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녀는, 마음속 깊숙히 채워지지 않은 고독감으로 고통스러워 했을지도.

얼굴한번 보지 못한 사람에게, 너무 혹독한 말을 많이도 늘어놓는다. 글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단한 여인"이 일견 멋져 보이는 건 사실이다. 슬픔에 고립되지 않고 늘 당당했으니까. 하지만 난 오늘도 사랑에 울고 웃고 좌절하는 평범한 여인네들에게 어쩐지 더 애정을 느낀다. 평범함 속에서 의미를 찾는, 지리멸렬한 일상속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그런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 아마도 내가 루 처럼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책 곳곳에 등장하는, 사랑에 눈멀고 서서히 죽어간 니체와 릴케의 시구들이, -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 루의 화려한 에피소드보다 더 깊숙이 마음속에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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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1 09: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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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1 1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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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1 2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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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2 0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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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2 00: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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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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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만에 알랭 드 보통의 책을 펼쳤다. 앞서읽은 책들이 사랑과, 여행/건축에 대한 그 자신의 생각이라면, 이 책은 유명한 여섯 철학자의 이야기다. 인간이 겪어야 할 숙명적 고뇌에 대해, 각 철학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넌지시 위로를 건넨다. 괜찮아. 이걸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다구!

드 보통의 글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느껴만 왔던' 생각들을 조목조목 명쾌하게 풀어놓는 맛이 있다. 일전에 상담받을때, 자신의 생각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것과 구체적 언어로 표현하는것은 하늘과 땅 차이란다. 생각을 글이나 말로 전달하는 과정중에 뭉뚱그려진 감정들을 날카롭게 분리시키고, 전혀 다른것들을 꿰뚫는 하나의 원칙을 발견해가면서 스스로 자신을 경계짓고 또 변화시킨다나. 하여 글이든 말이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대단한 사회적 행위이자 치유의 시작이란다. 설령 듣는 사람이 없는, 스스로의 독백일지라도. 그런 의미에서 보면, 드 보통의 글은 읽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에 이름표를 붙일 수 있게 세심하게 도와주는 친절함이 배어있다.

음, 사실 나에게 있어 이 책은 다른 사람의 주장을 풀어놓다보니, 그전 책들에서 느꼈던 즐거움은 많지 않았다. 물론 보통 특유의 어법으로 - 적절한 해설과 비유, 많은 사진등을 곁들여 - 철학개론서에서 봤으면 전혀 다가오지 않았을 말들을 좀 더 친근하게 던져주기는 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에서처럼 단락마다 번호를 붙여 - 짧은 단락들마다 다른 관점에서 - 써내려간 곳이 많다. 쇼펜하우어 부분에선 한토막 소설을 던져놓고 - 마치 "다음 글을 읽고 분석하시오"라는 논술문제의 답변처럼 - 그 철학자의 입장에서, 때론 관찰자의 입장에서 조목조목 글을 풀어간다. 주제별 철학자들 이야기는 서사적 흐름을 가진 장편소설같기도 하고, 일정한 주제로 묶인 단편소설집 같기도 하고 한권의 책 안에 여러 서술방식이 공존한다. 이사람, 어려울 수 있는 주제를 쉽게 쓰는 재주는 확실하다!

책은 총 여섯가지 고뇌에 대한 위안 - 인기없음에 대한 위안(소크라테스),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데 대한 위안(에피쿠로스), 좌절에 대한 위안(세네카),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몽테뉴),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쇼펜하우어), 곤경에 대한 위안(니체). - 들이다. 인간을 다룬 책이라면 - 소설이든 철학책이든 칼럼이든 - 어디서나 나올법한 보편적 주제들이기도 하고, 바꿔말하면 우리가 늘상 마음에 품고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글쎄,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어서일까. '삶의 간절함'이 화두인 나에겐, 철학자들의 답변들이 모두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한 방법"들로 여겨진다. 우리가 '좌절'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함몰되지 않기 위하여, 해답없는 문제에 틀어박혀 시간을 소진하기 보단, 더 '온전하게' 살기 위한 해결책들로 보인다. 지독한 염세주의자였던 쇼펜하우어는, 사실은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때의 좌절에 빠지지 않기 위해, 헛된 기대가 주는 낙심을 피하기 위해 삶에서 환상을 벗겨낸것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겪는 고통이, 사실은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통의 바다에 뿌려진 한방울의 빗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고통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고통과 벗삼아 '온전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린아이에게는, 자기 앞에 놓여진 생의 무거움을 감당하기 위해, 그 불안과 공포를 이겨나가기 위한 신뢰감 구축이 가장 중요한 반면, 성인은 앞으로 맞이할 죽음 - 여태까지 한번도 스스로 겪어본 적 없는 낯선 대상 - 앞에 자신이 지나온 날들과 화해하는 통합과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똑같은 경험이라도 어렸을적 경험이 인생 전체를 짓누르는 큰 상처가 되기도 하는 것은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지 못해,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뚝 떼내어진 '실체'로 보기 때문이란다. 그 ' 실체'는 자신으로 통합되지 못해서 오히려 삶을 억누르지만, 그것이 내면화 되면 -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 오히려 그것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댄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혼자일 수 밖에 없고 - 아무리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도, 나와 똑같을 순 없다. "和而不同" - 누구나 자기 나름의 고뇌를 안고 살아가겠지만, 고뇌를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 한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 융은, 인간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쉽게 와닿지 않지만 - 특히, 가슴으로는 - 천천히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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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도서관 2007-08-09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이부동, 저도 좋아하는 말입니다.

Jade 2007-08-09 11:28   좋아요 0 | URL
참 똑같은 단어라도 쓰이는 상황에 따라 와닿는 정도가 다른것 같아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봤을 땐 정말 건조한 단어였는데 ^^;;

2007-08-09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09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09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0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0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씨는 제가 좋아라하는 유일한 외국'작가'에요. 아직까지 다른 작가들을 많이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근데 최근에 나온 <행복의 건축>은 아직 못 읽었습니다. 다른 것들에 치여서. -_-

Jade 2007-08-09 16:33   좋아요 0 | URL
ㅎㅎ 전 여친이랑 헤어진 친구가 추천해줘서 보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 글 은근 중독성 있어요 ㅎㅎ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구판절판


소크라테스의 엘리트주의에는 속물근성이나 편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정성 들여 지켜온 견해에 대해서는 차별적인 태도를 내보인 경우도 있지만, 그 차별은 계급이나 돈, 군대 기록이나 국적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가 강조했듯이) 누구나 접근 가능한 정신의 기능인 이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55쪽

"실제로 일어날 시점에 아무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 어떤 일(죽음)을 두고 미리 걱정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했다. 인간이 결코 경험하지 못할 어떤 상태를 두고 미리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97쪽

사치스런 물건을 갈망하고 미련을 떨치지 못할 때 정작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질문은 자신에게서 멀찌감치 사라지게된다.-102쪽

값비싼 물건들은,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따로 있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을 마치 물질적 차원에서 확보하는 듯한 환상을 준다.-107쪽

세네카에 따르면 분노는 열정의 통제 불가능한 폭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수정 가능한) 추론의 오류에서 나온다.....우리를 화나게 만드는 것들은 다른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의 존재 유형에 대해 품고 있는 낙천적인 견해들이다.......가장 격한 분노는 존재의 원칙에 대한 상식을 뒤엎는 사건이 일어날 때 터져나온다.-132쪽

세네카는, 갈망이 채워지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헤아려보면 우리는 그 예상된 문제들이 그것이 야기한 근심보다는 훨씬 덜 심각하다는 사실을 거의 예외없이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을 확언한 셈이다.-153쪽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 걸.-179쪽

우리가 누군가를 친구로 인정하는 것은 상대방이 친절하고 어울려 즐길만한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마 이 점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데) 그가 우리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해해줘서이기도 하다.-233쪽

몽테뉴는 지혜는 어느 인생에서나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이야기들이 제아무리 소박하다 하더라도 그 많은 책에서보다 우리 자신에게서 더 위대한 통찰력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245쪽

흥이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은 많지만, 만약 그런 존재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와 너무 가까우면 우리는 그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묘한 편견 때문이다.-260쪽

쇼펜하우어에겐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비통함을 불러일으키는 헛된 기대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놓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행복이란 살아 생전에 꼭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란 확고한 가정과 그에 따른 행동이다. 사랑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 때 사랑의 본래 계획에는 행복이란 것은 절대로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는가. 이처럼 역설적이게도, 가장 염세적인 사상가들이 가장 쾌활할수도 있는 것이다.-312쪽

인간의 병 중에서 가장 나쁜 병은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방식에서 비롯되엇다. 치유로 보이는 것이 결국에는 그 치유의 대상이 되었던 병보다 더 독한 무엇인가를 낳앗다. 즉각적으로 효과를 나타내는 수단들, 마취와 도취, 소위 말하는 위안들은 무지하게도 치유책으로 여겨졌다. 여기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고통을 즉각적으로 진정시키는 방법들은 그 고통을 낳은 불만을 악화시키는 대가를 치른다.-322쪽

가장 분별 있는 인간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애쓴다.-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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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절판


자유와 독립은 억압적인 세계체제의 코드를 내면화하여 그 속에서 틈새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독립은 세계 체제를 조감한 후 상대화한 상태에서 그 모순을 먼저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116쪽

근대 동아시아 폭압 정권의 역사를 조감해보면.....이들은 서구에 대한 내면적인 열등감이 크면서도 겉으로는 "서구 물질주의에 대한 동양정신의 우월성"과 같은 논리를 펼치고, '동양'이나 '민족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반대자들을 눌러버리는 전술을 구사한다.-118쪽

조선일보를 비롯한 거대 보수 일간지들이 아무리 '민족지'이자 '민의 대변 기관'이라는 자화자찬을 늘어놓아도 사실은 그들이 노엄 촘스키가 말하는 '필요한 환상', 즉 지배 체제 유지/강화에 필요한 허위의식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됬다는 것이다.-139쪽

"심적 고통과 분노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문학은 애당초 사산된 것"-248쪽

언론의 '숨은 의제'를 파헤쳐 언론이 강요하는 세계관을 거부할 줄 알아야만 체제의 거짓에 그대로 놀아나는 '선량한 국민'의 처지에서 벗어나 상식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351쪽

민주주의와 인권 의식이 빠진 사회주의는 결국 더 심한 자본주의로 돌아오고 만다는 것도 동아시아 좌파가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값진 교훈이다.-359쪽

"흑인종이 백인종보다 덜 문명적이라 하신다면 여름철 불볕에 피부가 타서 까맣게 되면 문명인의 자격을 잃게 됩니까?" - 시인 예로센코의 어린시절 질문-369쪽

'서양'과 '동양'을 차별화하는 것은 민족들을 이간질하려는 지배층의 수법일 뿐 실제로 노동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동서를 막론하고 똑같다" - 시인 예로센코, 타고르와의 논쟁에서-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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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경계에 선 사람이, 중심부에선 볼 수 없는 핵심을 꿰뚫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시야가 닫혀있지 않기 때문일까. 박노자의 글을 읽으면, '당연한'것들이 순간순간 낯설어 진다. 새로운 것을 깨치는 즐거움보다, 머릿속에 이미 자리잡은 것들을 옮기느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도 그의 책은 - 관심사 밖의 주제라도 - 나오는 종종 읽게되니, 확실히 중독성 있는 글이다.

고등학생때, 역사를 보는 두 관점 - 사실의기록, 현재의 반영 - 에 대해 배우며 '그냥 그런가 보다' 흘겼던 기억이 난다. 더 정확히는, "다음 중 역사에 대한 관점이 다른 하나를 고르시오"라는 뻔한 문제유형에 길들여져, 역사서술의 의미에 대한 어떤 심각한 고민도 없었다. 아니, 그 당시의 나에겐 역사는 그저 배우기 위한 역사였을 뿐.    

'짐은 이것을 역사라 부르리라'는,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역사를 "새로 썼던" 여불위에 대한 소설이다. 이 책이 단순히 허구의 소설인지, 진실에 근접한 역사물인지는 제쳐두고 잠시 역사의 "효용"에 대해 생각해본다. 역사가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이용된다면 사람들의 집단적 무의식을 제한할 수 있는, 뒤집어 보면 근원을 알수없는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심어줄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특히 판단능력이 부족한 어린시절부터 주입된 역사라면.

이 책은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등장하는 주요 "애국자"들의 "다분히 친일적"인 이면에 대해 폭로하기도 하고 - 아직도 기억난다.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만화로 나와있던 '이준'열사. 비분강개로 인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던 "열사"가 사실은 친일파였다니! 중고등학교 국사 시험에 주관식문제로 출제되던 '장지연'과 '민영환'역시! -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이름모를 - 하지만 당대에는 꽤 중요한 일들은 한 - 운동가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호국불교"라는 이름으로 각종 전쟁시 칼을 들고 나선 승려들이, 사실은 울며 겨자먹기로 끌려나갔다는 등 '민족주의'과 '애국'의 이름아래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배워왔던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진다. 이쯤 되면 머릿속이 핑핑 돌면서 아득해진다. 대체 내가 배워왔던 것들이, 당연히 '사실'이라고 믿던 것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인거야!! 아니,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배워왔던거지?

요즘은 '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이 아니라서 딱히 관심있는 학생이 아니면 한국사에 대해 잘 모를거다. 인물과 갈등관계 중심의 사극에 길들여져 어떤 아이콘이나 영상물로 표현되는 역사를 배울테고. 갑자기 늙은이같은 노파심이 든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서 어떤 '깨임'의 과정을 겪는다면 얼마나 많은 진통을 겪어야 할까. 물론 아는것은 상처받는 것이라 했지만. 또 아는거 없긴 나도 다를바 없지만, 갑자기 왜 이런 건방진 염려가 드는건지.

여담이지만 어제 두번째로 "화려한 휴가"를 봤다.  감독은 역사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사람'을 다루려 했다고 한다. 정치적 의미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관객이 궁금하면 찾아보게 되어 있다고. 주인공 '민우'는 윤상원 열사를 모티브로 출발했지만 민초의 힘을 표현하고자 바꾼것이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 어쨌든 200만을 훌쩍 넘어섰으니 "광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이제 남은건, 광주를 '알게 된' 사람들이 영상물에 표현된 것에 국한되지 않고 스스로 찾아보길 바랄수밖에.

 "언론의 '숨은 의제'를 파헤쳐 언론이 강요하는 세계관을 거부할 줄 알아야만 체제의 거짓에 그대로 놀아나는 '선량한 국민'의 처지에서 벗어나 상식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p.351)

문득 '상식'을 회복하기에도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눈으로 들어온 텍스트들이 곧바로 각인되지 않게 열심히 물고 뜯어 에둘러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는 "쓰라고" 있다는 진부한 진리를 곱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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