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7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철 옮김 / 범우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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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안나 카레니나, 를 다 읽었다.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다. 좋게 말하면 말 그대로 '빨리' 읽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대충 읽는거다. 한줄 한줄을 음미하기 보다는 남은 페이지 헤아리며, 혹은 줄거리 파악에 급급해서 쓱쓱 넘길때도 많다. 그 속도라면 이런 책 두권 쯤 하루에도 다 읽어치웠겠지만, 요새는 기껏해야 지하철ㅡ 그리고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20~30분쯤 읽는게 전부였다. 하여 십수일이 걸쳐 진득이도 읽었다. 천천히 읽었다고 해서 꼭 집중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틈틈히 1000페이지쯤 되는 작품을 읽어내니 뭔가 큰 일을 해치운 기분이다. 다른 책 같으면 읽다가 포기했을법도 한데, 이 책은 놓는게 아쉬울 정도였으니까. 다 읽어낸 지금은 스스로 뿌듯하다.

톨스토이는 단편 몇개밖에 안읽었었지만 어쨌든 이 책만큼은 마음에 쏙 든다. 한번에 20~30분밖에 못읽었다만 읽는 순간 만큼은 무섭게 빠져들어간다. 크고작은 여러 사건이 등장하지만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나같은 문학 얼치기한테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수정하고 다듬었는지가 절로 느껴진다. 소설보다 먼저 나오는 옮긴이 서문에서 안나-브론스키는 파국으로 치닫고, 레빈-키치의 사랑은 이상화 된다고 나와있어서ㅡ 읽기 전에는 금방 질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뻔한 얘기를 1000페이지 씩이나.....아! 그래도 역시 대가는 다르구나. 아무리 뻔한 전개일지라도 사건과 심리를 펼쳐내는 방법에 따라 이렇게 독자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니. 긴 소설을 이렇게 질리지 않고 읽어본게 얼마만이던가. 

러시아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 읽어본게 거의 전부라 나도 모르게 비교하게 된다. 석영중 교수 책에 "톨스토이 작품 등 다른 고전들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다이아몬드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이아몬드 광산과 같다"는 구절이 있다. 절묘한 비유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이 뭔가 정신없고 술술 써내려간 느낌이 든다면 이 작품은 수없이 깎고 다듬어낸 느낌이다. 둘 다 각자의 매력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문장 사이에 광기가 번득이는 도 아저씨 글이 더 끌린다. 왠지 인간적이기 때문이랄까. 잘 다듬어진 글은 깔끔하지만 어딘가 '건조하다'. 톨스토이 책이 종교적 색채와 교훈적 성격이 짙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좋았던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레빈과 키치의 '이니셜 사랑고백' 원문에는 분명 조금 다른 방식이었을 테고, 번역과정상 어쩔수 없이 다르게 표현되었겠지만. 아 그래도 내 꼭지를 돌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언, 당, 나, 그, 수, 없, 말, 그, 영, 그, 수, 없, 것, 아, 그, 그, 수, 없, 것?" 

(언젠가 당신은 나에게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영원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그때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까?)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두 사람은 실로 수개월만에 만났고, 직전까지 서로에겐 건널수 없는 듯한마음의 벽이 놓여있었건만. 이런 아리송한 암호로도 서로의 마음을 교류하는 데에는 충분하다. 다른이들은 알 수 없는, 오로지 두 사람만을 위한 대화. 이 부분에서 어찌나 마음이 콩닥콩닥 뛰던지. 어찌나 마음이 설레던지. 가슴 밑바닥에서 부터 차오르는 그 무언가에 휩싸여 한동안 헤~ 넋빼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고백을 해온다면, 겉으로는 도도하게 튕길망정 속으로는 홀딱 넘어가고 말거라고, 나홀로 므흣한 상상에 빠져서. 헤헤 

(이 구절 덕에 잊고 있었던 행복한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오년도 더 된 일이다. 나도 저 비슷한 이니셜 놀이를 하며 설레는 마음을 주체못하던 때가 있었지. "ㅂㄱㅅㅇ" "ㅅㄹㅎ" 이런 진부한 대화에서부터 'ㅇㅇㅂㄹㄱㄷㄷ?" 같은 일상의 대화까지 둘만 아는 암호(?)를 주고받던 기억.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ㅅㄹㅎ"라고 써주던 기억. 아....! 벌써 수년전 일이라니 아득하구나....쩝) 

각설하고, 두번째로 좋았던 것은 탁월한 심리묘사다. 특히 질투와 의심에 빠진 사람의 절박하고도 폐쇄적인 마음 흐름들. 불같은 사랑의 상처를 안고있는 사람들에겐,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 보다도 절망 혹은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의 심리가 더욱 절절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소설 끝자락 부분ㅡ  점점 식어가는 브론스키의 애정을 애타게 바라지만, 그 강렬한 바람때문에 더욱 엇나가는 안나를,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상태로 지속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희망을 놓지 못하는 간절함. 그리고...그 희망이 툭 떨어졌을때의 절박함. 자신을 비롯한 모든것이 슬프게만 보이는 그 마음...행복해보이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더 나아가 가증스럽게만 보이는 가여운 사람. 그리고... 

아무튼. 왜 이책이 그렇게 자주 인용되는지 알 것 같다. 어느 부분을 읽어도 삶에 대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이 스며있는 작품이다. 사실 문학적 감수성은 그리 예민하지 않아 소설을 읽고 희열을 느낄때가 많지는 않지만 가끔은 그런 순간들이 있다. 머릿속에 "아!"하며 한줄기 빛이 비치거나, 뭔가 한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 또는 나도 모르게 멍때리고 그저 바라보게 만드는 구절들. "인간은 왜 문학작품을 쓰고 읽는 것일까?"하는 짐짓 진지한 물음이 떠오르게 하는 순간들. 며칠 만 지나면 일상속에 파묻힐 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신비한(?) 마음을 선사하는. 일상의 마법.  

이 책을 읽을때면, 거의 마리아 칼라스를 배경음악으로 깔았다. 칼라스, 하면 오나시스와의 열정적인 사랑이 떠오른다. 칼라스를 숨쉬게 했던 불같은 사랑과 열정의 원천. 결혼을 원했지만 재키 케네디와의 얽힘으로 잘 되지 않고. 끝내는 오나시스를 먼저 보내고 쓸쓸하게 죽어간 여인. 책에 묘사되는 안나는 뼛속에서 우러나오는 기품과 누구든지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진, 아름답고 멋진 여자다. 당당하고 우아한 안나의 이미지와 칼라스의 깊고 풍부한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중첩되며슬프고도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사랑을 위해 모든것을 바칠 수 있었고, 모든것을 버릴 수 있었던. 무서운 열정을 가진 여인들. 세간에서는 '타락하고 요망한 계집'으로 비난할 지언정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었던. 자신의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여인들. 그리고 쓸쓸한 죽음.   

사실 이 책은 안나가 유일한 주인공은 아니다. 안나 못지않게 레빈-키치의 사랑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안나-브론스키의 파국과 달리 레빈-키치는 바람직한 부부상으로 묘사될 뿐더러,  결말도 그럭저럭 해피엔딩이다. 오블론스키나 카레닌을 위시한 귀족/사교계의 묘사 또는 비판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모든것을 고려해도 역시 제목은 '안나 카레니나'일 수 밖에 없다. 안나라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캐릭터는ㅡ 독자에게도 이 소설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뿜어낸다.  

칼라스의 '노르마'가 더욱 절절히 와닿는 밤이다. 

Casta Diva,
Casta Diva che inargenti
순결한 여신이여,
당신은 은빛으로 물들입니다
queste sacre, queste sacre,
queste sacre antiche piante,
이 신성하고 아주 오래된 나무들을,
a noi volgi il bel sembiante,
a noi volgi, a noi volgi
aaah  aaah  aaah il bel sembiante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senza nube   e senza vel...
구름도 없고 베일도 쓰지않은...
Tempra, o Diva
진정시켜 주소서,
오 여신이여
tempra tu de’ cori ardenti
진정시켜 주소서
당신께서 타오르는 마음을
tempra ancora
tempra ancora
tempra ancora lo zelo audace,
진정시켜주소서 도전적인 열정을,
spargi in terra
spargi in terra
spargi in terra aaah  aaah  aaah
quella pace
뿌려주소서 땅위에 평화를
che regnar tu fai nel ciel...
당신께서 하늘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Fine al rito : e il aaah  aaah  aaah sacro bosco
의식은 끝났다: 그리고 신성한 숲에
Sia disgombro dai profani.
세속적인 사람들은 없다.
Quando il Nume irato e fosco,
분노하고 우울한 신이
Chiegga il sangue dei Romani,
요구한다면 로마인들의 피를
Dal Druidico delubro
드루이드 신전에서
La mia voce tuonera.
나의 목소리가 천둥치리라.
Cadra; punirlo io posso.
그가 타락한다면; 나는 그를 처벌할 수 있다.
Ma, punirlo, il cor non sa.
그러나, 그를 처벌할 수가 없구나 나의 마음은.
Ah! bello a me ritorna
아! 아름다운 사람아 내게 돌아오라
Del fido amor primiero;
처음의 충실한 사랑으로;
E contro il mondo intiero...
전세계와 대적하여
Difesa a te saro.
보호할 것이다 당신을
Ah! bello a me ritorna
아! 아름다운 사람아 내게 돌아오라
Del raggio tuo sereno;
당신의 평온한 빛과 함께;
E vita nel tuo seno,
살고싶어라 당신의 품안에서,
E patria e cielo avro.
조국이여 그리고 하늘이여.
Ah, riedi ancora qual eri allora,
아, 돌아오라 다시금 예전의 당신으로,
Quando il cor ti diedi allora,
그때에 나의 마음을 네게 주었었지
Ah, riedi a me.
아, 돌아오라 내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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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9-05-1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어요... 러시아 문학은 기본이 1,000쪽이니 지금은 참 읽기 쉽지 않어요 ㅎㅎ

Jade 2009-05-16 19:44   좋아요 0 | URL
ㅎㅎ 길이도 길이지만 책이 두껍고 무거워서 들고다니느라 애먹었죠 뭐 ㅋㅋ
요즘은 책읽을 시간이 많지 않아 거의 소설류만 읽는것 같아요. 으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