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주체성의 이념 - 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 인문정신의 탐구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철학'이라고 하면 왠지 현실세계와는 동떨어진, 어떤 현학적 학문일거라는 편견이 있다. 사실 살아가며 던지는 모든 의문들의 바탕이 되는것이 철학이지만, 소위 5지선다형의 '수능형'에 길들여진 사고방식 때문에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 보는것이 낯설기도 하거니와 삶이 힘들다는 이유로 고매한 '진리'보다는 현실에서 통용되는 보다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지식'이 더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 역시 철학에는 거의 문외한이고 확실히 이 책은 나 같은 '교양이 부족한'사람이 읽기에 어려운 책인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끙끙거리며 읽고 난 지금은 오히려 '교양서적'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대체 왜?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1부에선 - 저자가 '홀로주체성'이라 부르는 - '나르시시즘'에 근원을 둔 서양철학사에 대해 살피고 2부에선 - 끊임없는 수난과 지배를 겪어 온 우리 민족의 특수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 저자가 정립하고자 하는 우리 스스로의 철학, '서로주체성'의 이념에 대해 말한다. 고백하자면 1부를 읽다 - 아는것이 별로 없는 통에 - 제 풀에 지쳐 몇달동안을 그대로 덮어두고 있다 며칠전에야 다시 읽기 시작했다. 2부는 결코 쉽진 않지만 1부에 비해서는 훨씬 수월하게 읽힌다. 친숙한 시 - 이상, 윤동주, 김춘수 등의 잘 알려진 시 - 와 익숙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설명하기 때문에 기본적 이해도가 높아지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곳곳에 드러나는 저자의 통찰력때문에 새로운 시각을 만나는 '희열'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철학사에 익숙치 않은 독자라면 2부를 먼저 읽을것을 권한다.

감히 이 책에 대해 나름의 평가를 내린다면, 나는 '보는것'에서 '듣는것'으로의 전환이 이 책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보는 것'이 주체가 어떤 수동적 '대상'을 '관찰'하는 일방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듣는 것' 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는 '상호성'을 내포한다. 화자와 청자는 각자 자신의 행위를 위해 반드시 상대방의 존재를 전제로 하지만 그것은 어떤 의존이나 종속이 아닌 '만남'이다. 저자가 말하는 '서로주체성'이란  '나와 너의 인격적 만남'으로 일어나는 '관계'다.

좋은 책은, 읽는 독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의학을 공부하는 내게 '보는 것'과 '듣는 것'의 문제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의학에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서 부터 과연 질병을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지 - '구조적 변화를 수반하는 조직의 이상상태'에서부터 구조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기능 이상' 까지 - 에 대한 논란과 더불어 의학이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질병'을 치료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질병이 어떤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보는 것'에 익숙해진 필연적 결과다. 질병의 진단 과정에서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은 주관적이고 신체적으로 드러나는 '징후'들은 객관적 근거가 된다. 소위 말하는 "3분진료"는 환자가 '대상'이 되는 극단적 사례다. 한의학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한눈에 "척 보고"아는, 혹은 맥만 잡고 척 알아내는 의사가 명의로 대접받고 환자에게 꼬치꼬치 묻는 의사는 "B급 의사"가 되어버린다. (물론, 오랜 경험에 의한 노하우에서 척 보고 알 수 있는 '진짜'명의들도 많지만, 많은 경우에 '척 보고 아는' 진단방식은 의사의 카리스마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최근 한국여성들은  정신과적 상담의 필요성이 있을 때 의사를 찾지 않고 점집으로 간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이런 글을 쓰셨다.

‘무당’은 말을 “들어주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거니와 정신과 상담 치료 받으러 갈 때 정신과 의사가 말을 “들어주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나 하고 기대하지만 나올 때는 역시나 취조 당한 기분이 됩니다. 의사는 전문 지식으로 분석하고 진단해서 해답을 제시하는 존재라고 자리 매겨졌기 때문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의사와 환자의 만남은 대등한 상호 주체로서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 관계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체는 객체를 제압합니다. 객체는 ‘사물’이기 때문이지요. 대상적 사물은 주체의 시선에 장악되게 마련입니다. 이 관계는 자기 완결적인 홀로 주체성-철학자 김상봉의 어법-에 길들여진 서구 모형입니다.

자신을 세상 중심에 놓고 자기 동일성으로 대상을 제압해 나아가는 나르시시즘의 그림자가 정신의학이나 상담학이라고 해서 비껴갔겠습니까? 세상의 중심에 선 존재가 자신 이외의 존재에게 자신을 “버리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질 리 만무하지요. 그래서 이 땅의 아낙네들은 말을 “들어주는” 존재로서 ‘무당’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의 소지 하나를 없애고 가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무당’은 샤머니즘적 영매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전통문화 속에서 기층민의 상담자 노릇을 수행해 왔던 사회 기능적 존재로서 ‘무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에는 이미 이런 저런 부정적 의미 군이 형성되어 있지만 일단 이렇게 조정해서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담자로서 ‘무당’은 어떻게 해서 말을 “들어주는” 존재일 수 있었을까요? 연유는 간단명료합니다. 그들이 버려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하염없이 가장자리로 밀려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장자리에 선 자에게 은총으로 주어지는 인식론적 특권이 바로 맞은 편 가장자리를 제대로 통찰하는 것입니다.

맞은 편 가장자리에 대한 통찰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맞은 편 가장자리에 선 존재에게 귀를 열어 “듣는” 데서 옵니다. 뜻밖의 낯선 존재-자신을 버리게 하는 존재와 단도직입으로 만나 그의 말을 “듣는” 데서 참된 의미의 융합이 일어납니다. 서로의 삶에 깃들어 갑니다. 주체로서 치료자와 객체로서 환자의 수직적 구분이 무너집니다.

이렇게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이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과 마주하는 곳이 점집입니다. 자기 상실의 아픔이 공유되는 시공간에서 “속이 다 후련한” 소통이 일어기 때문에 이른바 전문가가 보기에는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님에도 ‘무당’과 상담하는 일은 현대의학의 거대 헤게모니를 밀치고 서울 한 복판에서도 당당히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는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이 마주하는 가장자리에서 핀 상처의 꽃입니다. 두 세력은 끊임없이 우리를 침탈했습니다. 중국, 일본, 미국에 차례로 자기 정체성을 내맡기며 우리는 피와 눈물로 생명을 지켜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가장자리 삶에서 형성된 마음이고 아픔이기 때문에 우리는 저 중심세계와 다른 상담 문화를 빚어내야 합니다.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점집으로 가는 아낙네의 발길을 막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한사코 그리로 끌리는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으려면 이른바 전문가 집단 자체가 교만한 ‘중심’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밀려나고 버려진 사람의 슬픔을, 밀어내고 버린 사람의 세계 인식이 구성한 전문지식으로 달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의자(醫者)가 ‘무당’이어야 한다는 우리 생각은 바로 이런 깨달음에 닻을 내린 것입니다. 의자가 겸허히 자기의 중심을 버리고 가장자리로 나서서 그 또한 가장자리로 밀려나 고통스러운 사람과 만나야 진정한 소통이 일어납니다. 환자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 합니다. 그 말을 온 영혼으로 “들어야” 의자(醫者)입니다. 그가 바로 참 ‘무당’입니다.

환자가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설 때 ‘의사한테 뭔가 해답을 얻어 빨리 병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중 일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헤아려 주는 사람과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먼저입니다. 자신의 말을 들을 귀를 가진 이를 찾으려는 안타까움이 먼저입니다. 말할 입 잠시 닫으면 이내 침묵보다 위대한 상담이 없다는 사실을 깨치게 됩니다.

가장자리 삶에서 빚어진 “들음” 무의식은 우리의 오랜 숙명입니다. 서로의 아픔을 엮어 소통의 지평선을 넓혀가는 일은 본디 우리 삶 자체였습니다. 이런 기층 정서를 단도직입으로 만날 수 있는 옛 가요 하나를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참으로 평범한, 아니 범속한 노랫말 속에 “들음” 무의식이 함초롬히 꽃피어 있습니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방랑의 길은 먼데
충청도 아줌마가 한사코 길을 막네.
주안상 하나 놓고 마주앉은 사람아.
술이나 따르면서, 따르면서 네 설움 내 설움을 엮어나 보자.

서울이고 부산이고 갈 곳은 있지만은
투술한 사투리가 너무도 정답고나.
눈물을 흘리면서 밤을 새운 사람아.
과거를 털어놓고, 털어놓고 새로운 아침 길을 걸어가 보자.

오기택의 <충청도 아줌마>

(http://www.esparoma.com/space/space01.htm)

 

솔직히 이 책에서 말하는 '서로주체성'을 내가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만남의 내면적 깊이는 타자를 위한 자기상실 - 나 자신에 대한 집착, 스스로에게 부여한 타당성의 유보 - 의 깊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삶을 대하는 따뜻함이 묻어나와 오래도록 책을 붙잡고 있었다. '인격의 온전한 만남'으로 형성되는 주체성에서, 인간 혹은 생명에 대한 경건함을 느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끙끙거리며 힘들게 읽었지만 누구에게 좋을지 알 수 없는 FTA를 위해 "뼈 쇠고기"까지 수입해야 하는 반 식민지 대한민국의 현재에서 '노예근성의 비판'에 그치지 않고 '주체적 대안'까지 제시하는 고마운 책을 만난 기분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을 필두로 '서로주체성'이 앞으로 한국인들의 화두가 되길, 하여 현 상황의 문제점을 풀어나갈 수많은 연구와 방법론들이 쏟아져 나오길 소망해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09-08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9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